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죽음을 앞두고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

49호 (2010년 1월 Issue 2)

‘논리’를 중시하던 그리스의 사유와 초월적인 ‘신’을 중시하던 기독교의 사유가 합류하면서 서양 사유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논리가 인간의 이성적 추론 능력에 대한 신뢰를 전제하고 있다면, 믿음은 초월적 신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에 근거하고 있다.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논리와 믿음, 혹은 이성과 신을 조화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아직까지 서양의 어느 위대한 정신도 그 과업을 완성하진 못한 것 같다. 헤겔이 이성을 통해 신을 알고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자마자, 키르케고르가 인간 이성을 통해 신에 이를 수 없다고 반박했던 것도 이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이성을 강조하던 서양의 사유가 여전히 초월적인 신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일이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에 따라 전개되진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살다 보면 언제든지 예상치 않았던 일, 심지어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한 일마저 일어나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불안과 공포를 완화하기 위해 초월적인 신에 대한 믿음이나 기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동양인들은 인생의 불가피한 속성인 불확실성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에 답을 줄 만한 구절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람의 일을 모두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뜻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말은 남송(南宋)의 유학자 호인(胡寅, 1098∼1156)이 자신의 저서 <독사관견(讀史管見)>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제갈량이 ‘사람의 일을 닦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뜻의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을 말한 데서부터 유래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초월적인 신에게 ‘기도’했다면, 동양 사람들은 천명을 ‘기다렸던’ 것이다. 어떤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신에게 기도하는 태도는 구체적인 일을 수행하고 나서 천명을 기다리는 태도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천명이란 무엇이며, 나아가 그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대목에서 맹자(BC 372?∼BC 289?)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바로 맹자가 ‘진인사대천명’으로 요약되는 과거 동양인들의 삶의 태도를 정초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다한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알고, 자신의 본성을 아는 사람은 ‘하늘(天)’을 안다. …요절하든 장수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닦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하늘의 명령(天命)’을 세우기 위해서다. - <맹자> 「진심(盡心)·상(上)」
 
기독교 신자라면 맹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하늘(天)’에서 신을, 그리고 ‘하늘의 명령(天命)’에서 신의 명령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성급한 판단이다. 맹자에게 하늘과 천명은 모두 인간의 어떤 노력 뒤에서나 드러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난 뒤에야 자신의 본성과 하늘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맹자의 태도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믿고 숭배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만약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자신을 닦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하늘과 하늘의 명령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것을 뜻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고, 후자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험준한 산을 오르고 있다고 하자. 어느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정상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발을 한 걸음도 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자각하게 된다. 맹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최선을 다했을 때 할 수 있는 것과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할 수 없는 것의 경계에 도달한다.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맹자가 말한 ‘하늘’이자 ‘하늘의 명령’이다. 함부로 ‘하늘’이나 ‘하늘의 명령’을 알았다고 떠벌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붓고 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도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던 것이다.
 
천명을 아는 사람은 곧 넘어질 위태로운 담장 아래에 있지 않는다. 자신의 도(道)를 다하고 죽는 것이 바로 올바른 명(命)이다. 죄인이 되어서 죽는 것은 올바른 명이 아니다. - <맹자> 「진심(盡心)·상(上)」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담장 밑에 있다가 불행히도 담장이 무너져 돌 더미에 깔릴 수가 있다. 이것은 과연 하늘의 명령이라 할 수 있을까? 맹자는 아니라고 강하게 말한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다했다면, 그래서 담장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누구라도 그런 담장 밑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담장의 돌 더미에 깔리게 된 진정한 이유는 한계 상황으로서 천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부주의에 있었다. 나아가 죄를 범하고 죽는 것도 천명이라고 할 수 없다. 충분히 주의했다면, 다시 말해 마음을 쏟아부었다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는 일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주의 탓으로 돌 더미에 깔리거나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는 사례에서는 천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 중국요리집이나 가정집에 빈번히 쓰여 있는 너무나 익숙한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교훈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 말의 논점은 바로 ‘진인사’,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는 구절에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한계 상황에 이를 수 있고, ‘이것이 나의 천명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한 결과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나의 역량 밖의 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결과가 좋아도 감사하게 받아들일 뿐이고, 반대로 결과가 나빠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맹자가 “자신의 도(道)를 다하고 죽는 것이 바로 올바른 명(命)”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신이 해야 할 일, 즉 자신의 도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죽음이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어떻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천명이니 말이다.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 이상적인 인격, 즉 ‘군자(君子)’든 ‘진인(眞人)’이든 모두 생사(生死)에 초탈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극한에 이를 때까지 최선을 다해 수행했던 사람들이다. 그 한계 상황에서 불행히도 죽음이 자신을 반길 때라도 그들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당당할 수 있었다. 삶에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해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미련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런 비극적 당당함이 요약된 구절이 바로 ‘진인사대천명’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난 뒤 조용히 그 결과를 기다리는 태도,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 이것이 바로 맹자 이후 동양의 지혜로운 자들이 지금도 ‘진인사대천명’이라는 구절로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옷깃을 여밀 일 아닌가?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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