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성, 얼음성… 기발한 宋장군 아이디어

18세기 영조대에 송규빈(宋奎斌)이라는 무관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역임한 장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형제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송규빈도 평생토록 무장으로 살았는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모아 83세이던 1778년(정조 2년)에 <풍천유향(風泉遺響)>이라는 병서를 편찬했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군사 전략가를 보면 무관으로 근무한 적이 없는 이론가도 있고, 고위 장성이나 군사 행정가도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병사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온 중하급 장교들은 저서를 지은 예가 매우 드문데, <풍천유향>이 바로 그런 사례다.

송규빈은 30여 년간 전국의 군사 요충지에서 군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특히 토목 공사나 진지 구축 공사에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영조 때 시행한 청계천 준설 공사는 최근의 청계천 복원 공사보다 더 크고 힘들었던 국책 사업이었다. 송규빈은 이 사업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로서 영조는 그를 유능한 토목 공사의 전문가로 기억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근무지마다 지형을 살피고, 거기서 벌어진 전사를 되새기고, 전술과 무기를 검토한 뒤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고대부터 북방 민족이 우리나라를 침공할 때 반드시 거치는 2가지 길이 있었다. 의주 앞에서 압록강을 건너 선천-곽산-안주로 내려오는 길과 약간 내륙으로 들어가 귀주-운산-태천으로 돌아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그랬고, 거란족, 몽고족, 청나라 군대도 모두 이 길을 이용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골짜기가 험해서 이 두 길 외는 다른 길이 없었다. 수천 년간 수많은 군인들이 우두커니 이 길을 지키고만 있었다. 하지만 송규빈은 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북방 민족은 모두 기병이다. 그 기병들이 이 길을 쉽게 통과한 이유는 산에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고갯마루와 샛길마다 화전을 금지하고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는다면 기병이 험한 산악 지방을 쉽게 통과할 수 없다. 송규빈은 이 작전을 ‘나무성’이라고 불렀다.

치열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개선 아이디어

이 아이디어가 좀 진부해 보인다면 더 기발한 것도 있다. 적군이 침입해오는 계절은 대부분 겨울이다. 곳간에 추수한 양식이 쌓여 있어 식량을 현지까지 조달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강이 얼어붙어 도강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송규빈은 여기서도 전술을 착안했다. 겨울에 적이 오면 강의 얼음을 군데군데 깨고 깬 얼음을 쌓아 얼음성을 만든다. 물을 부어 굳히면 쌓기도 쉽고 튼튼하고 미끄럽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얼음구멍 때문에 적은 기동이 불편해지는데, 얼음성은 험하고 미끄러워 공략하기 쉽지 않다. 적이 얼음성에 막혀 강의 얼음 위에 저지되어 있을 때, 매복했던 포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한다면?

군대가 아무 곳에서나 도하할 수는 없다. 한강만 해도 광나루, 노량진, 행주나루 정도밖에 없다. 이처럼 도하 지점이 뻔한데다가, 도하를 준비하는 군대는 천생 강가의 모래사장에 포진하게 된다. 이 약점을 노려 모래사장에 폭약을 매설한다면? 오늘날로 치면 지뢰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원격 조정으로 지뢰를 폭발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적이 막사를 설치할 만한 예상 지점에 폭약을 묻어놓았다가 포격으로 폭발시키는 것이다.

도강 지점인 여울 밑 물속에 마름쇠를 박아놓는다. 그것도 도하 지점 입구가 아니라 끝나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매설한다. 왜냐하면 도강하는 부대는 건너편 강기슭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게 되고 주의력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솜이불 작전도 있다. 솜이불을 대량으로 징발해서 서로 연결하고, 나무를 이용해서 방벽처럼 쭉 걸어놓는다. 여기에 물을 뿌리고, 병사들이 그 아래에 엎드리면 훌륭한 차탄막이 된다. 확실히 군관으로 병사들과 함께 야전에서 많이 생활했기 때문인지 송규빈은 이런 임시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에 강했다. 그리고 꽤 섬세했다. 이런 경험이 없어도 솜이불로 차단막을 설치하자는 생각까지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을 뿌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을 뿌리지 않으면 솜이불이 바람에 휘날리고 깨끗하게 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송규빈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그는 수군으로도 근무했는데, 배에 꽂아놓은 수많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면서 시야를 가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지적은 사소해 보이지만 실전에서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정도로 중요한 지적이었다. 옛날 군대들은 깃발을 너무 중시해서 병사 반 깃발 반이었다. 무선통신이 없던 시절이라 모든 신호와 명령이 깃발로 전달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총과 대포가 발명되자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깃발은 배와 병사들의 포착과 조준을 훨씬 쉽게 해주었고, 진지 배치도까지 적에게 모조리 알려주었다. 이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적을 속일 수도 있다곤 하지만, 장거리 사격이 가능해진 근대 전투에서 깃발의 남용은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다.

문제의식은 문제의 본질을 추구하는 탐구 정신에서도 나온다. 청야전술은 잘 알려진 대로 적이 쳐들어오면 민가와 곡식을 불태우고, 산성이나 요새로 들어가 농성하는 전술이다. 현지 조달을 어렵게 만들고, 잠 잘 곳도 남겨놓지 않아 적을 피로하고 굶주리게 만들며, 병사와 백성들의 역량을 집중시켜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청야전술의 본질은 방어작전이 아니다. 적의 전투력을 최대한 약화시킨 뒤에 공격하는 최고의 공격 전술이었다. 송규빈은 이 점을 발견했던 것 같다. 그는 청야전을 힘없는 백성의 집을 태우고 곡식을 징발하는 좀 가혹하긴 하지만 쉽고 간단한 작전으로 생각하는 무책임함을 나무란다. 청야전을 하려면 먼저 성을 보수하고, 성 안에 충분한 방어 장비를 갖춰야 한다. 백성들에게 성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강력한 적도 격퇴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바로 전술의 핵심이다. 그래야 소각과 주민 소개 작전도 쉽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청야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인정받지 못한 송규빈의 노력

우리는 송규빈이 주는 교훈을 심각하고 숙연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로 인생을 살고,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인물은 정말로 귀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병자호란이 끝나고 또 2세대가 흘렀다. 수만 명의 군인이 옛날의 격전지에서 근무했고, 그날의 이야기를 알고, 또 분노했다. 그렇지만 송규빈처럼 끊임없이 묻고, 문제를 지적하며, 작은 것 하나라도 고치려고 노력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알아주는 사람도, 보상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말 많고 불평불만에 가득 찬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라는 사실이다. 실제 송규빈의 삶이 그랬다. 그는 속된 말로 답답한 것과 문제를 보고도 방치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귀찮아했다. 송규빈의 육성을 들어보자. “나는 50년 동안 전술과 병기에 대한 연구를 하느라 잠도 자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천지신명이 굽어보고 계시니 나의 일편단심과 국가를 위하는 마음을 아실 것이다. 나는 책을 짓고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펴 보이며 국가를 중흥시키는 계책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을 보는 자들은 제대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말을 듣는 자들은 눈웃음만 칠뿐이었다.…혹은 망령되고 허망한 말을 한다고 비난하는 자가 없지 않았다. 이것이 70년 동안 쌓여왔다.”

좌절한 송규빈은 자신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풍천유향>의 저술을 미루고 미루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휘하고 효용성을 증명할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80세까지 기다렸지만 그의 시대는 너무나 평화로웠다.

강력한 쇄국 정책이 낳은 불행

그런데 송규빈의 불행에는 또 다른 이유, 사실은 더욱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그의 아이디어 중에는 눈웃음으로 답변해줄 수밖에 없는 허망한 아이디어도 많다. 원래 1개의 명작은 수많은 실패작의 무덤에서 태어나는 법이니 이것은 비난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송규빈이 내놓은 아이디어의 단점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송규빈은 실무 경험은 많았지만 실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 실전 경험이 없었기에 주변국의 사정과 발전상을 전혀 몰랐다. 조선의 쇄국이 워낙 심하다 보니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지식은 너무 부족했다. 그는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지고, 온 세계에서 사용한 무기라 기원도 알 수 없는 검차(수레에 방패를 붙이고, 앞에 창을 꽂아놓은 무기)와 11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된 신기전(오늘날의 로켓탄처럼 화약의 힘으로 날리는 화살)이 조선에만 있는 조선의 신무기이며, 전 세계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첨단 무기라고 믿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치열하고 진지한 노력과 수많은 아이디어를 쓸모없게 만들어버린 진짜 이유다. 그가 낸 나무성, 얼음성, 솜이불 방벽, 폭약 매설 작전도 돋보이는 아이디어 같지만 16세기 이전의 군대라면 혹 모를까, 18세기 군대의 남진이나 한강 도하 작전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전황도를 바꾸기에는 어림도 없는 전술이었다. 이미 세계의 전쟁 기술과 수행 능력은 송규빈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조금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1812년 나폴레옹 군대는 통조림을 먹고, 야전 텐트에 자면서 단 4개월 만에 프랑스에서 모스크바까지 진군해 들어갔다. 그들은 이미 모든 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 기술과 20세기의 대포로도 파괴할 수 없는 요새 건축 기술을 보유했다. 이 전쟁 중에 기선과 어뢰, 잠수함의 탄생이 준비되고 있었고, 새로운 소총과 기관총, 강철 대포는 솜이불과 얼음 무더기쯤은 간단하게 파괴할 수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하려는 송규빈의 삶의 태도는 매우 훌륭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이런 미덕만으로 좋은 결과를 낼 순 없다. 고립된 세계관, 주변 세계의 변화 양상을 잘 모르고 최신 지식을 흡수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인성과 태도를 갖고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전근대적 사고에 매몰된 채로 남아 있기 쉽다. 결국 환경 변화에 둔감한 조직은 근면성, 성실성, 몰입을 아무리 강조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