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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심장을 쏜 한국인의 도전

조인직 | 46호 (2009년 12월 Issue 1)
뉴욕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컬럼비아대 비즈니스스쿨(CBS)에는 씨티그룹이나 모건스탠리의 회장 등 월가를 쥐락펴락하는 거물들의 강연이 잦다. 2009년 11월 3일에는 한국인 학생들이 유난히 관심을 가질 만한 강연이 있었다. CBS의 학생 클럽 중 하나인 한국기업연합회와 아시아기업연합회가 공동으로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 뉴욕 본사의 마이크 주(주희찬) 전무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주 전무는 한국계로는 드물게 월가 최고위(c- level) 임원급에 오른 인사다. 그런 그가 학생들과 직접 만나 세계 자본 시장의 전망, 유가 증권 세일즈 & 트레이딩 업무 등에 관해 설명한다는 점 때문에 한국 학생들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 컸다. 주 전무의 공식 직함은 BOA-메릴린치의 글로벌 마켓 최고 운영책임자(COO of Global Market)다. 글로벌 마켓의 사업 전략 지원, 경영 총괄, 경영 관리를 포함해 채권, 상품, 외환 부문의 세일즈 & 트레이딩 등을 총괄한다.
 
주 전무는 미국 미네소타 출신으로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학부를 졸업한 1995년 골드만삭스 뉴욕 본사에 입사, 2년간 애널리스트 생활을 했다. 당시 미국에서 선발된 골드만삭스 대졸 입사자 100명 중 한국계는 주 전무를 포함해 2명에 불과했다. 골드만삭스는 월가 최고의 투자은행(IB)이다. 최근에는 금융위기의 주범이 아니냐는 비판도 생겨났지만 특유의 막강한 인적 네트워크 덕에 언제나 아이비리그 졸업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직장이다. 실제 미국 정재계를 움직이는 인물 중에는 소위 ‘골드만 출신(Goldman colleague)’들이 많다. 헨리 폴슨 전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은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 출신이며 존 테인 전 뉴욕증권거래소(NYSE) CEO, 조슈아 볼튼 전 백악관 비서실장, 로버트 졸릭 전 세계은행 총재, 존 코자인 뉴저지 주지사 등도 모두 골드만 멤버들이다.
 
주 전무는 “제가 입사했을 때는 한국계가 단 2명에 불과했지만 이후 몇 년간은 매년 골드만삭스 본사에 한국 교포들이 10명 이상 들어오더군요. 당시 채용 담당자가 제게 ‘연세대를 우리의 신규 타깃 스쿨로 넣겠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어요. 당시 선발된 교포 학생 대부분이 연세 어학당 랭귀지스쿨을 수료했다고 이력서에 적어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한국계라는 사실 외에도 그는 월가의 다른 임원들과 다른 점이 많다. 일단 나이가 36세에 불과하다. 아무리 승진이 빠른 투자은행(IB) 업계라 해도 30대 중반에 최고위 임원으로 승진한 사례는 흔치 않다. 또한 주 전무는 미국 시장이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미국 뉴욕 본사에서 인정받았다. 그는 13년 동안 투자은행 업계에서 근무하면서 절반이 넘는 9년 가까이를 서울과 홍콩에서 근무했다. 즉, 뉴욕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룬 후 한 단계 승진한 채로 홍콩이나 서울로 왔던 고전적 사례와 정반대의 성공 가도를 걸었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근무한데다, 주로 셀 사이드(Sell-Side, 주식 중개나 리서치 업무 등을 담당하는 회사로 주로 증권사를 지칭함)에서 근무한 덕인지 한국어 구사 능력도 토종 한국인과 차이가 없다. 간단한 한국어 회화 정도만 하거나 아예 한국말을 할 줄 몰랐던 기존 ‘월가 386 교포’들과는 매우 다른 점이다. 주 전무 역시 자신의 초고속 승진 배경에는 아시아 시장에서의 업무 성과와 유창한 한국어 실력 등이 자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계를 덮친 금융위기로 미국과 서유럽 주식 시장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아시아 시장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고, 향후 성장 전망도 밝아 이를 잘 아는 자신이 유리했다는 설명이다.
 
주 전무는 “1997년 처음 홍콩에 갔을 때만 해도 아시아 소재 투자은행 대부분이 연간 한두 개의 거래를 하는 수준이어서 뉴욕 본사와 차이가 많았어요. 새벽같이 출근하는 업계의 관행과 달리 오전 11시에 출근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가했으니까요. 하지만 외환위기를 거치고 아시아 시장이 급부상하면서 자본 시장 거래 규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증했습니다. 이번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아시아의 위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간 느낌입니다”라고 강조했다.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그는 크레딧스위스(CS) 홍콩 및 한국 지사에서 투자은행, 세일즈, 트레이딩 업무를 담당했다. 2006년부터는 메릴린치 한국 지사에서 아시아 채권자본시장(DCM) 이사를 지냈다. 올해 1월 미국 최대 은행 BOA는 파산 위기에 빠진 투자은행 메릴린치를 인수한 후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BOA-메릴린치의 아시아 DCM 최고 책임자로 전격 발탁됐다. 이후 5개월 만인 올해 6월 다시 초고속으로 승진, 뉴욕 본사 임원으로 월가에 복귀했다.
 
그는 메릴린치 한국 지사에 재직하면서 두드러진 성과를 냈다. 특히 최근 2, 3년간 한국 기업의 해외채권 발행 주간사 순위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와 올해 정부가 발행한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수출입은행의 말레이시아 링기트화 채권, 포스코와 산업은행의 해외채권 발행 등이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아시아에서 실적을 쌓은 뒤, 월가로 금의환향한 드문 사례여서 그런지 이날 주 전무의 강연에는 아시아계 외에도 많은 학생들이 참석했다. 70여 명의 참석자 중 3분의 1이 백인이었다. 성공 비결을 알려달라는 질문이 쏟아지자 주 전무는 이렇게 답했다. “자본 시장 발달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면서 주식, 채권, 파생상품 업무에서 갖가지 신규 세일즈 및 트레이딩 기법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영업 업무의 분야도 예전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고요. 때문에 일찍부터 어느 한 분야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세계 자본 시장 전체를 큰 그림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특히 관리자급에 오르고 싶다면 나무보다 숲을 보는 지혜가 더욱 중요하죠”
 
주 전무는 대표적인 한류 수출품의 하나인 프로즌 요거트 ‘레드 망고’의 창업 파트너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을 염두에 둔 학생들을 향해 이런 조언을 들려줬다. “영업 전망 관련 데이터를 볼 때는 그 수치의 반만 믿으세요. 숫자는 경영자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을 정당화해주는 도구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그는 몇몇 한국인 학생들과 맥주를 마시며 월가의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월가 임원이 되니 미국 국회의원들과 만날 기회가 많아요. 미국 국회의원들은 다음날 꼭 다시 전화를 겁니다. 처음에는 ‘어제 정말 훌륭한 만남이었다. 당신의 훌륭한 의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공치사를 늘어놓은 후 마지막에 꼭 ‘나한테 언제 기부할 거냐’고 은근슬쩍 압력을 넣습니다. 하하.”
 
주 전무는 아직 월가가 한국을 경제 규모에 걸맞게 대접해주지 않는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낀다고도 했다.
 
“한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국인 애널리스트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매기는 게 월가의 현실입니다. ‘한국에 직접 가서 담당자들과 맥주 한 잔이라도 나눠보시죠. 그분들의 이야기를 좀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라고 말씀드린 적도 있어요. 북핵 문제 등으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한국 경제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편집자주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세계 톱 경영대학원의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하는 ‘MBA 통신’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 스탠퍼드 경영대학원과 영국 옥스퍼드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젊고 유능한 DBR 통신원들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통신원들은 세계적인 석학이나 유명 기업인의 명 강연, 현지 산업계와 학교 소식을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뉴욕 맨해튼 북부에 위치한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CBS)은 합격자가 지원자 대비 13%에 불과해 세계 최고의 경쟁률을 보이는 MBA스쿨로 유명하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유명한 세계 2위 거부 워런 버핏 등 많은 거장을 배출했으며,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와 가치 투자의 권위자인 브루스 그린왈드 교수 등이 포진해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세계 유명 언론이 선정한 ‘올해의 MBA’에서 해마다 5위 안에 속한다. 매년 730여 명의 신입생을 뽑으며, 한국 국적의 학생은 해마다 10명 정도 입학하고 있다.
 
필자는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이며,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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