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2% 부족했던 현대전 게티즈버그 전투

43호 (2009년 10월 Issue 2)

남북전쟁은 최후의 근대 전쟁이라고 불린다. 이 전쟁 중에 기관총, 철선과 잠수함이 등장했고, 보병이 서서 일렬로 전진하는 나폴레옹 식 전쟁이 종말을 맞았다. 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이동시킨 최초의 전쟁이기도 했다. 덕분에 전쟁 상황판이 갑자기 크고 복잡해졌다. 아메리카 대륙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군의 기동력과 이동 범위가 크게 넓어짐으로써 전투의 가용 영역과 전술 영역도 넓어졌다. 두뇌와 사고력이 넓어진 범위를 감당하지 못하던 지휘관들은 커다란 낭패를 보고 전장에서 퇴출됐다. 전쟁이란 게 원래가 혼돈과 파멸의 신이 지배하는 곳이지만, 구시대의 정신과 신시대의 문명이 공존하다 보니 남북전쟁의 전황은 한마디로 혼돈과 살육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특징을 제대로 구현한 전투가 승부의 분수령이었던 ‘게티즈버그 전투’다.

 
 
전쟁 발발 3년째였던 1863년 전쟁에서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남군의 명장 잭슨이 전사했다. 서부 전선에서는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의 파상 공세로 요충지였던 빅스버그가 함락 직전에 있었다. 북군 입장에서는 전쟁 발발 후 사실상 최초로 제대로 된 승전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자 남군 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는 돌발적인 제안을 한다. 남군의 정예병을 모아 바로 워싱턴을 치자는 것이었다.
 
북군은 빅스버그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남군의 장군들은 모두 동부의 병력을 나눠 빅스버그를 구할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는 이때가 바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아직 그의 남군은 불패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남부의 패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남군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도박이 필요했다. 아마도 리는 처음부터 이런 구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기습의 순간을 파악하는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7만6000명의 남군이 빅스버그가 아닌 펜실베이니아에 나타나자 북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북군이 동원한 병력은 9만 명이었다. 링컨은 남군의 주력을 섬멸할 기회가 왔다고 말했지만, 이때까지 북군은 10배의 병력을 가지고도 승리해본 적이 없었다.
 
 
 
게티즈버그에서의 조우
남북의 대군이 만난 곳이 바로 ‘게티즈버그’였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5km가 넘는 긴 전선에서 진행된 복잡한 전투의 조합이다. 첫날의 전투는 우연치 않게 시작됐다. 물자 부족으로 거의 거지꼴을 하고 있던 남군의 선발 사단은 게티즈버그에 제법 큰 구둣방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회전을 앞두고 군화를 조달하기 위해 그들은 게티즈버그로 입성했다. 한편 남군을 찾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던 북군 기병대도 우연히 게티즈버그로 들어왔다가 남군의 구둣방 습격을 알게 됐다.
 
기병 연대장이었던 버포드는 게티즈버그의 전략적 가치를 당장에 파악하고, 자기 연대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남군의 주력을 게티즈버그로 끌어들이겠다고 결심한다. 게티즈버그의 북쪽은 평원, 남쪽은 험한 바위산을 낀 능선으로(당시 남군은 북쪽에서, 북군은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대단히 우수한 방어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포드의 안목과 군인 정신은 확고한 보답을 받았다. 첫날 북군은 병력 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지만, 남군은 예상치 못하게 전투에 휘말린 데다 주변 지형도 잘 알지 못해 능선의 고지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둘째 날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남군의 장군들은 땅을 쳤다. 첫날 북군의 주력이 아직 도착하지 못해 능선의 주요 고지들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남군이 희생을 각오하고 고지를 차지했더라면 게티즈버그의 2일과 3일은 북군이 고지를 향해 돌격하는 무모한 공격 끝에 학살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남군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소극적으로 돌변해버렸다. 적진에 들어온 상황이라 병력과 보급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은 셈이다.
 
남군은 첫날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능선 양쪽의 고지를 향해 맹공을 가했다. 결과적으로 희생이 컸지만 다시 한 번 성공할 뻔했다. 그러나 신의 장난인지 이상한 불운이 연달아 남군의 발목을 잡았다. 이날의 최대 격전지가 된 리틀 라운드 탑은 북군 최좌익의 바위산으로, 북군 전선 전체를 감제(瞰制)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곳에 배치된 북군 3군단이 지휘관의 어이없는 판단 착오로 엉뚱한 곳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 바람에 고지가 비었고, 북군 방어선 한 곳에 무인 지대가 생겼다. 척후병들이 리틀 라운드 탑을 무혈점령할 수 있다고 보고했지만, 남군은 함부로 공격 지점을 바꿀 수가 없었다. 공격 지점과 방법을 놓고 지휘부의 의견이 분분했던 탓에 리 장군이 공격 지점을 직접 고찰하도록 강하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결국 남군은 신사적으로 북군을 제대로 된 수비 지점으로 몰아주고 공격하는 양상이 돼버렸다. 공격 시간만 줄어들고, 희생은 엄청났다.
 
잇따른 남군의 불운과 북군의 행운
반면 북군에겐 행운이 따랐다. 공병 참모로 전선을 시찰하던 워런 장군은 나중에 북군 최고의 명장이 된 비범한 장교였다. 그가 마침 리틀 라운드 탑에 올라왔다가 이 중요한 고지가 비었음을 발견했다. 놀란 그는 급히 본부로 돌아가 제20연대를 고지로 급파했다. 남군이 고지 공격을 개시하기 직전에 20연대가 배치를 마쳤다.
 
하지만 3군단의 실수는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 고지에 배치한 북군은 겨우 380명, 고지 공격에 나선 남군은 3000명이 넘었다. 리틀 라운드 탑 전투는 후에 영화로도 몇 차례나 만들어지는데, 20연대는 두 시간 동안 5차례나 남군의 돌격을 막아냈다. 최후의 공세 때 연대 병력은 100명으로 줄었고, 탄약마저 떨어졌다.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연대장 체임벌린 대령은 착검 돌격을 명령한다. 예상치 못한 공세에 남군은 분쇄됐다. 남군도 하루 종일 바위산을 오르내리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어 위에서 아래로 비탈을 뛰어 내려오는 북군의 기세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300명의 남군이 빈총을 든 100명의 북군에게 항복했다. 이 전투로 체임벌린 대령은 의회 무공훈장을 받았고, 남북전쟁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사가 됐다. 그는 원래 수사학과 종교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으로 군 경험이 전혀 없었다. 남북전쟁 때는 워낙 장교와 상비군이 부족하다 보니 변호사, 교수 같은 지역 유지나 명사들이 종종 지휘관으로 뽑혔다. 그들 대부분은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지만, 체임벌린은 종전 때까지 우수한 지휘관으로 멋진 활약을 보인다.
 
3군단이 만든 또 하나의 구멍으로 남군 연대가 밀고 들어왔다. 이 지역을 담당한 2군단은 북군 최강의 연대였지만, 가용 병력은 겨우 262명의 미네소타 연대뿐이었다. 군단장 핸콕은 이들을 불러 돌격을 명령했다. 이들은 1600명의 남군을 향해 돌격했고,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남군의 전진을 저지했다. 생존자는 단 47명이었다.
 
게티즈버그 3일째, 이틀 연속 어처구니없는 실패를 맛본 리 장군은 대담한 결정을 내린다. 3개 사단을 동원해 북군의 중앙으로 나폴레옹 식 정면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거였다. 오후 3시 3개 사단 1만5000명의 병력이 전진을 시작했다. 주력인 피켓 사단의 명칭을 따서 ‘피켓 대공세’로 알려진 이 공격에서 남군 대열의 길이만 1km가 넘었다. 이 돌격은 처참한 살육으로 끝났고, 워싱턴을 점령하겠다는 리의 승부수도 막을 내렸다.
 
이 전투가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됐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전투의 군사사적 분석은 수많은 논쟁을 낳았다. 북군은 병력과 지형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남군은 몇 번이나 성공할 뻔했다. 확실히 전투력에서는 남군이 우월했다. 그러나 중요한 고비마다 리틀 라운드 탑 사건처럼 남군에게 불운이 닥쳤다. 남군의 기병대를 이끌던 스튜어트는 게티즈버그 전투 직전에 며칠간 실종됐다. 그는 제멋대로 전투를 벌이다 지형 정찰 및 남군 주력 부대 인도라는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렸다. 덕분에 남군은 준비 없이 게티즈버그 전투에 말려들었고, 전투 내내 지형 파악을 제대로 못해 혼선을 빚었다. 리 장군을 전쟁의 신으로 만든 능력이 지형을 보는 전술적 안목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실수는 커도 너무나 컸다. 모든 역사가 남군 패배의 결정적 요인은 스튜어트의 단독 행동이라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정보 부족이 불러온 불운
남군의 팀워크도 엉망이었다. 리의 충직한 오른팔이던 롱스트리트 장군은 게티즈버그 전투 내내 리와 충돌했다. 만년에 두 사람은 상당히 멀어지는데, 롱스트리트는 회고록을 통해 게티즈버그에서 리의 작전과 행동, 특히 피켓 대공세를 비난했다. 반면 리 장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롱스트리트의 계속된 사보타주가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리도 죽을 때까지 3일차의 공격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또 다른 실패 요인도 있었다. 바로 ‘불운’이다. 마치 신의 장난인 듯 남군에게는 불운이 잇따라 찾아왔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세상에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되지 않는 ‘운’이 따라줘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남군에게 닥친 급작스런 불운은 정보 부족과 관련이 있다. 과거 남군이 거둔 멋진 승리들은 대부분 홈그라운드에서 싸운 방어적 전투였다. 병력의 열세에도 남군 지휘관들은 창의적이면서 멋진 지휘 능력을 보여줬고, 북군 지휘관들은 대부분 멍청하게 굴고 허둥대곤 했다. 과거 군 경력상으로도 남군 지휘관들이 유능하기는 했지만, 북군 지휘관들이 한심할 정도로 멍청하고 운이 없었던 것은 남군이 지리와 지형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항공 정찰도 없었고, 지도는 부정확했다. 남군이 가진 지도에도 게티즈버그 주변 지형이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게티즈버그로 오자 반대로 남군의 실수와 불운이 두드러졌다.
 
무전이 없던 시대라 부대 간의 연락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홈그라운드에서는 지휘관들이 서로 지형을 숙지하고 있으니 적군의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고, 지휘부나 현장 지휘관이 모두 같은 전술과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낯선 지형에서는 지휘부와 현장 지휘관이 알고 있는 지형 정보가 서로 다르고, 그에 따라 상황 판단도 달라진다. 하지만 전령을 파견해 정보를 주고받고 전술을 변경하다가는 공격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낯선 땅과 엄청난 대군, 넓어진 전장, 그것이 남군이 게티즈버그에서 실패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리 장군은 멕시코 전쟁 시절 정찰 장교로 명성을 날렸다. 그가 이런 문제를 몰랐을 리가 없다. 1일과 2일차 전투는 남군의 약점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리 장군이 최후의 방법으로 정면 승부인 피켓 공세를 기획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경영 현장에서 리더와 직원들의 팀워크와 팀원의 창의적인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업 지형과 업무 지형의 파악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교훈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3호 Talent Transformation 2021년 11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