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Column
쉴 새 없이 달렸다. 한때는 기계가 바쁘게 돌아가던 옛 공장의 부지를 숨 가쁘게 달렸다. 먼 옛날 달리기는 사냥감을 쫓는 행위였다. 나 역시 무언가를 추적했다. 바로 ‘레이온’ 소재를 만들던 공장의 흔적들이다. ‘레이온 공장 달리기’(아래 사진)라는 비디오 작품을 통해 일본, 한국, 중국으로 옮겨간 레이온 공장의 숨은 이야기를 밝혀내고자 했다.
레이온은 비스코스, 우리말로는 인견이라고도 불리는 소재다. 동아시아에서 레이온을 가장 먼저 생산한 건 20세기 초 일본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화학·섬유 기업 도레이가 규슈 북부의 시가현에서 1927∼1963년에 레이온 공장을 운영했다. 36년 동안 작동하며 닳고 닳은 레이온 설비는 1964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국내에서 여러 회사를 떠돌다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가 이 설비를 매입해 1977년부터 경기도 남양주시 공장에서 가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 사상 최악의 산업재해로 기록된 사건이 펼쳐진다. 낡은 설비는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이황화탄소를 처리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이황화탄소에 중독됐고 언어장애, 전신마비, 정신 이상 등 뇌질환을 앓았다. 2012년 말까지 940명이 직업병 판정을 받았고, 150여 명이 사망했다. 처음 공장이 문을 열고 20여 년이 지난 1987년이 돼서야 피해자들이 정부에 진정을 올리며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산업재해, 직업병 예방 대책이 논의되는 등 우리 사회의 환경산업정책도 변곡점을 맞았다.
원진레이온 공장은 1993년 문을 닫았지만 많은 사람을 고통에 몰아넣은 설비는 꺼지지 않았다. 중국 단둥시의 한 공장으로 헐값에 팔려가 2009년까지 이황화탄소를 뿜어냈다. 일각에선 이 설비가 중국에서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과거 질병과 죽음으로 모는 기계가 더 열악한 지역을 향해 나아갔던 것처럼 현재에도 레이온 생산의 피해는 인도 등의 나라에서 계속되고 있다. 겨울철 자주 입는 보온 기능성 의류에도 레이온이 들어가는 등 그 쓰임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섬유 기업 렌징(Lenzing)이 이황화탄소의 사용을 최소화한 텐셀(Tencel)이라는 레이온 제품을 만들고 있지만 비용 문제 등으로 일반 레이온 역시 계속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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