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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우리가 남이가?

김현진 | 353호 (2022년 9월 Issue 2)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시각장애인들을 돕기로 한 자원봉사자가 이들의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봉사자는 ‘남’이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강한 유대)이거나 같은 대학에 다니는 동기 학생(약한 유대)이었던 겁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범죄 사실을 기꺼이 신고하게 될까요?

실험 결과, 참가자들은 강한 유대일 때, 즉 가족일 경우 범죄자가 스스로 죄책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넘겨짚으며 쉽게 면죄부를 줬습니다. 그러면서 실제 신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는데 고발까지 당하는 건 가혹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연구진은 단 한 방울의 피로 수백 종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거짓말로 투자자를 속이다 파산한 바이오벤처 ‘테라노스’ 사례를 활용한 실험도 진행했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소아암 감지 장치를 개발하는 회사에서 일한다고 상상하고, 동료 중 하나가 이 장치의 효과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물은 겁니다. 이 실험에서 역시 직원 간 유대감이 강할 때, 범죄 사실을 신고하려는 경향이 덜하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단, 동료가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음을 후회했을 때만 이런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후회란 감정이 용서라는 ‘매직 효과’를 낳은 겁니다.

샌프란시스코대와 취리히대 연구진이 진행해 HBR를 통해 소개한 이 실험은 조직 문화 측면에선 다양한 장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족 같은 분위기’가 비윤리적인 행위를 쉽게 용인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실제 미국 국가경영윤리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5%가 직장에서 크고 작은 범법 행위를 목격했지만 그중 3분의 1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내에서도 기업 내 횡령 건수가 10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심각한 상황이지만 기업 입장에서 횡령 사건은 웬만하면 드러내기 싫은 치부입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하고도 일탈을 저지른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기 일쑤입니다. ‘급전이 필요해서’ ‘한탕주의 때문에’ ‘원래 인성이 안 좋아서’ 등 개인의 특수 상황을 부각하지만 사실 이 사람은 ‘우리가 남이가’ 정신으로 방패를 입혀준 수많은 동료의 묵인하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서사로 이어진, 사실은 평범한 옆자리 동료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비도덕적인 행위가 알려져 큰 곤혹을 치른 기업일수록 최고위급 임원들이 이러한 사건이 심각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스스로 관리 책임이 있다고 여기지도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도 주목할 만합니다. 10년간 화이트칼라 범죄를 연구해온 하버드경영대학원의 폴 힐리, 조지 세라핌 교수는 “이런 범죄의 진짜 범인은 시스템이 아니라 직원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과만 달성하면 된다고 강조하는 리더십의 부족과 조직 문화의 결함”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비도덕적 스캔들이 결국 조직 구성원 모두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낳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회사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가 ‘주홍글씨’가 된 탓에 범죄와 관계가 없는 일반 직원들조차 이직 시 급여를 4%가량 덜 받는 등 금전적 손실을 봤습니다. 심지어 부정행위가 적발되기 전에 퇴사한 사람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기업의 일탈 행위야말로 절대 ‘남의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기업 내 일탈 행위는 전체적으로 조직의 규모가 크고, 심리적으로 고갈된 조직원들이 많은 곳에서 자주 발생했습니다. 마리암 코우차키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교수의 연구를 참고하면, 팬데믹 기간 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됐거나 감염병과 최전선에서 싸운 구성원, 원격 근무로 오히려 번아웃을 경험한 직원들을 특별히 다독일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제도적 감시 시스템뿐 아니라 직원들의 마인드 관리에도 신경을 쓰는 것이 모럴 해저드를 막는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많은 기업이 윤리 교육은 입사 때나 몇 시간 하고 마는 의례적인 절차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를 간과하면 기업 이미지 실추는 물론 폐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미 목격했습니다. 이번 호 스페셜 리포트가 조직 문화 개선, 직원의 도덕성 개발로까지 이어지는 부정행위 방지 노력에 선한 첫걸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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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편집장•경영학박사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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