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 금융 관점에서 본 유연성

재무적 유연을 위해 Slack 필요하다 코카콜라보다 현금 많은 애플처럼…

196호 (2016년 3월 lssue 1)

Article at a Glance

 루틴(routine)과 슬랙(slack)은 유연한 기업을 위한 주요 요소다. 간단히 설명하면 루틴은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고 슬랙은 재무적 자산이다. 기업은 루틴과 슬랙의 적절한 조절을 통해 유연성을 추구한다. 기업이 유연성을 갖기 위해서는 특히 이해 관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업의 유연성이 기업 내부의 미시적이고 일상적 활동을 넘어서 기업의 형태와 비즈니스 모델에 영향을 줄 때일수록 더 그렇다. 그러나 이해관계자들은 기업이 유연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지배구조가 투명해져야 하고, 자본시장이 효율적으로 발달돼야 하고, 사회적자본이 축적돼야 할 것이다. 때문에 기업이 유연한 조직 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정보의 비대칭성과 도덕적 해이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유전자 중심적 진화론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 대중화됐다. 유전자 중심적 진화론에 의하면 진화는 생존을 위한 유전자들의 경쟁을 통해 일어난다. 유전자 간 경쟁의 성패는 유전자에 의해 영향을 받는 개체가 주어진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카네기 학파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경영학자들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이들은 조직에도 일종의 유전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환경에 잘 적응하는 유전자를 가진 조직이 생존하고 번성한다고 믿는다. 이들에 의하면 조직의 유전자는루틴(routine)’이다. 루틴은 관행(慣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루틴은 정규적이고 예측 가능한 회사의 활동으로 정의돼왔다(Nelson & Winter 1982).

 

최근에는 루틴을 조직의 변화와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동적역량의 원천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Feldman 2000, Helfat et al. 2009). 이는 마치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도 유전되면서 후세의 유전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를 연상시킨다.

 

루틴 자체 또는 루틴의 적절한 변화를 통해서 조직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이다. 하지만 실행이 쉽지 않다. 일단 첫째, 루틴과 관련한 이론 자체의 모호성 때문이다. 학자들 간에 루틴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안정성과 변화에 대해 완벽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전혀 안정적이지 않은 조직의 행동을 루틴이라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둘째, 안정적이고 경직된 루틴이라고 해서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루틴을 안정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도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조직은 루틴을 통해서 작동한다. 루틴은 조직이 일을 하는 방식이면서 가진 정보를 저장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안정적인 루틴을 통해서 조직은 자원의 큰 소비 없이 많은 일들을 경제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루틴의 안정성은 조직에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카네기 학파에 따르면 루틴과 함께 조직의 유연성과 생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슬랙(Slack)’이다. 슬랙은 종종 여분(餘分)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정의에 의하면 슬랙은 조직이 가진 총 자원에서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지불을 뺀 분량이다. 슬랙은 조직을 안정화시키면서도 유연하게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을 제공한다(Cyert and March 1963). 슬랙은 환경에 갑작스런 충격이 발생했을 때 조직에 완충작용(Buffer)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는 다시 조직이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통적인 경제학과 재무/금융 분야에도 조직의 유연성, 루틴, 슬랙과 비슷한 개념들이 존재한다.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고 지칭하는 범위가 다르기는 하나 역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재무/금융 분야의 연구들은 조직의 유연성과 그 중요한 원천인 루틴과 슬랙에 매우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시해왔다. 이러한 광범위한 연구를 모두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몇 가지 예를 중심으로 간단히 논의하도록 한다.

 

기업 유연성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Organizational Flexibility)

 

루틴을 기업이 작동하는 방식이자, 기업의 습관이며, 기업의 행동과 생존을 결정하는 유전자라고 본다면 기업의 가장 중요한 루틴 중 하나는 바로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비즈니스 모델은 기업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관계자들로부터 가치를 창출하거나 획득하는지 규정한다. 간단히 말하면 비즈니스 모델은 기업이 돈을 버는 방식이다. 결국 비즈니스 모델은 기업의 궁극적인 루틴 중 하나일 것이다. 비즈니스 모델을 기업의 프로세스를 중심으로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비즈니스 모델과 루틴과의 관계는 더욱 명확하다.

 

루틴에 관한 연구가 유연성에 주목하는 것처럼 비즈니스 모델에 관한 논의도 유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기업이 유연한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이해관계자들에게 좋은 일일까? 예를 들어, 주주들은 기업이 유연한 비즈니스 모델을 갖는 것을 바랄까?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주주들은 각각의 기업들이 자신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명확히 이해하고 해당 모델에 집중하기를 바랄 수 있다. 물론 이럴 경우 유의미한 환경변화가 생겼을 때 조직의 경직성으로 인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업이 도태될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이는 각 기업들의 문제이지 주주들의 문제는 아니다. 주주들은 다양한 기업들에 분산 투자를 하고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각 기업들에 대한 투자 비중을 유연하게 변경하기만 하면 된다. 주주 입장에서는 스스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포트폴리오에 담고 유연하게 관리해나가면 되는데, 오히려 기업들이 나서서 유연하게 비즈니스 모델을 관리하게 되면 주주들 입장에서는 특정 분야에 중복 투자가 발생하는 등의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기업들에게 사업 재편이나 신사업 진출을 요구하기보다는 기존 사업이나 잘하게 하고 주주들은 새로운 산업에 투자 비중을 늘리면 그만이다.

 

 

 

뿐만 아니라 환경 변화에 따라서 기업들이 모두 동일한 방향으로 변화하려 한다면 오히려 주주들의 분산투자를 방해해 불필요한 비용을 일으키고 위험을 키울 수 있다. 주주 입장에서는 기업들이 각각의 비즈니스 모델에 최대한 집중하고 유연성은 주주들이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구현하면 된다.

 

국내 재벌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총수를 보좌하는 재벌 본부(구조본)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하위 기업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관리하는 것이다. 비즈니스 모델 유연성이라는 명목하에 하위 기업들이 비슷한 사업영역에서 지나치게 경쟁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하위 기업들은 각각의 비즈니스 모델에 집중하고 대신 그룹 차원에서 유연하게 자원을 배분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미래전략실이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 복수의 언론에 따르면 삼성그룹의 경우 미래전략실 전략1(팀장: 김종중 사장)에서 전자계열사의 사업전략과 재무를 조율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5년 말 조직개편을 통해 미래전략실은 6개 팀에서 5개 팀으로 줄어들었다. 기존에 전자계열을 담당하는 전략1팀과 비전자 계열을 담당하는 전략2팀이 통합되고 인사지원, 커뮤니케이션, 경영지원, 경영진단팀이 유지됐다. 삼성의 금융사업들은 금융일류화 추진팀에서 비즈니스 모델/사업영역 등을 지원하고 있다.

 

LG는 지주회사인 ㈜LG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현대그룹은 전략기획본부라는 그룹이 있다.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

 

이상에서 보듯 재벌의 구조본 조직들은 계열사 수준을 넘어서 그룹 전체의 유연성 혹은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재벌의 구조본 조직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계열사들의 사업모델들을 관리해야 한다. 그룹 차원의 자원을 유연하게 배분해 그룹 전체의 유연성을 관리해줘야 한다. 재벌 구조본 조직이 꼭 필요한 이유다. 장기적으로는 투명한 기업지배구조를 확립하기 위해 지주회사가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슬랙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재무적 유연성과 관련한 예를 들어보자. 슬랙은 기업이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한 중요한 자산이다. 그러나 주주들은 기업이 슬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인 정의에 의하면 슬랙은 기업이 총 자원에서 이해관계자들에게 지불하고 남은 여분이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모든 재무적 슬랙을 주주들에게 나눠줘 버리면 어떨까? 그러다 기업에 슬랙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이럴 경우 주주들로부터 다시 자본을 조달하면 그만이다. 주주들은 기업이 어떤 활동에서사용할 슬랙보다 더 높은 주주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 점검하고 이 경우에만 자본을 제공하면 된다. 기업이 발생하지 않은 광범위한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명목으로 슬랙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것은 주주 입장에서는 기업이 불필요하게오지랖을 떠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국내 그룹사들의 사내유보금이 사상 최대라는 뉴스에 대한 부정적 의견들이 이를 증명한다.

 

실제로 재무 분야에서는 기업의 재무적 유연성이 가진 양면성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돼왔다. 재무적 유연성의 어두운 면에 관한 대표적인 이론 중에재량현금흐름 가설(free-cash flow hypothesis)’이 있다. 이 가설에 의하면 회사의 중요 의사결정자들은 본인들이 재량껏 사용할 수 있는 회사의 자원이 있을 때 주주들에게 배당을 하느니 본인들의 사적 이익을 늘려줄 수 있는 비효율적인 투자나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다(Jensen 1986).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업의 재무적 유연성을 인위적으로 제약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배당을 일정하게 하도록 강제하거나 적절하게 레버리지를 사용하게 해 이자를 지급하게 하도록 하는 식이다.

 

재무적 유연성의 장점에 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첫째, 자본시장에 제약이 많을수록 재무적 유연성이 중요하다. 자본시장에서 자금의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에 정보의 비대칭성이 큰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때 기업이 신규 투자를 위해서 주식을 발행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투자자 입장에서는사업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면 왜 굳이 주식을 발행해서 미래의 수익을 우리와 나누려 할까?” “사업이 전망이 어두우니 투자자에게 위험을 떠넘기려고 주식을 발행하는 게 아닌가?”와 같이 의심을 할 수 있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큰 상황에서는 기업은 투자자들의 이러한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주식을 공정가치보다 저가에 발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채권도 마찬가지다. 채권투자자들은 기업이 무리하게 자금을 조달한 후 필요하면 유한책임만 지고 돈을 갚지 않을 가능성을 걱정할 것이다. 이러한 위험 때문에 건전한 기업들도 부당하게 높은 채권금리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 역시 이러한 위험은 정보의 비대칭성이 클수록, 회사 의사결정자들의 전횡을 막을 장치가 적을수록 클 것이다. 그런데 기업의 내부 자금(슬랙)을 사용할 때는 주식이나 채권과 같이 이러한 정보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적어진다. 따라서 기업의 재무적 슬랙은 이러한 정보 혹은 대리인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저렴하고도 유연한 금융자원인 것이다. 특히 기업의 재무적 유연성은 불확실성이 아주 높은 상황에서 매력적인 투자 기회가 나타났을 때 투자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옵션가치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애플은 코카콜라와 비교했을 때 규모에 비해 훨씬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코카콜라는 제품상의 큰 혁신이 필요한 기업은 아니다. 이에 반해 애플은 끊임없이 혁신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 연구개발비 등에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능성이 등장할 때 신속하게 투자를 해야 한다. 현금은 이러한 가능성이 존재할 때 투자를 하게 해주는 옵션을 제공한다. 따라서 애플은 현금을 많이 보유할 필요가 있다.

 

둘째, 재무적 유연성은 상품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동네 경쟁 제과점의 현금 보유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면 어떤 전략을 사용할 수 있을까? 제품의 가격을 대폭 낮추고 출혈 경쟁을 유도해 경쟁 제과점의 현금이 소진돼 결국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아니면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재무적 유연성이 있는 업체가 동네 상권을 장악할 것이다. 좀 더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면 도박판에서의 가장 큰 경쟁력이 현금이라는 말과 비슷한 논리다. 기업은 이런 양면성을 잘 고려해 재무적 유연성을 설계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행에 의하면 국내 대기업들의 현금보유량은 사상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자들이 재량현금흐름 가설에 따라 행동하지 않도록, 또는 못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한국 경제를 위해서 중요하다. 이를 감시하고 제약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지배구조가 매우 중요해진 상황이다. 이런 맥락에서 엄청난 현금창출 능력과 함께 매우 다각화되고 유연한 사업구조를 가진 구글이 최근 알파벳이라는 지주회사를 만들면서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개편한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구글의 주주들에게 구글이 추진하는 구글 X(Google X) 프로젝트 등은 우려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무인자동차라든가, 구글 룬프로젝트(Project Loon - 대기권 바깥에 풍선을 띄워서 모든 사람들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프로젝트), 생명과학(Verily) 프로젝트 등은 당장 이익이 나지 않는 것은 물론 미래에도 이익이 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업들이다. 구글은 지주회사 알파벳을 만들면서 사업성이 불확실한 구글 X와 같은 프로젝트들과 핵심 사업(Google Core)의 성과를 투명하게 분리해서 관리하고 이를 따로따로 시장에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지난달 1일 알파벳의 이익발표에 의하면 구글 X 프로젝트의 손실은생각보다크진 않았고( 4조 원) 대신 핵심 사업의 성과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그 결과 구글은 잠시나마 애플을 따라잡고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큰 회사가 되기도 했다. 결국 구글은 투명한 지배구조로 시장의 감시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야심찬 사업을 더욱 유연하게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게 됐다.

 

지배구조와 유연성의 보완 관계

 

위의 논의에서 기업의 유연성은 경쟁력의 중요한 원천이지만 한편 이해관계자들은 기업이 유연성을 갖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기업이 유연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자들의 협조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경영진을 제대로 제어할 수단이 없는 다수의 주주나 직업의 안정성을 무엇보다도 원하는 노조, 그리고 지역 내 고용을 중시하는 커뮤니티와 정부 등을 설득하지 못하면 유연성 추구에 대한 저항이 생기고 이는 기업의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이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쌓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해관계자들이 기업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자본의 정의는 학자와 분야에 따라 다양하다. 대개 서로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 구조나 사회적 신뢰의 정도로 이해된다. 한국이 저신뢰 사회라는 주장은, 즉 한국 사회에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 충분하지 않고 낮은 수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 사회적 자본을 쌓는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등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대신 사회적 자본도 쌓으면서 동시에 이해관계자들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서 기업의 지배구조를 혁신할 수 있다. 기업지배구조란 기업이 이해관계자들과의 이익을 조절하고 이해관계자들이 기업을 어떻게 통제하고 지배하는지에 대한 방식이다.

 

예를 들어보자. 재벌의 총수나 기업의 임원들은 유연성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사업의 전망이 나빠졌을 때 재빨리 다른 사업 영역으로 진출하면기업의 지배로부터 누리는 사적 이익(Private benefit of control)’을 계속 즐길 수 있고 책임도 회피하기 쉽다. 또 본인들의 커리어 관리도 유연하게 할 수 있다. 재벌 컨트롤타워(구조본)의 임원들은 계열사들의 다양한 사업구조를 통해 향후 적절한 계열사나 프로젝트에 낙하산으로 갈 수도 있다. 필자는 이를구피아(구조본+마피아)’라 부른다. 구피아는 총수의 친위 그룹 출신이므로 낙하산으로 갈 경우 조직 내 파워가 막강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구피아의 지나친 득세는 한국 대기업들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관피아 못지않은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실패한 구피아는 기업 유연성의 어두운 면 중 하나다. 다음 사례들은 생각해볼 만하다.

 

‘기업의 지배로부터 누리는 사적 이익은 시장에서 거래가 되지 않는다. 사적 이익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업 유연성은 이런 사적 이익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주주들은 이러한 이익에서 배제돼 있다. 게다가 주주로서 누리는 이익은 시장에서 거래 가능하고 분산화된 포트폴리오로 관리하면 된다. 결국 기업의 유연성이 회사의 총수나 임원들의 사익 추구가 아닌 회사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내부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믿음과 신뢰라는 아름다운 말들로 이를 넘기는 건 오히려 아마추어적 방식일 것이다. 내부적인 장치로 이사회 등을 통해서 다수 소액주주들의 이익이 기업 운영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고, 주요 의사결정자들의 잘못된 경영판단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본시장과 기업의 유연성

 

기업이 아무리 유연해져도 효율적인 시장만큼 유연해지기는 어렵다. 효율적인 시장에서는 매력적인 투자기회가 발견되면 자본이 유연하고 신속하게 투입되고 최고의 인력들도 알아서 모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들은 자신들의 핵심 역량과 사업에 집중(focus)하고 전념(commitment)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기업의 유연성을 감소시킬 수 있지만 시장이 대신 유연하게 작동해서 자원의 배분을 오히려 더 효율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시장이 유연하게 작동해서 자원의 배분을 효율적으로 하는 대표 사례다. 물론 기업의 집중과 전념이 기업의 유연화와 꼭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장(특히 자본시장)과 기업의 유연성 간에는 서로 대체재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인프라와 문화가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이 유연한 비즈니스모델과 다양한 사업기회에 다각화를 하고 있더라도 시장을 통해서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있고, 이는 다시 건전하고 윤리적인 기업들이 유연화를 추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결국 자본시장과 기업의 유연성 간에 서로 보완재적인 요소도 있음을 의미한다.

 

시장과 연관시켜서 기업의 유연성을 이해하는 것은 정책결정자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정책결정자들이 개별 기업의 유연성을 강화하고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는 것은 어렵다. 구조조정이나 사업재편 등에 관한 정책들을 예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에 관한 정책들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데 논쟁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책이 어느 한 기업의 유연성을 높일 수 있어도 다른 기업의 유연성과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다. 정책이나 법률은 빠르게 변화하는 경영환경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고 무딘 도구다. 산업 전체에 미치는 효과는 더욱 모호하다.

 

그 대신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시키는 방향으로 시장의 효율성을 높이고, 기업의 지배구조가 투명해지게 하는 등의 정책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기업 단위의 유연성이 아닌 산업 생태계 관점에서 생태계의 유연성을 확보해 폭이 넓고 깊이가 깊은 산업구조가 유지되도록 정책을 디자인해야 할 것이다. 기업이 신사업에 진출하고 사업을 재편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정책도 중요하지만 신사업으로 자본이 유연하게 흘러가고 기존 기업은 기존 사업에 집중/전념할 수 있는 정책도 효과적일 수 있다. ‘창조적 파괴를 지속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시사점

 

루틴과 슬랙은 유연한 기업을 위한 중요한 주제들이다. 이는 전통적인 재무/금융 분야에서 많이 논의된 재무적 유연성이나 유연한 비즈니스모델 및 사업 다각화 등과도 관련이 있다. 이는 다시원샷법등에서 다루는 사업재편과 신규 사업 진출 등과도 연관이 된다.

 

많은 재무/금융 문헌에서 이야기하듯 유연한 기업은 양면성이 있다. 특히 기업의 유연성이 기업 내부의 미시적이고 일상적 활동을 넘어서 기업의 형태와 비즈니스 모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이러한 양면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렇다면 기업의 유연성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의 지배구조가 투명해져야 하고, 자본시장이 효율적으로 발달돼야 하며, 사회적 자본이 축적돼야 할 것이다.

 

기업들도 유연한 조직 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정보의 비대칭성과 도덕적 해이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구글의 경우 알파벳을 설립하는 등 투명한 지배구조 개편으로 주가가 상승하기도 했다. 지배구조 변화를 통해서 유연한 조직구조를 가질 수 있고 유연한 구조가 기업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Cyert, R. M., & March, J. G. (1963). A behavioral theory of the firm. Englewood Cliffs, NJ, 2.

Feldman, M. S. (2000). Organizational routines as a source of continuous change. Organization science, 11(6), 611-629.

Helfat, C. E., Finkelstein, S., Mitchell, W., Peteraf, M., Singh, H., Teece, D., & Winter, S. G. (2009). Dynamic capabilities: Understanding strategic change in organizations. John Wiley & Sons.

Jensen, M. C. (1986). Agency cost of free cash flow, corporate finance, and takeovers. Corporate Finance, and Takeovers. American Economic Review, 76(2).

Nelson, R. R., & Winter, S. G. (2009). An evolutionary theory of economic change. Harvard University Press.

Schumpeter, J. A. (1934). The 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 An inquiry into profits, capital, credit, interest, and the business cycle (Vol. 55). Transaction publishers.

 

강형구 한양대 경영대학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 hyoungkang@hanyang.ac.kr

 

필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듀크대 푸쿠아 경영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군장교 근무 후 리먼브러더스 아시아본부 퀀트전략팀, 삼성자산운용, 국제통화기금, 액센츄어 등에서 재무와 금융에 관한 교육 및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하버드대 Edmond J. Safra Center for Ethics의 리서치 펠로(Research fellow)를 지냈다. 주 연구 분야는 금융 혁신, 비기술적 혁신, 자원배분과 전략에 대한 프로세스, 행동재무 등이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20호 Pet Humanization 2021년 05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