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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3. 미국 반도체 시총 1위 ‘엔비디아’의 성장 전략

‘소비자가 쓰기 쉬운 신기술’에 초점
선두업체 밀어낸 비결은 新생태계 구축

조명현 | 311호 (2020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지난 7월 시가총액 기준으로 인텔을 제치고 미국 반도체 회사 1위에 등극한 엔비디아는 최근 인공지능(AI) 시대의 반도체 시장을 선도할 리더로 급부상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1) 남들보다 앞서 새로운 하드웨어(1999년 PC 최초의 하드웨어 T&L)를 개발하고, 2) 새로운 하드웨어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생태계(예: DirectX)에 투자함으로써 전 세계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을 제패했다. 이후 엔비디아는 GPU를 그래픽뿐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GPGPU(General-Purpose GPU) 시장을 개척하며 비디오 게임 시장을 넘어 전체 컴퓨팅 시장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에도 새로운 하드웨어(예: Programmable Shader)와 개발자들이 사용하기 쉬운 소프트웨어 생태계(예: CUDA)를 구축함으로써 확실한 고객 가치를 창출해낸 게 주효했다. 엔비디아의 성장 전략은 확실한 고객 가치를 기반으로 기존 산업 질서에 과감히 도전해 수익 극대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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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8일, 반도체 업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터졌다. 엔비디아(NVIDIA)가 전통의 반도체 강호인 인텔을 제치고 미국 반도체 기업 시가총액 1위에 등극했다. 이날 엔비디아는 408.64달러에 장을 마감하며 2513억 달러(약 280조 원)의 시총을 기록, 인텔(2481억 달러)을 처음으로 앞섰다. 1999년 나스닥에 상장한 지 21년여 만에 미국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등극한 것이다.

사실 매출 실적으로 봤을 때 엔비디아는 인텔의 5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월가에서 예상하는 올해 인텔의 매출액은 738억 달러지만 엔비디아는 약 146억 달러에 불과하다.1 그럼에도 엔비디아는 올 들어 미래 성장성에 대한 기대로 주가가 급등하며 시총 기준 미국 최대 반도체 기업으로 떠올랐다.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사물인터넷(IoT)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이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의 강자가 돼 반도체 시장의 새로운 맹주로 급부상한 덕택이다.

엔비디아는 1993년 설립 이래, 고객에게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온 회사다. 엔비디아가 단순히 하드웨어를 제공하는 기존 반도체 회사의 역할을 거부하고 시스템과 소프트웨어까지 자신들이 주도하는 확장된 사업 모델을 구축해 온 이유다. 그 결과 27년 전 불과 4만 달러 자본금으로 시작한 엔비디아는 현재 시총 2500억 달러가 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지난 5년간 주식 가격이 18배 이상 올라 같은 기간 1.5배 성장에 그친 인텔 대비 거의 2배에 달하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만큼 시장에서는 엔비디아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2

본 글에서는 엔비디아의 성장 과정과 성공 방정식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엔비디아의 전략은 ‘가치에 집중해 기존 산업 구조를 재편’했다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엔비디아의 성장 전략을 찬찬히 분석해 보면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고객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변화하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 산업 안에서 앞으로 어떤 도전과 기회가 나타날 것인지도 가늠할 수 있다.

GPU 시장을 제패하다

엔비디아의 가장 큰 사업 영역은 비디오 게임을 위한 GPU다. 3차원 그래픽 처리에는 일반적인 중앙처리장치(CPU) 기술이 처리하기 힘든 막대한 연산 능력이 요구된다. 엔비디아의 창업자이자 현 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은 1993년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면서도 단기간 내 막대한 물량을 기대할 수 있는 이 시장에 매력을 느끼고 회사를 창업했다.

사실 3차원 그래픽 하드웨어 시장에서 가장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3dfx라는 회사였다. 엔비디아보다 1년 늦은 1994년 설립된 이 회사는 1996년 출시한 첫 제품 부두(Voodoo)와 1998년 출시한 부두2로 경쟁사 제품을 성능에서 압도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부두 시리즈의 성능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대다수 게임은 3dfx의 소프트웨어인 글라이드(Glide)라는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됐다. 이는 많은 게임이 부두 시리즈에서 가장 뛰어난 그래픽을 제공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 1998년 3dfx는 전체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3dfx의 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후, 3dfx는 성장할 때만큼이나 놀라운 속도로 몰락하고 만다. 전성기로부터 불과 2년이 지나지 않은 2000년, 3dfx는 경쟁사인 엔비디아에 자사의 모든 지적재산권을 매각하고 회사를 정리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그리고 엔비디아는 3dfx가 떠난 시장을 석권해 현재 독립형 GPU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엔비디아는 불과 2년 사이에 시장의 절대적 강자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강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엔비디아가 GPU 시장을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엔비디아의 신기술이 쓰기 쉬웠기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성공 비결을 기대한 이들이라면 자칫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반도체 산업에서는 ‘쓰기 쉬운 신기술’을 개발한다는 게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반도체 개발에는 막대한 예산과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남들보다 앞서 신기술을 제공하겠다는 것은 사업성이 검증되지 않은 제품 개발을 위해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러한 기술을 쓰기 쉽게 만드는 것은 반도체 개발 그 자체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반도체의 기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를 갖추기 위해서는 반도체 개발 대비 몇 배에서 수십 배에 달하는 인력이 투입돼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이는 한 회사의 역량을 넘어 여러 기업과 개발자들이 연결된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반도체 회사가 혁신적인 하드웨어 개발에 성공하고도 불완전하고 불편한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 때문에 시장에서 외면받은 사례가 비일비재한 이유다.

엔비디아의 ‘쓰기 쉬운 신기술’은 바로 1999년 출시한 하드웨어 지포스256(GeForce256)과 이를 지원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 다이렉트3D(다이렉트3D)였다. 지포스256은 PC 시장에서는 최초로 T&L(Transform & Lighting) 기능을 탑재한 그래픽 카드다. T&L이란 3차원 그래픽을 처리할 때 바라보는 시점과 빛의 위치에 따라 물체가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를 계산하는 기능이다. 지포스256 이전에는 전용 그래픽 카드가 아닌 컴퓨터 본체의 CPU가 T&L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래픽 기술이 발전하면서 CPU가 아닌 그래픽 카드에서 T&L을 전담할 필요성이 커지게 됐다. 또한 전용 그래픽카드가 T&L을 담당하게 되면 성능이 낮은 CPU로도 높은 수준의 3차원 그래픽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는 효과도 있었다. 엔비디아는 이러한 흐름을 읽어 누구보다도 먼저 T&L 기능을 내장한 그래픽 카드를 출시해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엔비디아는 아무리 훌륭한 하드웨어도 게임 개발사들이 쉽게 활용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사 하드웨어인 지포스256을 기반으로 게임을 쉽게 개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엔비디아는 마이크로소프트사와의 협력에 많은 공을 들였다. 마이크로소프트 3차원 게임 개발을 위한 소프트웨어 도구인 다이렉트3D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지포스256과 같은 해에 발표된 다이렉트3D 7.0에서 최초로 하드웨어 T&L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많은 개발사가 지포스256의 강력한 T&L 기능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게 됐고,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게임들은 하드웨어 T&L 기능이 없는 부두보다 엔비디아의 지포스256에서 훨씬 더 멋지게 동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하드웨어 기술과 이를 구동하는 강력한 소프트웨어의 결합은 바로 3dfx의 성공 전략이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3dfx는 3차원 게임 개발에 유용한 하드웨어(부두)를 제공하면서 이를 사용해 쉽게 게임을 개발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소프트웨어(글라이드)도 함께 제공했었다. 반면 엔비디아의 초기 제품은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가 3dfx의 글라이드보다 사용하기 훨씬 더 불편했다. 당시에도 다이렉트3D를 엔비디아 그래픽카드와 함께 쓸 수 있었지만 아직 초기 버전으로 기능과 편의성이 부족했다. 그러던 엔비디아가 3년 만에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 3dfx에 완승을 거둔 것은 아주 인상적이다. 3dfx의 막강한 초반 독주에 좌절을 겪으면서 엔비디아와 젠슨 황은 강력한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아프게 체감한 것이 아닐까. 엔비디아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다이렉트3D 7.0 개발에도 긴밀히 협력했고 이를 사용하는 게임 개발사들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개발자들로부터 “엔비디아로는 개발이 수월하다”는 평가를 얻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 것이다.

이뿐 아니다. 젠슨 황은 3dfx의 실책에서마저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부두2가 성공을 거두면서 자신감을 얻은 3dfx는 대담하게도 기존 고객들을 배제하고 전체 시장을 독점하려 했다. 부두2까지만 해도 3dfx는 전형적인 반도체 업체의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즉, 다양한 세트 업체가 3dfx로부터 반도체 칩을 구매해 다른 부품들과 결합해 컴퓨터에 장착할 수 있는 그래픽 하드웨어를 생산해 판매했다. 하지만 3dfx는 부두3 출시와 함께 모든 하드웨어를 직접 생산하겠다고 선언하고 기존 고객사였던 세트 업체들에 부두 칩 공급을 중단했다. 하지만 3dfx 혼자서는 다양한 제품군과 생산량을 확보할 수 없었고, 3dfx로부터 칩을 공급받지 못한 세트 업체들은 엔비디아의 칩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3dfx의 시장점유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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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필자는 젠슨 황이 당시 3dfx의 독점 전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술 생태계를 압도할 수 있다면 반도체 업체의 영역을 넘어서는 가치 확장조차 시도해볼 만하다”는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엔비디아 역시 시장의 주도권을 잡게 된 후, 자신들의 가치 실현을 극대화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엔비디아 칩을 구매하는 업체들이 엔비디아의 경쟁사 칩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강제하려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차별화된 기술로 최대한의 가치를 실현하는 엔비디아의 행보로 인해 젠슨 황은 실리콘밸리에서 “두려움 없이 가치를 뽑아내는 자(Fearless Value Extractor)”라는 평판을 얻게 됐다.

2000년 3dfx의 지적재산권을 인수하면서 엔비디아와 3dfx의 대결은 엔비디아의 완승으로 마무리됐다. 현재의 엔비디아를 논하며 20년 전 벌어진 GPU 전쟁을 다시 짚어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3dfx와의 경쟁을 거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과정,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교훈들이 엔비디아의 DNA로 남아 경쟁력의 근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1) 탁월한 성능의 하드웨어(예: 지포스256)와 2) 쓰기 쉬운 강력한 소프트웨어 생태계(예: 마이크로소프트웨어 다이렉트3D), 3) 이를 기반으로 한 공격적인 가치 실현(예: 엔비디아 경쟁사 칩 사용에 대한 제재)은 21세기 들어서도 엔비디아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전략이 됐다.

앞선 하드웨어 개발과 쓰기 쉬운 소프트웨어로 GPGPU 시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다

엔비디아는 2004년, 스탠퍼드대 컴퓨터공학 박사인 이안 벅3 을 채용한다. 이안 벅은 스탠퍼드대에서 GPU로 그래픽이 아닌 다양한 연산, 특히 계산량이 극도로 많은 병렬 연산을 수행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GPU는 3차원 그래픽에 포함된 다양한 물체의 위치를 동시에 계산할 수 있도록 설계됐는데 이를 활용해 수많은 연산을 동시에 처리함으로써 CPU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래픽에 특화된 하드웨어를 일반적인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GPGPU(General-Purpose computing on Graphics Processing Units)라는 역설적 이름의 기술이 태동한 것이다.

비디오 게임을 넘어 전체 컴퓨팅 시장으로 확장을 원했던 엔비디아는 이안 벅의 합류와 함께 큰 변화의 기회를 얻게 됐다. 이안 벅은 엔비디아에 입사한 후, 자신의 연구를 확장해 쿠다(CUDA•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라는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를 만들어낸다. CUDA는 개발자들이 엔비디아의 GPU를 활용해 다양한 병렬 연산을 CPU 대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처리할 수 있게 돕는다. 마치 다이렉트3D를 사용해 게임을 개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다이렉트3D와 달리 CUDA는 엔비디아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소프트웨어였고, 엔비디아 GPU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시장에는 CUDA 외에도 개방형 범용 병렬 컴퓨팅 프레임워크인 오픈CL(Open Computing Language)이나 다이렉트컴퓨트(DirectCompute)처럼 다른 회사의 GPGPU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개발 도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기능, 개발 편의성, 성능은 물론 소프트웨어 생태계 측면에서도 이들 개발 도구는 CUDA 대비 현저히 뒤처져 있다. 이 때문에 GPGPU 기능이 필요한 대다수의 슈퍼컴퓨터나 대형 연구소, 데이터센터 등에서는 CUDA를 위해 엔비디아 GPGPU를 선택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치 글라이드 때문에 3dfx에 밀렸던 설움을 CUDA를 통해 풀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혁신 역시 그 시작은 남보다 앞선 하드웨어의 개발이었다. 2001년 엔비디아는 지포스3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여기에 프로그램이 가능한 셰이더(Programmable Shader)라는 기능을 최초로 도입했다. GPU는 3차원 물체의 각 꼭짓점의 위치를 계산하고 화면을 구성하는 각각의 점의 색깔을 결정하기 위해 각각 정점 셰이더(vertex shader)와 픽셀 셰이더(pixel shader)라는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포스3은 꼭지점과 색깔 등을 정해진 방법으로만 계산하지 않고 게임 개발자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 가능한 셰이더를 추가했다. 원래는 게임에서 특수한 시각적 효과를 구현하기 위한, 여전히 3차원 그래픽을 위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셰이더의 계산 방식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되면서 이를 응용해 아예 그래픽이 아닌 일반 연산의 목적으로 GPU를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엔비디아가 GPGPU 분야에서 하드웨어의 경쟁력만으로 지금의 위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dfx와의 경쟁을 통해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쓰기 힘든 하드웨어는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교훈을 갖고 있는 엔비디아는 GPGPU 초창기부터 이안 벅의 팀을 중심으로 CUDA 및 CUDA를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 생태계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이 덕분에 GPGPU를 사용하는 많은 개발자 및 과학자가 CUDA 없이는 GPGPU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CUDA에 익숙해지게 됐다. 엔비디아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CUDA의 적용 범위도 꾸준히 확장해 왔다. 그 결과 이제는 자율주행 등 다양한 AI 기반 응용 프로그램에도 CUDA 기반의 개발 도구를 제공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GPU와 CUDA로 인해 많은 사용자가 빠르고 쉽게 첨단 기술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엔비디아는 이렇게 자신들이 만들어낸 특별한 가치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가격을 매긴다. AI에 쓰이는 고성능 데이터센터향 제품들은 엔비디아가 반도체뿐 아니라 전체 시스템을 생산해 높은 마진으로 독점 판매하고 있다. 또한 자사의 반도체를 사용해 세트를 만드는 업체들에 소프트웨어 및 시스템 개발을 지원하면서도 많은 비용을 청구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아니었다면 고객이 직접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했을 테니 젠슨 황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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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의 다음 도전지는 데이터센터

확고한 가치를 기반으로 전통적 반도체 업체의 역할을 넘어서는 엔비디아의 전략이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다. 테그라(Tegra)로 도전했던 모바일 AP(Application Processor) 시장에서는 모뎀 기술의 부재 등으로 인해 고객 핵심 가치를 차별화하는 데 실패했다. 야심 차게 추진했던 자율주행용 반도체에서는 CUDA 기반의 강력한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를 앞세워 한때 “엔비디아가 아니면 개발이 막막하다”는 핵심 가치를 만드는 데 성공하는 듯도 했지만, 완성차 업체가 자동차 사양 결정을 주도하고 반도체를 포함한 다양한 부품 업체를 관리하며 품질과 생산 비용을 통제함에 따라 그 영향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엔비디아의 도전이 거세질 것으로 예상되는 데이터센터 및 서버 반도체 시장의 미래는 어떠할까? 이 영역의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오랫동안 인텔의 CPU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인텔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었던 공정 기술 개발에 문제가 발생4 하고, AI 등 CPU 기술이 처리하기 힘든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굳건하게 보였던 인텔의 주도권은 급격하게 약해질 위기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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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는 그동안 GPGPU와 AI 등 데이터센터에서 인텔 CPU와 병행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출시해 왔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아마도 인텔 CPU 대체를 목표로 사업을 전개해 갈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엔비디아가 스마트폰 CPU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ARM을 40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의도를 반증한다. 스마트폰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 ARM CPU의 성능도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엔비디아는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인텔에 대항할 수 있는 수준의 CPU를 개발해 자사 GPU와 결합시킬 것이다. 즉, 엔비디아의 GPU와 ARM의 CPU를 결합하고, CUDA를 기반으로 통합된 하드웨어를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함으로써 데이터센터 고객들이 “엔비디아가 아니면 AI 기반 서비스 개발이 너무 막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려 할 것이다.

만약 엔비디아가 실제로 이러한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20년 전 3차원 그래픽 시장에서처럼 시장의 주도권이 엔비디아로 이동하게 될까, 아니면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반도체 시장에서처럼 기존 산업의 질서가 유지되고 엔비디아의 영향력은 일부에 그치게 될까?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답은 섣불리 예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데이터센터에서 하드웨어 구매를 결정할 때는 실제 이를 사용하게 될 최종 고객이 어떤 CPU와 GPU, 어떤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를 선호하는지가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마치 유력 개발사들이 어느 회사 기술을 기반으로 게임을 개발하는지가 중요했던 3차원 그래픽 시장과 유사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엔비디아가 향후 데이터센터와 서버 시장, 더 나아가 PC 시장에서도 CPU와 GPU를 아우르는 인텔의 가장 강력한 경쟁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젠슨 황을 잘 아는 사람은 “엔비디아 직원이 젠슨 황과 함께 회의에 들어가 ‘엔비디아는 반도체 회사’라고 말한다면 즉시 해고당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젠슨 황은 엔비디아의 역할을 단순한 반도체 제품 공급 그 이상으로 보고 있다. 그의 꿈은 모든 영역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컴퓨팅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반도체 판매를 훨씬 넘어서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 엔비디아는 필연적으로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영역으로의 확장을 지속할 것이다.

꼭 반도체 관련 기업이 아니더라도 엔비디아의 성공 전략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경쟁의 핵심 요소를 정확히 짚어내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고, 이를 기반으로 기존 산업 질서에 과감히 도전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일은 많은 기업이 각자 당면해 있는 제약 조건으로 인해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고객에게 명확하고 확고한 가치를 전달할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누구나 이를 위한 투자는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가치에 정당한 대가를 청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쓰기 쉬운 새로운 기술’이라는 명확한 고객 가치를 추구한 엔비디아. 우리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확고한 가치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것이 이 기업 사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조명현 세미파이브(SEMIFIVE) 대표 brandon@semifive.com
필자는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MIT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반도체 설계)를 받았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서 반도체 분야 핵심 멤버로 다수의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의 전략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지난 2018년 오픈 소스 방식의 리스크 파이브(RISC-V) 기술을 선도하는 미국 사이파이브(SiFive)로부터 출자를 받아 반도체 설계 플랫폼 업체인 세미파이브를 창업했다. 현재 세미파이브는 기존의 고비용 반도체 설계 과정을 효율화해 다양한 고객사들의 커스텀 반도체 개발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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