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략’의 탄생”

철도로 수송하고 전투기로 싸우고···확장된 전쟁, 대전략·총력전을 낳다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 혁신

 1차 세계대전은 현대 경영자가 지녀야 할 전략적 사고의 틀을 제공하는 확실한 교과서였다. 적과 맞닥뜨린 전투현장에서의 전술목표만이 아니라 후방을 비롯한 모든 전략적 요소를 목표로 끌어들인전략목표간접접근론은 오늘날 마케팅, 홍보, 상품개발 전략에 침투했다. 1차 대전이 지금의 기업가들에게 주는 교훈은 첫째는변화그 자체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이며, 둘째는변화의 조건을 이해하는 능력의 중요성이다. 또한 우리가 깨달은 진리는 인간은 자동제어식 생산라인에 주저앉히는 방식이나 정반대로 소위인간적이라고 간주되는 우아하고 편안한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만으로는 최대한의 창의력과 역량을 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병사를 만드는 방법은 그의 전투 구역을 확정해 주고 전투구역 안에서 주어진 명령과 목표하에서 창의와 도전을 최대한 허용하는 것이다. 현대 기업과 조직에도 언제나 적용돼야 할 가르침이다.

 

인간의 역사는 도구 발달의 역사다. 인간이 도구를 발명하고, 도구가 사회구조와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까지도 바꾼다. 이런 도식 자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영화모던타임즈에서 찰리 채플린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 인정사정없는 자동기계에 의해 인간다움이 소멸돼 가는 삶을 자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모던타임즈는 기계의 소음과 검은 연기를 통해 인간다움을 얻는 것도 많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인간다움과 기계(도구)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항상 공존한다. 이 진리는 인간이 신석기를 발명했을 때부터 그랬다. 장자크 루소는 신석기 시대, 인간이 땅에 경계선을 긋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진 자와 없는 자가 나뉘어 지고 부와 권력의 차별이 시작됐다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가장 인간다운 장면, 가족이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고, 어두운 조명 아래서 아버지는 내일 사용할 농기구를 다듬고 어머니는 잠든 아이를 바라보면서 반죽을 하거나 옷을 꿰매는 원초적인 정경도 신석기의 선물이라는 사실은 간과한다.

 

도구의 발달은 변화를 요구한다. 안타깝게도 그 요구는 늘 이중적이다. 긍정적 요인과 부정적 요인이 공존한다. 인간 역시 이중적이다. 변화가 주는 욕구와 편안함은 삼키려 하면서 과거의 삶과 익숙함에 안주하려고 한다. 이 모순의 간극이 커질 때 개인이든 사회든 심각한 위기와 파괴에 직면한다. 이 발전의 법칙 역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존재했다. 그러나 산업화는 발전의 속도는 몇 백, 몇 만 배 이상으로 높이고 대응과 변화의 시간은 줄였다.

 

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그 간극이 주는 파괴의 피해가 가장 크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서부전선에서만 1000만 명이 전사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15세에서 50세 사이의 성인 남자 중 55% 정도가 참전했고 그중 25%가 전사했다. ‘모던타임즈와 사회주의 혁명은 그 충격의 산물이다. 인류는 산업화 시대를 경영하기 위한 교훈도 비로소 얻었다.

 

 

 

대전략의 시대

1차 세계대전의 상징은 참호전이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10중이 넘는 참호망을 깔고 연합군과 독일군은 4년 동안 살육전을 벌였다. 참호 생활은 끔찍했다. 하늘에서 내린 비와 땅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로 바닥은 물이 흥건했다. 땅은 차진 진흙으로 끈적거렸다. 병사들은 물과 흙이 범벅이 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진흙에 발이 달라붙어 1㎞를 전진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포탄보다 무서운 것이 포탄구덩이였다. 빗물이 고인 구덩이는 개미지옥같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 됐다. 그곳에 미끄러지면 익사했다. 시체로 배를 불려 고양이만큼 비대해진 쥐들이 바글거리고 아무리 빨고 살균을 해도 군복에서는 이와 벼룩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끔찍한 삶이 4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6주 만에 끝날 뻔도 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성공 일보직전에 실패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슐리펜 계획은 정면의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독불 국경에 붙들어 놓고 그 사이에 주력이 프랑스 북쪽의 벨기에로 우회해 프랑스군의 뒤로 돌아 들어가 단숨에 파리를 함락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작전도만 보면 단순하다. 우회기동을 이용한 측면기습은 태고 이래전술의 고전이었다. 하지만 200만의 예비군을 동원해 1주도 안 되는 사이에 전선에 배치하고 병사 1인당 60개가 넘는 보급품이 필요한 현대 보병을 400㎞ 이상 진격시키며 보급을 유지해야 한다면 이 전술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철도였다. 철도로 군대를 이동시키는 전술은 남북전쟁에서 처음 시도됐다. 이것을 전략적으로 승화시킨 전투가 1866 73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벌어진 쾨니히그래츠 전투였다. 프로이센은 25만의 군대를 세 방향으로 분리해 쾨니히그래츠로 진격시켰다. 전투 당일 오스트리아군은 승리를 자신했다. 전선의 프로이센군은 12만 명, 오스트리아군은 20만 명이었다. 가장 멀리 우회한 97000명의 프로이센 제2야전군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오스트리아군 기병은 쾨니히그래츠 반경 수십㎞를 철저히 정찰했는데 전투 참여가 가능한 범주 내에서 접근해 오는 원군은 없다고 확신했다.

 

프로이센군이 패배하기 직전 제2야전군이 나타났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명을 질렀다. “저들이 어디서 나타난거야?” 프로이센은 철도를 이용해 오스트리아군의 예상 범위를 훨씬 넘는 속도로 이동했던 것이다.

 

서기 1세기 중국 신나라 황제 왕망(?∼23) 30만 명을 투입해 흉노를 정벌할 계획을 세운다. 작전 기한은 약 3개월이었다. 하지만 병력을 전투 개시선에 배치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이 사정은 18세기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50, 100만이라는 병력을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총동원병력을 과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병참과 이동속도 때문에 하나의 전투에 10만 명을 투입하기도 불가능했고 투입한다고 해도 장기간의 배치기간이 필요했다.

 

철도가 이 상황을 단숨에 바꿔 놓았다. 슐리펜 계획은 과거에는 기껏해야 반경 10㎞에서 벌어지던 전투의 영역을 수백㎞가 넘는 영역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슐리펜 계획은 초보적인 우회기동전술을 대전략, 총력전으로 바꿨다. 대전략과 총력전이라고 하면 다양한 개념이 있다. 보통은 전투력만이 아니라 외교력, 산업, 경제력을 포함한 국가의 모든 영역, 국민의 정신력까지 포함한 국가와 국민의 능력을 투입하는 승부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개념이라면 국가 간의 전쟁이 시작된 이래 총력전이 아닌 경우가 없다. 현대전을 총력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략, 전술을 적용하는 분야와 속도, 한 지점에 투입하는 병력과 물자의 양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빨라졌기 때문이다. 전략은 이제 국가가 지닌 모든 역량을 한 지역, 한 점에 얼마나 빨리 다량으로 효율적으로 투입하느냐의 싸움이 됐다. 국가는 평소에도 이 능력에서 적국에 앞서야 하며 앞선, 혹은 앞설 능력을 예측하고 거기에 기초해서 적이 예상치 못한, 아니 적이 시도할 수 없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슐리펜 계획의 수립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국가의 능력과 준비력의 문제다.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8세기 이전의 군대는 보급 체제가 완전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현지 조달이라도 하며 어기적거리며 나아갈 수 있었다. 지휘부는 병력을 여러 개의 행군로로 잘 분배해서 병력이 현지 조달 능력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고 그에 따른 이동시간만 잘 예측하면 됐다. 총과 포탄이 부족하면 기병돌격과 백병전으로 전황을 해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슐리펜은 200만 명을 철도로 동원한다. 식량과 보급품은 그런 식으로는 조달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다. 이제 지휘부는 병사들의 이동시간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송-분배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능력이 필요하다. 1개 군단을 이동시키는 데 6010대의 객차로 편성된 140개의 열차가 필요했다. 보급품 수송에도 같은 수의 열차가 필요했다. 문제는 보급품이다. 사람은 알아서 집결지에 모아 실으면 된다. 하지만 보급품은 수백 개의 지역에서 수천 개의 물품이 생산되고 있다. 이들을 열차까지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화물열차 한 대당 수백 대의 화물마차가 필요했다. 마차로 전달된 군수품은 기차를 통해 중간 집결지로 모이고 다시 200만 명 분량, 40개 군단의 예하 사단, 연대, 대대, 중대별로 분류돼 발송됐다. 오늘날 컴퓨터를 이용하는 물류, 교통시스템으로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이 임무를 독일군은 오직 전표와 인력으로 해냈다. 전국 열차망을 정확히 운용하기 위해 그들은 주요 교량과 교차점마다 인력을 배치해서 정해진 시간에 몇 번 열차의 몇 번 화차가 통과했는가까지 체크했다.

 

이것은 총력전에서 물류 한 분야의 양상일 뿐이다. 군수물자의 생산, 원료와 부품의 확보, 관리 인력의 양성과 배치라는 영역으로 가면 더 복잡한 일이 벌어진다. 모든 전쟁의 절반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과거에도 전쟁은 국가가 늘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이었다. 총력전 이전의 전쟁은 일정한 양의 군수공장을 가동하고, 창고에 물자를 비축하고, 적정 수의 상비군을 유지, 훈련시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현대전으로 들어서면 일상이 전시 체제가 된다. 그뿐 아니다. 무기, 기술의 발전에 대비해서 미래의 전략을 예측하고, 시스템과 인력을 구성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위해서 30년 이상 투자했다. 독일 육군의 최고 엘리트들을 철도역으로 파견해 열차 운용시스템을 수도 없이 구축하고 점검했다. 이 때문에 독일군 사이에서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성적이 좋으면 장교가 아니라 철도원이 되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다.

 

대전략과 총력전으로의 변화, 그것이 의미하는 변화와 성장을 위한 상시적 훈련과 대비, 조직이 가진 경쟁력을 보다 빠르고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신장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기업의 경영과 비전에도 적용됐다. JP 모건, 록펠러, 카네기 등 20세기 초반 세상을 바꾼 기업들의 경영 태도, 금융과 산업의 네트워킹, 무한한 비전에는 확실히 대전략의 사고가 반영돼 있다. 물론 독점, 문어발식 성장, 야근을 불사하는 혹사, 무조건적 성과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방식은 후대에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런 경영방식을 무한한 탐욕과 욕망의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무한한 탐욕은 성장욕으로 발전한 경우보다동전을 항아리에 넣어 뒤뜰에 파묻는 식으로 발현돼 왔던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차 세계대전은 현대 경영자가 지녀야 할 전략적 사고의 틀을 위한 확실한 교과서였다. 다만 현대전의 살인기계 앞으로 병사들을 맹목적으로 돌격시킨 1차 세계대전의 전장처럼 전략적 각성이 전술적으로는 너무도 투박하게 시행됐고, 그 변화에는 한 세기가 필요했다.1

 

옛날에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 옆에서 농민들이 농사를 짓거나 구경을 하고 있는 장면도 흔했다. 농민은 약탈과 지배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전술목표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략목표가 중요해지면서 적국의 모든 것이 승리를 위한 목표가 돼 버렸다.

 

전략 목표와 간접 접근

1937년경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서 카탈로니아 전선에 배치돼 있던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동물농장> <1984>의 작가)은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항공기가 전쟁의 조건을 바꾼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전선에 있던 조지 오웰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후방에 있는 선동가들이 전쟁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만드는 주범임을 깨닫고 분노했다. 그래서 항공기(대부분 파시스트 진영의 적 전투기였지만)를 보면서 이런 자조적인 위안을 했던 것인데 그는 전략적 판단은 아주 옳았다. 전투기와 폭격기는 전선의 군인들이 아니라 후방의 전략목표를 향해 필사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1차 대전의 가장 큰 특징이 새로운 전장의 출현이다. 전투기와 잠수함의 등장으로 전장이 하늘과 바다로 확대됐다. 전선의 병사들에게 모기처럼 앵앵거리고 날아다니는 전투기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항공기는 가끔 총구를 지상의 병사들에게로 돌렸지만 파괴력은 영화의 장면처럼 대단하지는 않았다. 당시 전투기의 출력과 속도는 오늘날의 소형차보다도 떨어졌다. 전쟁 후반 신형 전투기의 최고 속도가 180㎞ 정도였고 평균 실속은 70∼80㎞대에 불과했다.

 

 

재미난 사실은 최첨단의 병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투방식은 그야말로 중세의 기사전의 재현이었다는 것이다. 11 혹은 55식의 공중전 대결은 엘리트 파일럿에게 기사도 정신마저 불어 넣어서 적의 기관총이 고장 나자 전투를 중지하고 돌아갔다거나 추락한 적국 에이스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르고 그의 유품을 찾아 부모에게 전해주는 중세풍의 무용담도 꽤 많이 남겼다. 이 분위기는 현대의 파일럿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지만 전략가들은 이 첨단무기를관우의 적토마처럼 사용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전투기와 잠수함은 전략목표에 대한 타격을 가능하게 했다. 항공기가 실제로 그런 능력을 갖추는 데는 몇 십 년이 더 필요했지만 착상은 분명했다. 전술목표란 병력, 요새와 같은 직접적인 전투력을 지닌 타깃이다. 전략목표란 국왕, 식량, 산업시설, 국민의 전쟁의욕 같은 전투력을 지원하는 힘이다. 19세기까지 전투는 거의가 전술목표에 대한 공격이었다. 후방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전략목표를 타격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공기와 잠수함이 이 생각을 바꿨다. 이것은 전쟁 수행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야기했다. 옛날에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 옆에서 농민들이 농사를 짓거나 구경을 하고 있는 장면도 흔했다. 농민은 약탈과 지배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전술목표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략목표가 중요해지면서 적국의 모든 것이 승리를 위한 목표가 돼 버렸다.

 

이와 유사한 변화로 리델 하트의 간접접근론이 있다. 간접접근이란 전략목표에 대한 공략뿐 아니라 전술목표에 대한 우회공격, 회유 등 전술목표에 대한 직접공격을 제외한 모든 공격방식을 말한다. 리델 하트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승리는 모두가 직접접근이 아닌 간접접근에 의한 승리였다는 과감한 선언을 했다. 선언이라고 한 이유는 사실 억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1차 대전에 대위로 참전했던 그는 기관총과 콘크리트 요새, 유산탄 앞으로 육탄 공격을 감행하는 전투방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현대에 걸맞은 전술과 군인들의 창의적인 태도로 이 비극을 감소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군대는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다.

 

1차 대전에서 이런 보수적인 자세는 살육을 낳았다.

 

그의 묵시적인 선언은 다음 세계대전에서 패튼과 구데리안 롬멜로 대표되는 전격전과 임무형 전술로 증명됐다. 6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하려는 슐리펜의 이상은 철도가 아니라 기갑군단과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태도로 무장한 기갑군단 장병들에 의해 실현됐다.

 

전략목표와 간접접근론이 민간 사회에 미친 영향을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마케팅, 홍보, 상품개발 전략을 돌아보면 전략적 접근, 간접접근의 사례가 널려 있다. 전선은 하늘과 해저가 아니라 시간과 사람들의 마음속, 잠재의식의 영역까지로 확대됐다. 그런 점에서 1차 세계대전은 현대적 전략의 시작이었다.

 

 

리더십과 인간의 재발견

1차 대전을 살육전으로 만든 비밀병기는 기관총이었다. 기관총의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의 스케치 중에는 여러 개의 총구를 하나로 연결한 연발총의 설계도가 있다. 그것이 실용화되지 않은 것이 다빈치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랬더라면 모나리자의 미소는검은 과부의 미소라고 불리게 됐을지도 모른다.

 

남북전쟁 말기에 미국의 치과의사였던 리처드 개틀링이 크랭크를 돌려 여러 개의 총구를 연쇄적으로 발사하는 개틀링식 기관총을 발명했다. 이 방식을 개량한 현대의 벌컨포는 가공할 병기가 됐지만 당시에는 총알 장전이 어려워서 꽤 불편한 무기였다. 그러자 히람 맥심이라는 발명가가 탄띠 급탄 방식의 기관총을 내놓았다. 수냉식이었던 이 무기는 오늘날의 기관총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26.7㎏으로 무거웠지만 분당 500발의 사격속도는 소총 100정과 맞먹는 위력을 발휘했다.

 

맥심은 스웨덴에 공장을 설립하고 유럽 각국에 판매했다. 참호전에서 기관총은 상상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철조망과 포탄 구덩이 사이로 서서 전진해 오는 병사들에게 기관총은 무차별적인 죽음을 선사했다. 한 영국군 병사는참호에서 나와 돌격한 지 15분 만에 어디선가 기관총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중대가 전멸했다고 증언했다. 그 건너편에 있던 독일군 기관총 사수의 증언은 더 충격적이다. 자신이 방아쇠를 당긴 시간은 5분이었다. 21 2대의 기관총이 교차사격으로 이뤄낸 전과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에서 거느렸던 10만의 병사 중에서 최고의 용사였던 한 백부장은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10명 정도를 쓰러트린 적이 있다. 그의 후임 자리를 놓고 두 명의 백부장이 경쟁을 했다. 둘은 단신으로 적진에 돌격해서 더 많은 적군을 죽인 사람이 후임이 되기로 했다. 다음 날 그들은 똑같이 5명을 죽이고 스스로도 부상을 입었다.

 

이것이 전근대 전투에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가치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는 6주간 착실하게 훈련받은 평범한 병사가 200, 아니 1000명도 살해할 수 있게 됐다. 1차 세계대전이 남긴 최대의 각성이 인간 가치에 대한 각성이다. 인간의 도구가 낳은 참상이 반성을 낳았다.

 

사실 한 명의 병사가 수십 명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남북전쟁에서 증명됐다. 남북전쟁을 참관했던 유럽의 장교들은 밀집대형으로 서서 전진하는 병사들이 신형 소총과 강철대포에 몰살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즉시 본국에 타전을 해서서서 싸우는 전술을 폐기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보불전쟁을 거쳐 1차 세계대전까지도 서서 싸우는 전술은 변함이 없었다. 단지 밀집대형만은 포기했는데 그것마저 고수했다면 더 이상 싸울 병사들이 남아나지 않아서 전쟁은 1년 만에 끝났을 것이다.

 

유럽 각국이 서서 싸우는 방식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비용과 장교들의 귀족적 태도 때문이었다. 남북전쟁 후에 낮은 포복과 높은 포복으로 산개해서 전진하는 방식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장교의 통제도 받지 않게 됐다. 병사들은 구덩이에 얼굴을 박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을 엎드려서 싸우게 하려면 장교와 하사관, 사병, 사병과 사병 간에 형제와 같은 유대감, 병사로서의 개개인이 전술적 주체라는 자각과 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제도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상비군제도와 병영생활이다. 하지만 젊은이를 2년 이상 병영에 잡아 두려면 엄청난 불만을 무마해야 했고 막대한 군비가 필요했다. 그 이전까지 유럽 군대의 소집훈련 기간은 겨우 40일 정도였다.

 

1차 대전까지도 군의 장교들은 장교와 사병의 관계를 귀족과 평민의 관계로 착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유달리 극심했던 러시아는 중대장이 사병들 앞에 나타나는 것 자체를 모욕으로 생각했다. 소대장도 몸에 흙을 묻혀야 하는 돌격과 전투 지휘는 평민 출신 소대장에게 일임했다. 다른 유럽 군대는 그보다 조금 나았지만 대대장만 돼도 현장 지휘를 체면 구기는 일로 간주했다. 하사관은 집사였고 사병은 명령을 이행하는 존재였지, 생각하고 대응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고서야 세계 각국은 병영제도를 도입했고 그에 해당하는 군사비 지출을 감내하게 됐다. “병사들은 애국심이나 전우애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형님 같은 중대장에 대한 의리 때문에 싸운다는 말이 있다. 병영 체제는 귀족 리더십을 형님 리더십으로 바꿨다. 병사들은 전투의 소모품, 전투기계가 아니라 주체가 됐다.

 

산업발전과 경영의 힘

18세기의 군사전략가이자 현대 군사이론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보급의 중요성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그가 강조한 보급품은 식량이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 포탄과 총알이 귓가를 스쳐가는 전투에서 병사들이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주린다고 생각해 보라고 말하며 그는 보급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시대에 병사들은 끔찍하게 굶주렸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최첨단의 보급시스템을 자랑했지만 약탈(현지 조달) 능력도 세계 최고였다. 그렇게라도 그럭저럭 유지되던 보급도 막상 전투를 앞두면 끊어지기 일쑤였다. 전투용 물자를 우선적으로 보급해야 했고 약탈조도 운영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은 철도가 위력을 발휘한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양군 병사들은 둘 다 굶주린 채 전투에 임했다. 프로이센군 최고 사령관이던 몰트게조차 전투 당일 날 그가 먹은 것은 초콜릿 두 조각과 빵 한 조각뿐이었다.

 

빵은 하루를 굶어도 싸울 수 있지만 총과 탄약이 없으면 싸울 수 없다. 그런데 19세기까지도 군대는 군수물자의 보급을 절대 경시하지 않았지만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는 의식도 있었다. 어느 시대나 군수품 생산은 수지맞는 사업이다. 겉보기에 그럴듯한 제품을 만들어 입찰에 성공하면 최대한 생산단가는 낮추고, 필요량을 적당히 생산한다. 총과 대포는 그나마 품질유지가 됐지만 탄약과 일반 보급품은 저질품이 넘쳐났다. 군도와 단검은 한 번 쓰면 휘어졌다. 가방, 탄띠 같은 가죽제품은 최고급품을 사용하도록 돼 있었지만 실제 성능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품질경쟁은 그렇다 치고 생산력 경쟁이 국가의 운명을 바꾼다는 개념이 희박했다. 국력이 비슷한 국가라면 생산량도 비슷할 것이다. 적의 영토를 절반 정도 점령하기 전에는 군수품 생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산업화는 군수산업을 공존에서 경쟁으로, 전투의 지원자가 아니라 전투의 주체로 변모시켰다. 경영개선만으로도 군의 전투력과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 1차 대전 당시 전쟁 준비, 장교들의 재능과 헌신, 병사들의 훈련 수준과 전투력에서는 독일군이 확실한 우위였다. 영국과 프랑스군 장교들이 후방에서 지휘할 때 독일군 장교들은 이미 최전선에 나와 있었다. 기민한 상황 판단, 신속한 대처에서 독일군은 한 수 위였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독일군은 수세로 몰렸다. 병력의 열세도 열세지만 제일 큰 이유가 포병화력의 열세였다. 롬멜은 그의 1차 대전 참전기인 <보병전술>에서 적의 진지를 점령하고도 프랑스군의 강력한 포격에 번번이 후퇴해야 했던 아픔을 곱씹고 있다.

 

드퓌 전투에서 롬멜이 속한 2대대는 엄폐물이 전혀 없는 불모능선에 배치됐다. 프랑스군의 화력 앞에 그대로 노출됐다. 롬멜과 중대장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참호를 파는 것뿐이었다. 땅이 단단해서 1m를 파는 데 10시간이 걸렸다. 죽기 살기로 땅을 파는데, 프랑스군은 주기적으로 포격을 해왔다.

 

“적 포병은 06시에 포문을 열었다. 우리에게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해왔다. 수많은 포탄이 요란한 폭음을 내며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같이 땅을 진동시켰다. 대부분의 포탄이 시한포탄으로 우리 머리 위에서 폭발했고 그중 몇 개는 충격포탄으로 지면에서 폭발했다. 우리는 날아오는 파편을 피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참호에 바짝 웅크리고 있었다. 적의 치열한 포격은 약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적은 다시 포격을 계속했다. 적은 상당량의 포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군 포병은 포탄이 부족해서 온종일 침묵을 지켰다.”

 

이로부터 며칠 동안 프랑스군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포격을 했다. 롬멜은밤새 안녕 포격이라고 불렀다. 엄청난 포탄 소모량에도 불구하고 깊숙한 참호 덕분에 롬멜군의 희생자는 적었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아랑곳 하지 않고 포탄을 소모했다. 반면 독일 포병은 롬멜이 정확한 적군의 배치도를 보내줘도 포탄 부족 때문에 제대로 포격 한 번 못했다. 단 한 번 프랑스군 포병대의 위치를 포착해서 반격을 가해 포대를 이동시킨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롬멜은 전후 20년이 지난 1937년에 <보병 전술>을 집필했다. 덕분에 독일이 상대적으로 포탄이 부족한 이유를 그때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범은 앙드레 시트로엥(1878∼1935)이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인 시트로엥의 창설자인 그는 네덜란드 출신 다이아몬드 가공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학으로 프랑스 국립공과대학을 졸업한 시트로엥은 자동차 회사에 취직했다. 미국 포드자동차로 견학을 간 그는 포드의 대량 생산 체제에 매혹됐다. 전쟁이 터지자 포병장교가 됐는데 포탄 생산에 포드의 방식을 도입했다. 그 결과 하루 5000발이었던 포탄 생산량이 35000발로 증가했다. 나중에는 하루 5만 발을 생산했다.

 

7배가 넘는 포탄 생산량의 차이는 롬멜이 드퓌 삼림에서 겪었던 포격전에 그대로 반영됐다. 연합군은 막강한 생산량을 배경으로 탄막 포격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전진하는 보병 앞에 포격으로 차장을 쳐서 엄호하는 방식이었다. 최초의 시도였던 솜 전투는 기술과 계산 착오로 참극으로 끝났지만 탄막 포격 전술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연합군의 탄막 포격은 정확하고 치밀해졌다.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바꿀 대량 생산 체제의 힘이었다.

 

첫 번째 교훈은변화. 1차 세계대전은 변화를 낯설어 하고, 변화를 망설이면 어떤 파국이 방문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사례였다.

 

20세기 묵시록

1차 세계대전은 현대의 무기와 19세기 전술, 기병대, 귀족과 신분제가 공존한 전쟁이었다. 그 괴리가진흙 속의 아마겟돈을 낳았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단 4년의 전쟁기간 동안에도 살인기계는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추세라면 다시 세계대전이 벌어지면 몇 천만 명의 육체로도 모자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악몽 속에서 인간은 20세기와 현대문명을 제어할 수 있는 계시도 찾아냈다.

 

첫 번째 교훈은변화. 1차 세계대전은 변화를 낯설어 하고, 변화를 망설이면 어떤 파국이 방문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사례였다.

 

두 번째는 현대적인변화의 조건이다. 변화와 창의는 어느 시대나 성공하는 지휘관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이 요구하는 전술적 변화는 이전의 변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종전이 다 돼서야 참호전은 각개전투에 기초한 전술운용으로만 돌파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리 큰 전장도 모든 전투는 자기 구역에서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돌발 상황에 유기적으로 대처하는 분대, 소대 단위 전투의 결집으로 형성된다.

 

밀집대형에서 각개전투로 변화하기 위해서, 병사 한 명 한 명이 전투의 주역이자 주인이 되는 군대와 훈련방식이 필요해졌다. 기계는 병사를 전투 기계에서 진짜 인간으로 만들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군대든, 기업이든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주도적이고 창의적으로 발휘하게 하느냐는 것이 경영 전략사의 맥락 중 하나였다.

 

기계 문명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1차 대전이 20세기에 남긴 위대한 화두였다. 다만 진흙탕 참호전에서 싹튼 이 깨달음을 꽃으로 피우는 과정, 진정한 교훈과 성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수많은 착오와 대립이 벌어졌다. 우리가 깨달은 진리는 인간은 자동제어식의 생산라인에 주저앉히는 방식이나 정반대로 소위 인간적이라고 간주되는 우아하고 편안한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만으로는 이 이상에 근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애국심, 집단정서, 단합, 추상적 의지와 감성도 생명이 짧다. 교본과 매뉴얼은 잠시 효과적이지만 금세 낡은 것이 되고 아차 하면 구성원의 사고를 멈추게 한다. 창의적이고 자기주도적인 병사를 만드는 방법은 그의 전투 구역을 획정해 주고 전투 구역 안에서 주어진 명령과 목표하에서 창의와 도전을 최대한 허용하는 것이다. 개미처럼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역을 지닌 사자처럼 생존하고 싸우게 해야 병사를 사자로 키울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1차 대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해석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참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겟돈의 전쟁에서도 희미한 계시의 빛을 발견하고 과감하게 그 뒤를 따르는 자는 극소수다. 아마 이것도 1차 세계대전과 100년 동안의 시계가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일 것이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j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1호 Data Privacy in Marketing 2021년 10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