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History Highlight
편집자주
기업의 역사에는 그 기업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나 순간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때의 결단이나 사건의 이면을 살펴보는 과정은 다른 기업에도 큰 교훈을 줍니다. 단순히 ‘어떤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것보다 그 일의 원인과 맥락을 정확하게 분석해 지식의 형태로 만드는 ‘암묵지의 지식화’ 작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국내 유수 기업의 기업역사(社史)를 집필해 온 유귀훈 작가가 ‘Business History Highlight’를 연재합니다.
“이거 알면 늙었다는 증거.”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자주 등장하는 유머다. 연예인 사진이 코팅된 책받침, 문방구에서 팔았던 군것질거리 등의 사진을 올리고 추억에 빠지는 사람은 그만큼 ‘연식’이 오래됐다는 걸 보여준다. 물론 대부분 1980년대 혹은 199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돼 이젠 회자조차 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1950년대까지 연례행사처럼 찾아온 ‘보릿고개’를 경험해본 세대만 기억하는 단어, 바로 ‘마카오 신사’다. 제일모직이 국내 최초로 국산 양복지를 내놓기 전까지 양복을 해 입으려면 마카오에서 밀수한 값비싼 영국산 모직에 의존해야 했다. ‘마카오 신사’의 어원이다. ‘마카오 신사’라는 단어는 그래서 곧장 ‘제일모직’이라는 회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바로 그 제일모직의 간판이 내려진다. 2014년 7월1일 삼성SDI에 합병되면서다. 창업 60주년을 꼭 2개월 앞둔 시점이다.
제일모직 공장 전경.
1954년 7월 초. 삼성물산 도쿄지점의 현지 사원 이치마루(市丸)가 일본통산성 섬유국, 도쿄통산국, 일본양모방적회, 다이도(大同)모직, 다이토(大東)방직 등을 급하게 돌아다녔다. 모방공장의 설비운영에서부터 생산관리, 기술지도, 시장 동향에 밝은 사람을 추천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만한 인물이 뭐가 아쉬워 한국 회사에 가려고 하겠느냐?” 그나마 추천해준 사람이 도후쿠(東北)모직을 이미 정년 퇴직한 하야시 고헤이(林耕平)였다. 이병철 회장을 만난 하야시는 8월2일부터 고문 자격으로 삼성물산 도쿄지점으로 출근했다.
해방 후 마산과 밀양에는 모직물을 짜는 업체들이 있었다. 그러나 설비도 낡고 기술도 턱없이 부족해서 고급 모직물은 생산하지 못했다. 가늘고 촘촘한 양복지는 대부분 홍콩이나 마카오에서 수입 혹은 밀수입됐다. 너무 비싸 일반인들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고급 모직물을 국내에서 생산해 싸게 공급하자!”
이게 제일모직의 시작이었다. 서구에서 기계설비를 구입하고 모직산업이 앞선 가까운 일본의 경험을 빌린 제일모직은 1956년 초부터 고급 털실(장미표)과 고급 신사복지(골덴텍스)를 생산했다. 이병철 회장은 스스로 골덴텍스로 지은 양복을 입고 다니며 국산을 홍보했다.
제일모직이 앞장서 이끌던 국내 섬유산업은 50∼60년대 한국 경제의 맏형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중국 등이 저가 물량 공세를 시작했다. 제일모직은 한발 앞서 직물사업의 업다운 스트림(전방 및 후방 산업 진출을 통한 수직계열화)을 추진했다. 1969년 화섬사업을 시작하고, 1970년 봉제업(패션업)에 진입했다. 또한 업다운 스트림의 연장으로 화섬의 원료인 고순도 텔레프탈산(TPA) 생산을 추진했다. 쉽게 말해 원료를 뽑아내는 석유화학 분야부터 섬유 완제품까지 완전한 체인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제일모직의 미래 전략에 변수가 생긴다. ‘변곡점’이다. 1972년 11월 중화학공업 위주의 제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안이 발표되면서다. 삼성그룹은 이듬해 8월 제2차 삼성경영 5개년 계획(1973∼1977) ‘세계기업으로서의 성장전략’을 발표했다. 제일모직은 그동안 준비해온 석유화학사업 등록증 및 각종 인허가, 권리 등을 1974년 7월 출범한 삼성석유화학에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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