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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과 잭웰치의 팔씨름

김선우 | 123호 (2013년 2월 Issue 2)

 

“기업은 당신 기업이 클지 몰라도 팔씨름은 내가 당신에게 안 진다. 내가 이기면 합작투자법인을 세우는 조건으로 팔씨름을 하겠다. 대신 당신이 이기면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하겠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잭 웰치 전 GE 회장에게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1915∼2001)는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산이 현대와 GE의 합작투자법인(joint venture) 설립안을 협의하기 위해경영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GE의 잭 웰치 당시 회장을 만났을 때 일이다.1 웰치 회장은 “GE는 기술이 있다. 현대는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아산을 압박했다. 아산은현대는 노동력이 있다고 답했다. 웰치 회장은값싼 노동력은 중국에도 널렸다고 응수했다. 아산은 땅, 세금 감면 등 현대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지만 웰치 회장은 “GE가 현대와 합작법인을 세워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화가 난 아산은 자리에서 일어나잘 먹고 잘살아라, XX라고 욕을 하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웰치 회장은 통역사에게 아산이 한 욕을 정확하게 통역해 달라고 주문한 뒤 황당해 하면서 다시 아산을 불렀다.

 

웰치 회장은 다시 돌아온 아산에게왜 욕을 하고 나가버리느냐며 따졌다. 가만히 있던 아산은 엉뚱하게도난 팔씨름(arm-wrestle)을 잘한다. 그러니까 당신 회사(GE)가 우리 회사(현대)보다 클지 모르지만 내가 팔씨름은 당신한테 안 진다라고 말했다. 웰치 회장은그렇게 잘하느냐. 한번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응수했다. 현대그룹 임직원들과 팔씨름은 물론 씨름도 즐겼던 아산의 체력은 국내에서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웰치 회장 역시 대학 때 골프를 친 운동선수 출신이었다. 웰치 회장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산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어서 팔씨름을 한판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아산이내가 이기면 합작투자법인을 세우는 조건이다. 대신 당신이 이기면 하자는 대로 다하겠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끝난 팔씨름은 아산의 승리였다. 아산은 신이 나서우리 조인트 벤처하는 거다!”하고 방을 나왔다. GE 측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산의 이런 돌발행동은 소위무대포 정신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대로 따라하면 실패 확률이 매우 높다. 특히 체력이 약한 비즈니스맨이 이렇게 행동하면 계약 실패는 물론이고 무례하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쓸 수 있다.

 

아산만의 독특한 비즈니스 방식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현대 경영학 개념 가운데즉흥적 역량(improvisational capability)’과 아산의 행동을 연결시켜보면 흥미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즉흥적 역량은 예상치 못한 변화에 즉시 대응해 자원을 재배치하는 학습된 능력을 의미한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역량으로 최근 들어 동태적 역량(dynamic capability)에 이어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학습된 능력이다. 대개 즉흥적으로 한 일의 결과가 좋으면 능력이 아닌 운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즉흥적 역량은소 뒷발로 쥐를 잡는것과 같이 단순한 운이 아니라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의미 있는 내용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말한다. 아산은 500원짜리에 그려져 있는 거북선을 보여주고 조선소를 지을 능력이 있다며 한국의 조선 기술을 의심하는 외국인들을 설득했고, 학력을 묻는 영국의 대출 은행 임원들에게 전날 관광 차 들렀던 옥스퍼드대에서 박사를 받았다고 농담을 하며 위기를 넘기는 등 돌발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항상 탁월했다. 웰치 회장과의 팔씨름도 자신의 불리함을 인식하고 판을 완전히 바꿔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 아산의 즉흥적 역량이 돋보이는 일화다.

 

현대와 GE의 합작투자는 어떻게 됐을까? 웰치 회장은 고심 끝에 결국 약속대로 합작투자를 감행하기로 했다. 팔씨름에서 지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GE와 비교했을 때 삼성은 반도체를 제외하고는 비즈니스 포트폴리오가 비슷하고 행보가 예측이 가능한 반면, 역시 글로벌 기업으로 커가고 있는 현대는 도대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웰치 회장은 합작투자를 핑계 삼아 현대의 사업 방식을 알아보려는 심산이었다. 그가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필자는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인문지리학을 전공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산업부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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