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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정벌:때론 전투 없는 전쟁도 있다

임용한 | 50호 (2010년 2월 Issue 1)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까지는 왜구의 전성기였다. 고려, 중국, 대만, 멀리 필리핀과 말레이시아까지 왜구로 몸살을 앓았다. 왜구가 일본 해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 상인, 밀수업자도 가세한 혼성 집단이었고, 중국 해적들이 왜구로 가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왜구는 왜구였다. 왜구의 근거지는 일본 남단의 큐슈(九州)와 쓰시마(對馬島) 같은 섬들이었다. 왜구는 개별 집단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여러 집단이 모여 연합 함대를 구성하기도 했다. 많을 때는 수백 척, 1∼3만의 대군을 형성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큰 수익을 내려면 내륙으로 진공해야 했는데, 그러자면 제대로 된 군대를 편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418년 왜구는 거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최대 함대를 결성해서 중국 해안 지방을 약탈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세력을 모으고 배를 건조하다 보니 사업이 거창해졌고, 정보가 누설됐다. 왜구에 사로잡혔다가 탈출해온 한국인과 중국인, 기록에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현지에 심어놓은 정보원들이 큰 사건이 일어날 조짐을 보고해오기 시작했다.
 
조선은 대규모 왜구가 요동을 침공할 것 같다는 첩보를 중국에 전달했다. 그리고 평소 방침대로 해안 방어를 강화했다. 1419년 5월 1만 명이 넘는 왜구의 대선단이 요동을 향해 출발했다. 원래 목표가 요동 지방이었으므로 조선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일부 부대가 풍랑으로 낙오했다. 식량과 물이 떨어진 배들이 급수를 위해 상륙했다가 조선군에게 붙잡혔다. 일부 부대는 약속을 깨고 조선 해안을 습격했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즉시 중신 회의를 소집하고 쓰시마 정벌 계획을 내놓았다. 왜구의 주력이 모두 출동한 이 참에 쓰시마를 공략하자는 것이었다. 신하들의 생각은 달랐다. 연안에 전함을 매복시켰다가 돌아가는 왜구를 요격하자고 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방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관료주의의 전형이었다. 왜선은 우리 배보다 빠르고, 원양 항해 능력이 좋아서 조선 함대를 쉽게 우회해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고장 난 배가 아닌 이상 포착이 불가능했다.
 
관료들의 태도에 분노한 태종은 강력하게 쓰시마 정벌안을 밀어붙였다. 전국에서 군사가 소집되었다. 마침내 1419년 6월 19 1만7000여 명의 병력과 65일치 식량을 실은 275척의 함대가 거제도를 출발했다.
 
쓰시마 원정 강행
쓰시마는 가지처럼 길쭉한 섬이다. 중간이 한입 베어 먹은 것처럼 움푹 패여 상도와 하도로 나뉜다. 상도와 하도는 마치 다리처럼 가는 한 줄의 지협으로 이어져 있다. 섬은 꽤 크지만 대부분이 산지이고, 경사가 가팔라서 평지가 거의 없다. 산과 산 사이에 약간의 평지가 발생한 곳에 읍이 세워졌는데, 지금도 읍이 6개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마을은 거의 바닷가 산비탈에 턱받이처럼 땅을 깎아 집을 세웠는데, 집들이 1∼3줄 정도로 서 있다.
 
조선이 쓰시마를 공격 목표로 잡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쓰시마 사람들이 다 해적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전 일본에서 친한파가 제일 많은 땅이 쓰시마였다. 쓰시마는 농사지을 땅이 거의 없어서 늘 곡물이 모자랐다. 무역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본국이 너무 멀었다. 쓰시마에서 한국까지 거리가 약 50km이고, 일본과의 거리는 150km이다. 그러니 쓰시마 사람들은 조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적들의 입장에서도 쓰시마는 꼭 필요했다. 옛날 배는 장기 항해가 힘들어서 중간 기착지가 꼭 필요했는데, 쓰시마에서 한국까지가 당시 배로 딱 반나절 내지는 하루 항해 거리였다. 그러니 모든 해적선들이 쓰시마를 거쳐 갔다.
 
조선은 쓰시마에 원조해주는 대가로 해적들의 단속을 요구했다. 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해적 집단과 주민들과의 관계가 긴밀한 탓도 있었고, 단속할 의지가 있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해적들의 소굴로 알려진 아소만은 해안선이 솔잎처럼 갈라져 있어서 단속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대규모 침공은 쓰시마의 영주와 주민들의 협조와 묵인 없이는 불가능했다. 카리브 해의 해적 마을처럼 해안가에 해적촌도 생겼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침공하면 우리도 너희를 칠 수 있고, 조선의 곡물을 털어간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쓰시마 주민과 해적들의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전투 회피 논란
오후에 쓰시마로 진입한 조선군은 아소만에 있는 두 항구 두지포와 훈내곶을 공략했다. 두지포는 아소만 입구에 있는 포구로 요충인 동시에 해적들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 훈내곶은 쓰시마의 상도와 하도를 연결하는 지협에 있는 포구이다. 조선군은 이곳에 상륙해서 목책을 쳤다고 하는데, 상도와 하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쓰시마 도주 이하 상도의 주민이 완전히 고립되었다. 많은 주민이 산으로 숨어들었지만, 식량을 가져가지 못해 버틸 수 있는 기한이 일주일도 못되었다. 쓰시마의 항복은 시간문제였다. 식량도 충분했고, 조선군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조선군은 상륙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빈 포구와 마을을 공략했다. 나포한 배가 약 2000척, 파괴한 가옥이 약 2000채이며 1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나포한 배 가운데 조선 기술이 탁월한 40척만 끌고 오고 나머지는 파괴했다.
 
그렇게 거의 일주일이 되어가던 6월 26일, 작전 성공을 눈앞에 두고, 조선군 사령부에서 논쟁이 발생했다. 제대로 된 전투를 한 번도 벌이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논란이 시작됐다. 조선군이 전투를 회피한 게 아니라 주민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산으로 도주했기 때문이었지만, 따지기 좋아하는 관료들이 충분히 문제 삼을 만한 일이었다. 무장들도 모두 공격을 망설였다. 결국 제비를 뽑아 상륙군을 정하기로 했다. 당첨된 부대는 박실이 지휘하는 좌군이었다.
 
박실군이 상륙한 곳은 이로군(尼老郡), 현재 지명으로는 니이라는 곳이다. 14세기 이후 쓰시마의 수도는 세 번 바뀌었다. 이곳은 첫 번째 수도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쓰시마의 부촌 중 하나다. 조선군은 니이로 바로 진입하지 않고, 니이와 조금 떨어진 작은 포구로 상륙했다. 상륙지 바로 앞에 쌍무지개처럼 두 개의 산이 걸친 좁은 협곡의 입구가 있었다. 조선군이 출현하자 니이의 주민들은 마을 뒤쪽 산속으로 도망쳤다. 조선군은 그들을 뒤따라 추격하지 않고 뒷길로 돌아가려 했다. 일종의 토끼몰이 방식으로 어쩌면 한 부대가 일부러 니이로 진입해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박실 부대가 반대쪽에서 협곡으로 진입해서 그들을 차단하려는 작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이 협곡은 지금도 겨우 이열 종대나 전진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좁고 위험해서 제정신을 가진 부대라면 도저히 그냥 진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길로 박실 부대는 정찰대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서둘러 진입했다. 얼마 가지 않아 좌측 비탈 우거진 나무 사이에서 매복한 왜군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군의 작전 계획이 유출되었거나 정보가 샌 것이었다. 조선군은 놀랐지만 훈련은 잘 되어 있었다. 일본도를 휘두르는 일본군은 백병전에 강했고, 조선군의 장기는 활이었다. 그래서 왜구가 들이치면 일단 전위는 수비에 치중하고, 후위 부대가 빨리 전개해서 활로 제압하는 것이 표준 전술이었다. 그 뒤가 높은 지역이면 더욱 좋았다. 길이 좁아 좌우 전개는 어차피 불가능했으므로 조선군은 서둘러 우측 비탈로 올라갔다. 그 순간 마치 연발 지뢰가 터지듯이 우측 산 위에서도 왜군이 몰아쳐 내려왔다. 조선군의 작전만이 아니라 전술까지도 정확하게 예측했던 것이다. 놀란 조선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용감한 장수 몇 명이 병사들을 제어하려고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장수 여러 명이 전사했고, 포구로 달려온 병사들은 서로 배에 먼저 오르려고 하다가 배가 뒤집히는 참극마저 벌어졌다. 이 참상을 보면서도 중군은 배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우군의 이순몽이 상륙해서 적을 저지했다. 실록에서는 이 전투의 전사자가 180명이라고 했는데, 좀 축소된 감이 있다. 반대로 일본 측 기록에는 과장이 심해서 수천 명을 몰살시켰다고 되어 있다.
 
이 마지막 날 전투 때문에 쓰시마 원정은 이름만 유명하고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 기묘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마지막 날 전투는 수치스러웠고, 전과라고 해봐야 마을을 불태운 게 전부였기 때문에 자랑스러울 리 없다. 총사령관 이종무는 해외 원정 겸 상륙 작전이라는 엄청난 고난도 과업을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포상도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현장의 몰이해와 명분 집착
쓰시마 원정이 어긋나고 오랫동안 저평가된 원인은 한마디로 현장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었다. 니이 전투의 보고서를 받아든 관료들은 너무나 수치스럽다며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패전 양상만을 보면 조선군은 병사들은 훈련이 안 되어 있고 장수들은 무책임했던 군대였다. 그러나 현지 지형을 보면 그 정도는 아니다. 사전 정찰 없이 사지로 접어든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그 좁은 협곡에서는 아무리 훈련된 군대라도 별다른 대응책을 낼 수 없었다. 포구에서 벌어진 참상을 중군이 보고만 있었다고 했지만, 현지를 가보면 포구가 너무 좁아서 뒤에 있는 함대가 신속히 지원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투를 회피했다는 지적을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전쟁의 승리와 전투의 승리는 다르다. 전투에서 패배해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고, 전투 없이 승리하는 전쟁도 있다. 쓰시마 원정 자체가 전술적 승리보다는 전략적 목적에 주안점을 둔 전쟁이었다. 설령 전투를 회피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실제 전투를 회피했더라도 얼마든지 전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수들은 전투 회피에 대한 비난이 두려워 제대로 지형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니이 전투를 감행했다.
 
오늘날의 경영 현장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경직된 조직일수록 원칙과 규범을 책임 회피와 자기 보호의 방법으로 사용한다. 그렇게 되면 조직의 효율성과 융통성은 떨어지고, 직원들은 자기 보호에 급급해진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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