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파괴적 혁신에 도전하자

23호 (2008년 12월 Issue 2)

세계화로 제조업, 에너지는 물론 금융 부문에서조차 미국의 지배력은 날로 약화되고 있다. 다만 이 와중에도 미국의 독창성과 창의성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이것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창의력보다는 끈질김으로 서구 국가들의 부러움을 받아온 중국 기업들이 더욱 혁신적이고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수 년간 기반을 구축해 오고 있다. 싱가포르 역시 마찬가지다. 핀란드는 내년 경영, 디자인, 공학 부문의 최고 대학들을 통합해 여러 학문을 두루 가르치는 ‘혁신 대학’을 만들 예정이다.
 
전미과학아카데미가 ‘밀려드는 폭풍을 넘어 부상하기’라는 제목으로 2007년에 발표한 600쪽 분량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미과학아카데미 및 전미공학아카데미 이사회는 ‘미국 과학 기술력의 약화가 미국 사회의 경제 상황을 악화시키고, 특히 고급 직업군에 대한 경쟁력을 잠식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요즘처럼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과학·기술·경영 부문의 진보적 생각, 즉 혁신 향방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통념적으로 산업계, 정부, 학계는 위험 부담과 단기 비용이 따르는 부문에 투자를 줄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 혁신을 위한 맥 연구소’의 폴 슈메이커 연구 이사는 어떤 기업에게는 경제 위기가 혁신의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 위기는 다면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출과 이익의 감소는 우선 비용을 삭감해야 한다는 인식을 형성할 것입니다. 이는 혁신에 바람직하지 않지만 환자가 피를 흘리고 있다면 일단 지혈부터 하는 것이 순리겠지요.”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신중한 것 또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많은 조직이 획기적인 ‘파괴적’ 혁신보다 ‘점진적’인 혁신에 너무 의존한다는 것. 혁신의 주기에서 이 둘은 ‘작은 혁신’과 ‘큰 혁신’으로 차별화되어 왔다. “비즈니스에서 커다란 수익은 패러다임과 조직을 뒤엎는 과감한 혁신에서 나온다”고 슈메이커는 강조한다.
 
파괴적 기업
기업에서 ‘파괴적 혁신’을 즐겨 쓴 것은 불과 10년 정도다. 그러나 이는 훨씬 오래 전에 태동한 개념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들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뒷받침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적 혁신’이라는 표현을 차용했다. 이때 당시 그는 이미 이 개념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업가 또는 기업은 어떻게 하면 ‘파괴적’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투자자나 최고경영진에게 급진적인 생각들의 가치를 설파할 수 있을까.
 
알카텔루슨트의 벨 연구소 소장이자 성공한 기술 기업가인 김종훈 소장은 시장에 파괴적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분열적 혁신을 위한 길 열기’라는 제목의 최근 발표에서 여러 제안을 내놓았다.
 
김 소장은 파괴적 혁신이 매우 중요하다는 회사 전반의 인식이야말로 기업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한다. 이미 성공을 거두었거나 관료주의 기업 문화가 강한 회사에서는 이런 인식을 가지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때문에 기업은 연구개발(R&D)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김 소장은 “기술 분야에서 파괴적 혁신이 갖는 의미는 절대적이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단순히 몇몇 명석한 엔지니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유능한 경영진이 없다면 뛰어난 기술은 회사의 연혁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심한 경우 경쟁사가 그 기술을 사용할 것이다. 김 소장은 신기술을 개발했지만 결국 남에게 자신의 위치를 내 준 회사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혁신가들이 쓰는 용어로 ‘다른 사람’이란 ‘재빨리 따라잡는 기업’을 말한다. 즉 자금력이 있고 명민한 경영진을 갖춘 기업은 그 기술의 창안자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 신기술을 맨 처음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유연하고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회사가 오래 살아남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질문이 하나 등장한다. 혁신을 촉진하기에 가장 좋은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일까. ‘와튼, 신기술 관리에 대하여’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슈메이커는 “다양한 의사 결정 수단은 기업이 혁신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도록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슈메이커에 따르면 혁신은 ‘소총’이 아니라 ‘엽총’을 쏘는 것과 같다. 혁신적 사업은 실패율이 높으므로 기업들은 모든 희망을 그에 걸기보다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결과를 다양하게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업계에서 흔해 빠진 격언이 된 ‘주력 분야에 집중하라’는 말은 닷컴 시대에 살아남은 많은 회사들에 적절한 용어였다. 그러나 슈메이커를 비롯한 혁신 전문가들은 주력 사업의 인접 분야를 혁신적 돌파구 마련을 위한 토양으로 삼으라고 주문한다. 주력 사업에만 집중하라는 과거의 접근법을 유일한 길잡이로 삼으면 시대에 뒤처질 수 있다.
 
성장의 빈 곳을 파악하고, 시나리오를 개발하며, 인접 분야를 탐구하고, 블루오션으로의 모험을 시도함으로써 기업은 더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때 투자는 순현재가치(NPV) 평가법과 같은 정석 공식보다 여러 대안과 포트폴리오 전략에 바탕을 두고 이뤄져야 합니다.” 슈메이커의 말이다.
 
와튼스쿨의 메리 베너 교수는 ‘주력 분야에 집중하기’ 신드롬 때문에 많은 대기업이 경쟁사의 위협에 대응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주주나 애널리스트들에게는 급진적 신기술이나 새로운 시장을 향한 기업의 혁신이 회사가 시장의 기대보다 너무 앞서 나가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투자자나 애널리스트들은 기업이 주력 사업에 집중함으로써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하죠. 그 결과 대기업, 특히 안정적인 수익과 배당금을 기대할 수 있는 기업들은 신기술을 개발하거나 급진적 혁신을 추구할 때 주식시장에서 그다지 환영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가 및 시가총액 하락으로 혼이 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베너 교수는 거대 통신회사 버라이존 커뮤니케이션의 사례를 예로 든다. 증권 전문가들은 이 회사가 컴캐스트의 케이블 TV, 초고속 인터넷, 보이스오버 인터넷 폰 서비스 등 3대 야심작에 맞서기 위해 고음량 섬유광학 네트워크(FiOS)에 많은 자본을 투입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주식시장은 혁신이나 기술 변화와 같은 무형자산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이는 규모가 큰 상장 회사에는 급진적 혁신이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이런 혁신이 벤처 캐피털을 바탕으로 한 신생 기업에서는 이뤄질 수 있습니다.”
 
실제 혁신의 아웃소싱은 멀지 않은 미래에 대세가 될 수도 있다. 베너 교수는 특히 제약 분야를 주목하고 있다. “제약업계에서는 소규모 민간 자본으로 세워진 신생 생명공학 회사를 통해 혁신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급진적 혁신의 중심이 대기업에서 소규모 신생 기업으로 옮겨가고 있는 듯 합니다.”
 
기술 혁신을 위한 맥 연구소 공동이사이자 ‘와튼, 신기술 관리에 대하여’의 또 다른 공동 저자인 와튼스쿨의 조지 데이 마케팅 담당 교수는 상품 개발에서 떠오르는 트렌드인 이른바 ‘공개 혁신(open innovation)’에 주목한다. ‘다수 아웃소싱(crowd sourcing)’이라고도 불리는 공개 혁신은 사업상 문제 해결을 위해 파트너들과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공개 혁신의 원형 기업은 매사추세츠주에 본사를 둔 이노센티브다. 이 회사는 과학, 공학, 경영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색자’들을 전 세계의 아마추어 ‘해결사’들과 연결시켜 준다. 이후 ‘해결사’들은 이 기업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최선의 답을 제공하려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한다. ‘해결사’들이 답을 도출하려고 경쟁하는 이유는 남에게 자랑하거나 상품권을 받기 위해서다.
 
기업들은 대부분 깜짝 놀랄 만큼 혁신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을 찾듯이 간단하고 빠른 방법을 원합니다.” 데이 교수의 말이다.
 
김종훈 소장은 “언제나 내부에서만 비법을 찾아내고자 하는 기업에는 과거의 성공이 혁신의 거대한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성공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굳건한 패러다임을 구축한다. 이렇게 꽉 짜인 틀 안에서는 새로운 사고가 생겨나기 어렵다.
 
김 소장은 이를 ‘지식의 저주’라고 부른다. 그는 다양한 부문의 사람들로 팀을 구성하는 것이 지식의 저주를 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경험이 풍부한 상급 직원과 경험은 부족하지만 문제 해결에 신선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직원을 한 조로 만드는 ‘경험조’ 또한 한 방법이다.
 
김 소장은 파괴적 혁신을 위한 커다란 기회가 정보 과부하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현재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정보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사상 유례없이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끊임없이 광대한 양의 정보를 걸러내고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김 소장은 강의를 듣던 학생들에게 고전적 심리 실험을 연상시키는 영상을 보여 줬다. 흰 옷을 입은 팀과 검은 옷을 입은 팀이 야구공을 드리블하고 패스하기를 반복하는 영상이다. 학생들은 검은 옷을 입은 선수들이 패스한 횟수를 세어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때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화면의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지만 많은 학생이 이 사람을 알아채지 못했다. 학생들은 그 사람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말한다. “여러분 모두가 고릴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고릴라의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한 반면 어떤 사람들은 놓쳤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7시간 동안의 급류 타기
파괴적 기술’이라는 용어는 미국 하버드대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교수의 저서 ‘혁신가의 딜레마’가 출간된 1990년대 후반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경영 현장에서는 1925년 AT&T와 웨스턴 일렉트릭의 합작회사인 벨 연구소의 창립 이후 줄곧 쓰여졌다. 파괴적 기술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파괴적 혁신의 인큐베이터다.
 
뉴저지에 본사를 둔 벨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여섯 차례나 노벨상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혁신의 보고로 인정받고 있다. 광전지, 실리콘 트랜지스터, 통계절차관리, 유닉스 운영체계, C 프로그램 언어, 디지털 휴대기술 기술, 무선 지역 네트워크 등은 벨 연구소가 그 동안 고안해 낸 수많은 혁신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김 소장은 요즘 벨 연구소 연구원들이 이와 유사한 획기적인 기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압을 가하면 모양이 바뀌는 액체 센서도 그 예다. 김 소장은 이 센서가 줌 렌즈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들은 또한 3차원 영상을 만들기 위해 나노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흔히 본 3차원 홀로그램 이미지가 현실에서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기술을 구현할 수 있어요. 단지 비용 효율이 낮을 뿐입니다.”
 
김 소장은 기존의 정체된 기업 문화에 어떻게 파괴적 혁신 정신을 주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카텔과 합병하기 이전의 루슨트 테크놀로지 사례를 들었다.
 
루슨트의 광학 네트워크 부서는 실적이 형편없었다. 회사는 이 부서의 최고관리자들을 해고했다. 김 소장은 “제가 그 부서에 투입된 것은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었고, 누군가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고 말했다.
 
실제 그 부서는 거의 빈사 상태였다. 실적은 저조했으며, 구성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김 소장은 관리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급류 타기를 할 수 있는 휴가지로 데려갔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우리가 이걸 왜 해야 하죠’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따분함을 느끼고는 마지못해 급류 타기를 하기로 동의했죠. 이 운동은 팀워크와 협동심을 고양하기 위해 한 심리학자의 도움을 받아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협동하지 않았습니다. 협동은커녕 각자 물을 퉁기며 노를 젓더군요. 마치 어린아이들 같았습니다.”
 
운동심리 실험은 급류 타기를 다 했을 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6, 7시간 동안 급류 타기를 하고 난 뒤 사람들은 지쳤다. 그날 저녁 모든 사람은 경계 상태를 해제하고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 다음날에는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업무 관련 전략 회의가 이어졌다. 김 소장은 이때 관리자들이 서로를 거의 모르던 이전의 회의보다 훨씬 진지하고 생산적인 상호 의견교환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회의 이후 첫 번째 분기에 이 부서는 5억1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그 다음 3분기 동안 부서 매출은 각각 5억6000만 달러, 7억3000만 달러, 9억7000만 달러로 증가했다. 팀워크가 기업의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는 실화다.
 
파괴적 혁신에 불을 붙이기 위한 방법으로 김 소장이 들려준 제안은 사실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기업이 분기별 실적에 집착하고, 근시안적 사고만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실제 단행하는 기업은 매우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벨 연구소 또한 곧바로 활용 가능한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예외일 수 없다. 최근 알카텔루슨트는 하반기 동안 연구소의 기본적인 물리 실험을 위한 비용 지원을 중단했다. 이는 세계 과학계에 큰 충격을 던져준 사건이었다.
 
기초과학 연구는 가장 근본적인 과학적 질문들을 다루기 때문에 금방 상용화시킬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민간 항공기,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레이저 등 오늘날 우리가 혜택을 누리고 있는 대부분 기술의 토양을 제공해 왔다.
 
김 소장은 강조한다. “자본, 인간의 지식, 사람들 간 네트워킹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번역 이유진 krazylois@naver.com
동아비즈니스리뷰 318호 Dynamic Workspaces 2021년 04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