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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기 기업 경영의 진화

수동적 준법 아닌 능동적 전략으로

김은환 | 374호 (2023년 0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디지털 시대, 기업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빠르게 변하는 유동적 법 환경 속에서 컴플라이언스를 ‘정해진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란 사전적 정의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 법적 대응 그 자체가 전략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며 기존 사업 및 기술 전략과 긴밀하게 연계할 필요가 있다. 기업은 내부에서 반대 목소리가 자유롭게 나오고 이를 경청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 법적 리스크를 발생시키는 가장 고질적인 원인인 집단 사고를 막아야 한다. 또한 법무를 변호사에게 일임하지 말고 경영자가 주도적으로 계약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수동적인 준법이 아닌 법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과 깊이 있는 고민을 통해 기업 실정에 맞는 컴플라이언스 전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디지털의 기회와 법적 리스크

디지털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단순히 경영 전략, 비즈니스 모델 또는 소비자 행태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변화에는 법적 규범 문제가 얽혀 있다. 디지털 시대는 법적 분쟁의 시대가 될지 모른다. 최근 빅테크 기업들의 법적 리스크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데이터 이용과 관련한 개인정보 보호 이슈, 플랫폼 확장에 따른 독과점 규제 이슈, 데이터센터 관련 환경 이슈, 인공지능 서비스 관련 차별 이슈 등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한다.

그 원인은 법을 제정할 때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문제가 자꾸 발생하기 때문이다. 수정란을 다른 사람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대리모 기술은 친권에 대한 법률을 곤혹스럽게 한다.1 심폐소생기가 등장하면서 심정지를 죽음으로 규정하던 사망에 대한 법률 역시 한계에 부딪힌다.2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이런 사례들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1984년 소니의 비디오 레코더가 등장하자 방송사들은 저작권 위반 소송을 제기했다. TV 프로그램을 간편하게 복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영상물 불법 유통의 가능성이 커졌다는 이유였다. P2P 기술을 이용한 사용자 간 음원 공유 서비스 업체 냅스터는 2000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미국 음반업협회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역사적으로 신기술과 이를 이용한 기상천외한 비즈니스 모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존의 법망을 뒤흔들어 왔다.

디지털 기술의 미래가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법적 혼란이다. 법적 혼란과 이로 인한 분쟁으로 인해 기술 발전의 성과를 온전히 향유하기는커녕 혁신 자체가 정체되거나 더 심하게는 침체에 빠진다는 것이다. 지식재산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출범한 ‘특허 괴물’들이 법적 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리면서 건전한 혁신 활동마저 저해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다른 우려는 인공지능(AI)이 확산되면서 발생하는 각종 사고, 부작용의 책임 소재 문제다. AI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면책 수단이 돼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개발자나 알고리즘 설계자를 엄격하게 처벌할 경우 혁신이 위축될 수 있다.

이런 사례들에 대비하기 위해 컴플라이언스 업무, 즉 준법 관리에 대한 기업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2000년 금융기관에 대해 ‘준법감시인 제도’가 법제화됐으며 이후 의무 조항이 아님에도 많은 비금융 기업이 준법감시인과 관련 조직을 설치하고 있다. 2020년 삼성그룹에도 ‘준법감시위원회’가 출범했다. 최근 ESG가 부상하며 컴플라이언스가 기업 경영 성공의 핵심 요건이라는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역부족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많은 법적 판단이 지속적인 논란 속에 있으며 한번 내려진 판단조차도 중요한 사건이나 정치, 여론의 지형 변화에 따라 재검토되고 변화한다. 디지털 시대, 기업의 컴플라이언스가 까다로운 이유다. 법이란 행위의 규범이고 방향을 가르쳐주는 나침반이다. 만약 나침반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지 못하고 흔들린다면 기업은 어떻게 항로를 유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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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유동성, 기술 변화에 따라 법도 변한다

KPMG 파트너 카이 제이컵은 책 『유동적인 법(Liquid Legal)』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요동하기 때문에 법률 전문가들은 단순히 법률 지식에 천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변호사들이 법률 영역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앞으로 법률 자문이 해당 사안을 잘 아는 다른 분야 전문가의 영역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는 법률 전문가뿐만 아니라 경영자가 고민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주요 경영 저널에서 다루는 경영 관련 기사의 45%가 법 관련 이슈인 데 반해 경영자들이 법적 문제를 다루는 시간은 전체 근무시간 중 적게는 5%에 불과하다는 보고도 있다.3 이런 괴리는 경영자들이 법률문제를 변호사 자문에 맡기고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법적 유동성 때문에 변호사들마저 위기의식을 느낀다면 과연 경영자들이 법무를 변호사에게 맡기고 경영에만 전념할 수 있을까.

이제 법적 문제는 경영 전략이 수립, 실행되는 과정에서의 부수적인 유의 사항 정도로 다뤄질 일이 아니다. 최초의 전략 기획 단계에서부터 법률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모바일 인터넷 시대를 주도하는 기업 퀄컴은 전략과 법 대응을 긴밀하게 연계한 모범 사례라고 할 만하다. 퀄컴은 아날로그 통신이 디지털 통신으로 전환되는 패러다임 교체기에 표준 경쟁에 뛰어들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이미 TDMA(시간분할방식)4 가 표준으로 자리 잡는 상황에서 퀄컴은 CDMA(코드분할방식)5 기술로 추격에 나섰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TDMA 진영이 이미 유럽에서 표준으로 채택됐고 대규모 통신사도 참여를 확정한 반면 CDMA는 기술만 있을 뿐 이를 뒷받침할 장비, 인프라, 디바이스 등이 부재했다.

퀄컴은 협력 업체를 구하는 동시에 직접 제조를 시작했다. 통신기술 전문 업체가 갑자기 장비나 디바이스를 제조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다. 하지만 퀄컴은 계획이 있었다. CDMA 기술이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실물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막대한 비용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퀄컴은 제조 과정에서 개발한 각종 기술과 부품 관련 특허를 빠짐없이 취득했다. 결국 추격 전략에 성공했고 CDMA 기술이 표준이 된 후 이를 채택하는 모든 기업들은 퀄컴에 기술 이용료를 꼬박꼬박 납부했다.

모바일 생태계에서 ‘갑 중의 갑’이라고 인정받는 애플의 아이폰마저 ‘퀄컴세(稅)’라는 특허 요금을 내고 있다. 애플은 이것이 억울했는지 퀄컴의 특허에 대해 무효 소송을 제기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퀄컴은 초기 개발 단계에 이미 이런 국면을 예상해 주요 기술 특허를 모두 취득하고 이후에도 특허 분쟁에서 이기기 위해 경영진과 법무팀이 긴밀하게 협조했다.6 그 결과 2019년 기준 라이선스 수입으로 11조5000억 원을 올렸으며 이는 전체 매출의 40%에 달한다. 정기적으로 알짜 수입이 입금되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7 경영 전략과 법적 대응이 최적의 조화를 이룬 사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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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플라이언스,
수동적 준수 아닌 능동적 전략

디지털 사회가 도래하며 많은 법적 문제가 명확한 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채 계류 중이다. 한 번 내려진 판단조차도 중요한 사건이나 정치, 여론의 지형 변화에 따라 재검토되고 변화된다. 기업은 이런 유동적 법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 핵심은 공감과 시대정신이다. 기업이 사회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공감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시대정신이 중요하다.

1928년 미키마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가 발표된 당시 저작권 인정 시기는 최대 56년이었다. 이후 디즈니는 저작권 만료 시점이 다가올 때마다 법 개정을 위한 로비를 통해 저작권 인정 시기를 늘려왔다. 1998년 디즈니는 2003년 만료를 앞두고 다시 한번 전방위 로비에 나서 기존의 ‘사후 50년’ 규정을 ‘사후 70년’으로 바꿨다. 법 개정을 주도한 하원의원의 이름을 따 ‘소니보노법’으로 불린 이 법은 실제로 ‘미키마우스법’으로 불렸다. 세계적인 캐릭터 중 늘 수익 1~2위를 차지한 미키마우스였기에 디즈니가 저작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소니보노법에 의해 연장된 저작권이 만료되는 2023년, 대중은 디즈니가 다시 한번 로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디즈니의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미키마우스의 저작권은 올해로 만료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왜 디즈니는 막대한 캐릭터 수익을 포기했을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디즈니가 시대정신의 변화를 읽고 더 이상의 연장은 무리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과 유튜브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미키마우스의 저작권은 일반적인 디즈니 팬들과는 크게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이용하는 기업이나 상인들의 관심사였다. 이들은 미키마우스 캐릭터가 상품 가치를 올려주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지불하는 데 그리 민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서 모든 개인이 콘텐츠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시대가 도래하며 이미지, 캐릭터, 음원의 저작권은 만인의 관심사가 됐다. 어린이와 가정에 꿈과 행복을 준다는 디즈니의 이미지와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업 행위 간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디즈니는 멈출 줄 아는 지혜를 발휘한 게 아닐까.8

기업은 시대정신의 변화를 읽고 기존의 법에 의지해 낡은 관행을 유지하기보다는 한발 앞서 선제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제는 준법경영이 아닌 ESG 경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9 특히 탄소 배출, 중대재해, 녹색금융, 사회정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어적 준법이 아닌 적극적 윤리경영을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도 들려온다. 사회적 눈높이가 현행 법률보다 더 높은 기준으로 상향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컴플라이언스를 이미 정해진 규범에 어긋나지 않도록 순응하는 사전적 정의로만 이해해선 곤란하다. 법적 대응 그 자체가 전략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며 기존 사업 및 기술 전략과 긴밀하게 연계할 필요가 있다. 법적 대응을 경영 전략의 필수 요소로서 통합한 퀄컴이 좋은 예다. 경영 전략과 법 대응이 어긋나면 혼선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 또 법을 도외시하거나 전문가에게 일임하는 태도로는 디지털 경제를 헤쳐 나가기 어렵다.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기 전에 관련 법을 검토하고 적극적,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10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집단 사고를 피하라

한 기업이 어처구니없는 불법 행위를 저지를 때는 회사 내 집단 사고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국민 아침 식사’라 할 수 있는 시리얼의 대표 기업 켈로그는 자사 제품이 학생들의 학습 능력에 도움을 준다는 광고가 허위 과장으로 판명되면서 고객들에게 400만 달러를 배상해야 했다. 시리얼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실시된 실험에서 비교 대상 집단이 다른 종류의 식사를 한 학생들이 아닌 아침 식사를 거른 학생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11 즉, 켈로그의 효과가 아닌 일반적인 아침 식사의 효과를 입증한 셈이다. 이 실험이 회사 광고로 홍보될 수 있었던 것은 사내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반론의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규제 기관이 개입하기 전에 내부 프로세스에서 먼저 문제가 제기되고 타당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의 준법 경영을 위해 ‘내부의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2010년 미국은 비리 제보 보호법인 ‘도드-프랭크법’을 입법했다. 이 법은 직원의 내부 고발을 보호하고 고발 결과 발생한 기업 배상액의 10~30%를 고발자에게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현대자동차의 엔진 결함을 제보한 김광호 씨가 이 법에 따라 포상금 285억 원을 받았다.12 내부 고발은 결함을 숨겼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사고와 손실을 예방해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 고발이 회사 평판과 신뢰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더 나은 방법은 문제가 대외적으로 노출되기 전에 내부에서 공론화되고 개선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애사심, 충성 등으로 강요되는 집단 사고를 피해야 한다. 기업의 법적 리스크를 발생시키는 가장 고질적인 원인이 한 방향만을 지향하는 집단 사고 경향이다. 이를 막기 위해 ‘목소리를 내라(speak up)’고 장려하는 내부의 자율적 견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는 ESG 경영에서 ‘G’, 즉 지배구조 개선과도 관련이 깊다. 프랑스 파리7대학의 앙투앙 르브뢰 교수는 주주 중심의 지배구조에서 내부 경영진의 책임을 중시하는 체제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3 이처럼 외부 규제 기관이나 언론이 아닌 조직 내부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이를 경청할 수 있는 조직 문화는 준법 경영을 지탱하는 필수 기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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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약을 변호사에게 일임하지 마라

한때 하나의 기업이 주요 사업을 필두로 상하위의 관련 사업은 물론 부대 기능들까지 모두 통합할 기세로 확장하던 시대가 있었다. 사원 식당이나 숙소는 물론 병원, 호텔, 학교, 어린이집까지 말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구조조정과 다운사이징의 물결은 기업의 밸류체인을 지속적으로 분할하고 있다. 조직보다는 시장 메커니즘이 우세해지고 있는 것이다.

위계 조직이 우세할 때는 경영 리더들의 판단과 명령이 중요했다. 그러나 시장 거래가 우세할 때는 경제 활동의 핵심 수단이 명령에서 계약으로 바뀐다. 비정규직 직원만 해도 원칙적으로 회사가 업무 명령을 내릴 수 없다. 협력 업체도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경영은 조직 구성원에 대한 명령이 아닌 조직 외부의 독립 주체들, 가령 협력 업체, 스타트업, 전문 프리랜서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외부와 협력하기 위한 수단은 바로 계약이다. 상사가 부하에게 재량에 따라 즉흥적으로 내릴 수 있는 명령과 달리 계약은 대등한 주체 간의 상호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과 잠재 리스크를 수반한다. 계약을 소홀하게 다루거나, 특히 변호사에게 계약과 검토를 일임하는 것은 눈을 감고 길을 걷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이다.

계약의 중요성을 일깨운 최근 사례는 2022년 11월 1심 판결이 내려진 현대산업개발과 아시아나항공 간 매각 무산에 따른 계약금 반환 소송이다. 현대산업개발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기로 하고 인수 금액의 10%를 계약금으로 걸었는데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 상황 변화로 인해 계약이 무산된 후 계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를 두고 법적 다툼이 일어났다. 실제로 거액의 계약에서 예기치 않은 상황 변화가 있을 경우 계약을 변경할 수 있는 ‘중대악화사유(Material Adverse Change, MAC)’가 법적으로 인정된다. 문제는 코로나19로 인한 항공 산업의 악화가 중대악화사유인가에 대한 판단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적극적인 계약서 작성이다. 천재지변, 불가항력, 중대악화 등의 애매한 표현으로 기재된 계약서와 조금 더 구체화된 계약서는 완전히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법률 전문가는 계약서 문구, 특히 ‘불가항력’ 같은 표현에 대해 “맞춤 양복을 산다는 느낌으로 사업 내용에 적합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14 현대산업개발도 계약서 조항의 중대악화사유에 대해 “감염병 등의~”라고 예시 문구를 삽입했다면 실제 패소한 1심 재판 결과와는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개방적 혁신, 전략적 제휴 등의 수평적 협력이 중요해지는 경영 환경에서 경영 관리자의 역할은 계약을 잘 관리하는 것이다. 계약이란 협력의 설계도이자 시나리오이며, 계약서 작성은 법률가에게 떠넘길 서류 작업이 아니다. 계약서의 토씨 하나, 문장 부호 하나로 수백~수천억 원이 좌우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쌍방 합의된 계약은 다른 모든 법률에 우선된다. 변호사로부터 도움을 받되 계약서의 기획부터 최종 문구 조정까지 경영자가 주도해야 잠재 리스크를 예방할 수 있다.

3. 법 정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라

앞서 강조했지만 디지털 시대의 법은 유동적이다. 기업이 스스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카르푸의 ‘블랙슈퍼마켓’이 흥미로운 사례다. 유럽의 농부들은 자신의 밭에서 스스로 종자를 개량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현대에 들어 불가능해졌다. 거대 기업들이 종자 시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제도를 개편해 자생적으로 등장하는 종자의 유통을 막았던 것이다. 소농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실험 설비가 필요한 검증 절차가 제도화되면 새로운 종자를 시장에 내놓을 길은 자연스럽게 막힌다. 유통 대기업 카르푸는 이 조치가 식품 안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기업의 횡포라고 판단했다. 결국 유럽연합의 규정을 위반하며 농민들의 개량종 농산물을 판매하는 코너를 마련했고, 이는 블랙슈퍼마켓이라고 불렸다.15 카르푸는 농민들의 종자 유통을 막는 제도가 농민이나 소비자보다는 대기업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대기업의 유전자 조작에 비해 농민들의 종자 개량이 훨씬 안전할뿐더러 생태계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농민들의 종자를 유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다.

카르푸는 불법 행위를 통해 제도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물론 충분히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다는 사전 검토가 있었고 블랙슈퍼마켓에 농산물을 납품하는 농민들의 사진을 매장에 설치하는 등 과감한 홍보를 통해 여론의 지지도 끌어냈다. 이후 소비자들의 호응과 함께 법 규정을 개정하라는 서명 운동이 시작됐고 기업이 주도하는 일종의 시민운동 양상이 나타났다. 결국 유럽 의회가 유기농 규제 법안을 개정하며 농민들의 개량종 경작과 판매를 허용했다. 이는 기업이 농민, 소비자, 시민들의 선두에서 법 개정을 이끌어낸 인상적인 사례다. 이처럼 전략적 컴플라이언스는 더 이상 수동적 준법이 아니다. 위 사례에서 보듯 때론 위법이 최적의 컴플라이언스 전략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법에 대한 적극적이고 깊이 있는 고민을 통해 기업 실정에 맞는 컴플라이언스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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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법전이 아닌 공감과 시대정신에 있다

컴플라이언스는 경영 전략의 핵심 고리(link)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경영자는 법을 특수 영역으로 보고 전문가에게 일임하려는 태도를 극복해야 한다. 법 조문의 세세한 디테일을 숙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조문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경영자가 읽어야 할 것은 시대정신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해관계자들과의 공감대를 추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진정한 공감을 얻는다면 유동적 법 환경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컴플라이언스의 모습은 법전이 아닌 공감과 시대정신에 있다.
  • 김은환 | 경영 컨설턴트·전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장

    필자는 경영과학과 조직이론을 전공한 후 삼성경제연구소(현 삼성글로벌리서치)에서 25년간 근무했다. 근무 중 삼성그룹의 인사, 조직, 전략 분야의 획기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현재 삼성 계열사 전체가 사용하고 있는 조직 문화 진단 툴을 설계하기도 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작가 및 컨설턴트로서 저술 활동과 기업 및 공공 조직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2019년에는 저서 『기업 진화의 비밀』로 정진기언론문화상 경제·경영도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격변기를 맞아 기업과 전략의 변화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serike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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