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과 국가브랜딩

구세주 미국, 대동아공영 일본, 억척같은 중국···전쟁의 끝, 국가 브랜드를 낳다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마케팅, 인문학

 한 대륙을 넘어서 여러 대륙의 국가들이 참여한 세계의 전쟁으로 1차 대전은 국가들의 브랜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외부에 보이는 국가의 이미지가 바뀌거나 국가적인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미국은 자칭타칭정의의 수호자내지구세주로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자기 멋대로 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프랑스의마지노선은 전략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특유의 미학적 포장술로 인해 긍정적 이미지를 획득했다. 영국은잃어버린 영광의 대명사가 됐으며, 중국과 일본은 각각더럽고 험한 일도 마다 않는 사람들탈아시아를 꿈꾸다 엇나가 버린 2차 대전 전범국이 돼 버렸다. 이러한 국가브랜딩과 이미지 형성이 100년 후를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빠르게 확 변하지 않는다. 트렌드 읽기라는새로움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은연속성을 깨달을 때 제대로 성과를 낸다. 바로 역사라는 큰 호수가 우리 앞에 있다. 100년이 지난 옛날의 사건이 아닌 끊임없이 신선한 물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1차 대전은 서구 제국을 넘어 동아시아 현재에도 살아 있다.

 

많은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 붉은 꽃

[萬綠叢中 紅一點(만록총중 홍일점)]

사람을 움직이는 봄빛 많은들 무엇하리

[動人春色 不須多(동인춘색 불수다)]

 

왕안석(王安石)詠石榴花(영석류화)’란 시 구절이다. 사람들의 춘심을 자아내는 것은 산을 덮은 푸른 잎들이 아닌 그 가운데 핀 한 송이 붉은 꽃일지 모른다. 브랜드가 그러하다. 기업이나 국가의 모든 것을 담고 나타낼 수는 없다. 어느 한 부분을 부각시키고 그것과 결부시켜 해석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브랜딩은 견강부회의 행위로 치부되기도 한다. 1차 대전이라는 역사의 큰 흐름을 사소한 해프닝이나 소수 특정 인물로 일반화시킨다는 비판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원컨대 국가의 브랜드가 형성되거나 바뀌는홍일점 1차 대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찾아보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영국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Great war’라고 부른다. 더 큰 규모의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어도 ‘Great’란 형용사는 1차 대전의 몫이었다. 엄청난 인명손실을 포함해 심대한 영향을 끼친 문자 그대로큰 난리란 의미도 있겠으나 ‘Great Britain’이란 명칭에서와 같은 향수가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프랑스어로 1차 대전은 ‘a première guerre mondiale’란 지극히 건조하고 객관적인 명칭으로 불리는데 ‘première’ ‘premium’으로 읽히며 역시나 향수나 자부심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2차 대전 전까지 1차 대전을유럽전쟁(European War)’이라고 했다. 유럽으로 지역을 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땅 바깥과는 거리를 두고 싶었던 미국의 전통적 고립주의의 영향이 읽히는 브랜딩이다. 2차 대전으로 자신들도 세계 정세의 사슬 속에서 떨어져 있을 수 없고 적극적으로 지도적 국가의 역할을 자임하며유럽전쟁이라는 용어도 ‘1라는 보편적인 용어로 바뀌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대전(大戰)’ 앞에 굳이세계(世界)’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은 자신들의 존재까지 그 전쟁을 통해 부각시키려 한 것은 아닐까? 1차 대전은 한 대륙을 넘어서 여러 대륙의 국가들이 참여한 세계의 전쟁으로 국가들의 브랜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곧 외부에 보이는 국가의 이미지가 바뀌거나 국가적인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그런 궤적이나 편린을 브랜드적인 관점에서 짚어 봤다.

 

자칭타칭의구세주(Savior)’ 미국

“우리가 미국을 좋아하는 것은 국토가 크고 인구가 많기 때문이 아니요, 자원과 부력이 세계에서 제일 가기 때문도 아닙니다. 미국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1924년 미국 상원과 하원 의원들로 구성된극동시찰단이 베이징을 거쳐서 도쿄에 갈 때 서울에 들렀다. 이들 미국의원단의 방문이 일본의 야만적인 식민지 통치 상황을 바깥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로 여겨져 상하이 임시정부부터 시찰단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려 노력했고,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환영단과 환영 대회를 조직했다. 앞의 문구는 환영단의 대표 자격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이 했던 환영사의 첫머리다. 사실 이 환영 행사는 시찰단 의원 중 딱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미국의원단에 당시 일제하의 조선 땅에 체류하는 일정이 만 하루, 예스런 표현으로 ‘1주야에 불과했다. 그나마 조선총독부에서 환영 행사를 주도하면서 미국 의원단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의전 테두리 내에 묶은 상태였다. 총독부는 미국의원단에게 조선인이 하는 환영 행사와 같은 집회에 가면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YMCA에서 혹시나 하며 미국의원단을 기다리던 800여 명의 조선 청중이 흩어질 때쯤 미국 의원 하나가 조선인들이 준비한 환영 행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독자 행동으로 그 건물에 찾아왔다. 그 의원 하나로 청중들이 다시 모이고 환영 행사가 벌어지면서 월남 선생이 위의 환영사를 한 것이었다. 이 행사마저도 40명의 경찰에 의해서 바로 해산되고 말았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찍이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에 주재하기도 했으니 당시 조선에서 미국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의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재 선생이 미국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형성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젊은 시절 주미 공사관 시절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환영사에서자유로 수렴된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부분이 한 축이다. 또 서울 YMCA의 총무로서기독교가 다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한몸에 체현한 인물이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정치무대에 등장했으니 바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으로 태어났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875년에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조망한 그의 책 <제국의 시대>에서 그 시대 세계 경제의 특징을 7가지로 제시했다.

 

1) 지리적 기반의 확대

2) 국가 간 경쟁의 다원주의 시대

3) 의약, 가전, 운송 부문에서의 기술혁명

4) 기업 트러스트의 형성과 과학적 경영기법의 대두

5) 대량 소비의 등장

6) 서비스 산업의 성장

7) 정치와 경제의 수렴

 

이들 7가지 모두에서 미국은 20세기에 접어들며 선도적인 모습을 보였고 1차 세계대전은 선도성을 다른 연관된 국가들에 강력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줬다. 헨리 포드는 이런 모든 경향을 집대성해 실천하고 가장 크게, 오래 파급시킨 미국인이다. 미국이 경제 부문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170만 명의 미군이 1918년부터 프랑스 땅에 발을 디뎠다. 참전 기간이 길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지만 미군들의 전투 사상자 총수는 약 5만 명으로 유럽의 다른 참전국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막강한 경제력과 1차 대전을 끝낸 군사력을 등에 업고 각 민족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까지 갖춘 구세주로서 윌슨이 등장했다. 선교사, 학자, 원조자, 온화한 총독에 이르기까지 그는 미국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미지의 원형을 갖고 있었다. 윌슨 자신이 그런 다양한 역할을 좋아했다. 미국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역할을 자임했다. 단지 자신들의 이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윌슨이 휴전 후 세계를 재편하는 강화조약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유럽에 간다는 소식에 미국이 들끓었다. 미국 대통령이 국외를 방문한 경우가 전무했던 것이다. 그는두 번 다시 청년들의 목숨을 희생으로 요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직접 참가를 주장하고 관철시켰다. 그리고 미국 대표단은 미국이 아닌 인류를 대표하고 있으며 인류를 위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미국이 확립하는 게 좋든 싫든 신이 미국에 내린 의무라고 설파했다. 민족자결주의라고 불리는 윌슨의 14개 조는 1918년 초에 이미 미국 내에서 천명된 것으로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우리의 3·1독립선언과 이어진 항쟁 및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줬으나 한편으로 이상주의적인 항목 뒤에 현실적인 제약요소가 가득 차 있고 실행에서는 문제점들이 더욱 불거진다는 것을 약소국들이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이중성이 미국의 브랜드 이미지로 연결된다.

 

윌슨은세계가 걸어온 길에 적대하는 공산주의의 해독을 물리치는 정화작업이 자신과 미국에 주어진 의무라고 했다. 각을 세우고 물리칠 대상을 정해 정의의 사도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미국의 전형적인 방식이 됐다. 공산주의는 냉전시대 훨씬 이전부터, 이미 1차 대전 때 미국에 의해 인류의 적으로 규정됐던 셈이다. 이후는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이상재 선생이 강조했던자유가 도덕적 명분의 기틀이 됐다. 자유를 억압하는, 곧 인권문제를 야기하는 독재의 종식이 미국이 다른 국가들에 관여하는 명분이 됐다. 미국 자신의 원칙에 의거해 관여 여부가 정해지는 것 같았다. 이는 오만한 미국이란 브랜드 이미지로 이어진다. “우리가 이렇게 도와주는데 어떻게반미구호가 나올 수 있느냐는 미국의 볼멘소리는 진정한 안타까움과 의문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의문의 소리가 심해지면 미국 내의 여론이 갈라진다. 좋게 말하면 그만큼 언론의 자유가 있고, 사회의 다원성을 반영한 것이랄 수도 있다. 브랜드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자국 내에서의 인터널 브랜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고립주의와 참여주의의 대립으로 윌슨이 주창한 국제연맹에 정작 미국이 참여를 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의 불참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국제연맹의 존재감은 2차 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까지 얘기된다. 미국에서 참여주의와 고립주의의 대립은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다. 일본이 강행한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자 대립은 해소됐지만 말이다. 베트남전에서 소위 국론분열은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미국은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는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난다면 단결하나 그러지 않을 때는 온갖 소리가 나온다. 윌슨은 미국 내부 브랜딩에 실패했다. 그런 실패는 국제연맹의 건에서 보듯 결국 밖에서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결국 윌슨은 실의 속에 병들어 죽었다. 구세주로서의 이상주의자지만 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큰 재앙을 잉태한 정치가라는 평가가 그에게 씌워졌다.

 

다양성 속의 경직 - ‘마지노선의 프랑스

파리강화회의 의장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아니었다. 1차 대전의 주전장이 됐고 회의가 열리는 곳인 프랑스 대표단의 수석 대표인 조르주 클레망소(George Clemenceau)였다. 윌슨을 직접 만나기 전에 먼저 윌슨이 제창한 14개 조를 보고 그가 했다는 말이 남아 있다.

 

“신() 10가지 계명으로 만족하셨는데 14개라니!”

 

이 말에는 두 개의 버전이 있다. 영국의 정치인인 에셔 경(Lord Esher) 1918 1014일 자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Clemenceau said: God was satisfied with Ten Commandments. Wilson gives us fourteen.” 1918 111일의 영국 신문 <맨체스터 가디언>은 클레망소가 불어로 “Quatorze points, mais cela est un peu fort. Le bon Dieu n'en avait que dix.” 영어로는 “Fourteen points: that's a bit much. The good lord had only ten”이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윌슨을 대면한 이후에 클레망소는 이렇게 말했다고도 한다.

 

“견문이 좁은 나로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상으로 그리스도와 닮은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클레망소가 회의를 통해 거두려 한 성과는 독일이 다시는 프랑스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영토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국가임을 내세워 독일에 대한 책임을 무는 데 앞장섰다. 알사스와 로렌 지역을 다시 프랑스 영토로 돌린 것에서 한 술 더 떠서 라인강 유역까지 50㎞에 이르는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해 만약의 경우에 완충 역할을 하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독일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며 독일에 대해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부과한 주역이었다. 잘 알다시피 이런 조치들은 전쟁을 방지하기보다는 2차 대전이란 더 큰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됐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때 70세였던 클레망소는 삶의 역정에 굴곡이 심했다. 의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가 1871년 파리코뮌 직후에 급진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한다. 1893년 파나마운하 관련한 의혹으로 정계를 떠났으나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명예를 회복하고 1903년에 상원의원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1906년에는 총리직에까지 올랐다. 1909년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다가 1차 대전이 일어나자 상원 육군위원장, 이어 1917년에는 총리 겸 육군장관이 됐다. 그는 반역자나 패배주의자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색출해 즉결재판에 넘겨 총살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랑스는 아주 자유분방하면서도 작은 잘못도 용납하지 않는 강경한 리더십에 열광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런 프랑스의 모습을 한몸에 담은 인물이 클레망소다. 클레망소는 파리회의에서 회의의 주관자이면서 독립적인 관찰자의 역할을 한다. 중재자로서 나타나는데 항상 본심에 대한 의심이 제기된다. 국제 무대에서 그 힘에 비해 권위를 인정받으면서도 실력에 있어서는 절하된 평가를 받곤 하는 모습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클레망소의 모습이었다. 위기에는 전통과 권위로 존중받고 호출되지만 위기가 사라지면 새로운 시대와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로 배척당한다. 1920 1월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클레망소는 낙선하고 정계를 영원히 떠난다. ‘승리의 명예와 비참함(Grandeurs et misères d’une victoire, 1930)’이란 회고록 제목 중의 하나가 그의 삶을 잘 대변하고 있다. 1차 대전에 하급 장교로 참전했던 프랑스 군인 출신 정치인에게서 클레망소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본다.

 

How can you be expected to govern a country that has 246 kinds of cheese?

(246가지 치즈 종류를 가지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겠소?)

 

프랑스의 샤를 드골이 했다는 유명한 말이다. 프랑스어로는 “Comment voulez-vous gouverner un pays qui a deux cent quarante-six varietes de fromage?”라고 돼 있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246’이 아닌 ‘1년의 날들 수만큼이라고 표현돼 있기도 하다. 바로 케네디가 프랑스를 방문했던 때의 에피소드로 나왔었다. 케네디가 드골과 얘기를 나누는데 프랑스 정부의 어느 장관 하나가 함께 들어와 앉으려다 드골이 나가라고 무서운 표정 한 번 지으니까 아무 말 못하고 나가더란다. 그걸 보고 케네디가 놀라서 장관이면 나름 정치인인데 어떻게 확 휘어잡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드골이 이렇게 대답했단다프랑스는 1년의 날 수만큼이나 많은 치즈 종류를 가지고 있는 나라요. 이런 나라에서는 무섭게 나가야 한다오.”

 

치즈를 이용한 비유는 아주 이르게는 1947년에 드골이 첫번째 정계 은퇴를 할 때 구사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1958년 알제리 사태로 프랑스가 갈라지다시피 하는 위기에서 드골이 1953년의 은퇴를 무르며 정계로 복귀할 때 던진 말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전통과 권위에의 복종이 잘 이뤄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혀 통일이 되지 않고 시끄럽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프랑스의 이중성이 드골의 생애와 그에 대한 프랑스인의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드골이 영국으로 건너가서 프랑스인의 항전을 촉구한 유명한 방송과 프랑스에 남은 이들의 레지스탕스 활동은 극심한 곤경에도 굴하지 않는 프랑스인의 단호한 의지와 행동력을 보여준다. 드골이 은퇴를 반복하고 드골을 내쫓다시피 했다가 다시 부르곤 하는 프랑스인의 모습은 프랑스다운 변덕과 사랑의 변주곡이다.

 

1차 대전은 각국의 제국주의적인 야심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1차적 목표가 있긴 했지만 승리도 제국주의적 야심을 충족시켜야만 의미가 있었다. 영국이 중동 지역을 전장으로 한 이유는 터키를 비롯한 독일과의 협력국들의 주변을 침으로써 독일을 고립시키거나 허약하게 만든다는 것이었지만, 또한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야심이 있었다. 아프리카와 태평양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는데 2차 대전의 영국 측 영웅으로 꼽히는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는 그것을촌극이라고 표현했다. 촌극의 결과유럽의 핵심 전장에서 독일군 병력이 분산되기는 했지만 독일보다는 영국과 프랑스의 병력이 더 많이 분산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이런 시대착오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결과가 바로 1차 세계대전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참호진지전이다. 병사들은 충분히 영웅적이었다. 그런 영웅전이 마지노선이란 시대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한 괴물이 등장하는 배경이 됐다. 결코 뚫을 수 없는 강력한 진지를 프랑스는 1차 대전 이후 수년에 걸친 노력 끝에 구축했다. 2차 대전이 발발했으나 마지노선이 있기에 프랑스는 안심했다.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우회해 프랑스 병력을 진지에 가둬버리고 마지노선을 커다란 포로수용소처럼 만들어버렸다. 마지노선은 시대의 변화를 좇지 못한 허망한 노력이나 산물이란 뜻으로 쓰여야 한다. 그러나강력한 최후 저지선이나 그런 결의를 나타내는 어휘로 남았다. 그것도 화려한 수사로 남아 자주 쓰이며 단어로서 존재감을 지금도 만끽하고 있다. 그게 바로 프랑스 브랜드의 핵심이기도 하다.

 

1차 대전에 참전한 이들을 두고 영국에서는 ‘잃어버린 세대란 표현을 쓴다. 200만 명이 넘는 전사자뿐 아니라 참혹했던 전장에서의 기억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던 귀환자들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Lost’ - 영국이 잃은 것은?

1914년 크리스마스에 야릇한 사건이 발생했다. 양측 병사들은 최전방에서 화목하게 서로 담배를 교환하고 축구를 했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고 친교는 곧 깨졌다. 그런 사건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버나드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 .

 

몽고메리는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장군이다. 1908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해 1차 대전 때 두각을 나타내면서 유능하고 다부진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몽고메리는 전투를 잘하고 전략가적인 원대한 시각도 가지고 있지만 꼬장꼬장하고 지나친 원칙주의에 고집불통이란 평판을 얻었다. 특히 2차 대전 때 같은 연합군인 미군의 장교들은 그를 어려워하면서 귀찮아했다. <전쟁의 역사>에 나온 저자 소개의 일부가 그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항상 신중하고 완벽한 전략가였던 몽고메리는 행동에 옮기기 전에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준비를 해서 동료 사령관들을 화나게 하기도 했으나 공격하기 전에는 꼭 병사와 장비를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다. 이러한 방침으로 몽고메리는 느리기는 하지만 확고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휘하 장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과문하기는 하지만 필자는 소위크리스마스의 휴전이라고 불리는 위의 사건을 저렇게나 건조하게 기술해 놓은 책을 보지 못했다. 물론 그 사건이 전쟁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1차 대전의 다면적인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까 몽고메리도 못마땅해 하면서도 참호전쟁으로 바뀐 1914년 말의 상황을 정리하면서 언급했던 것이다.

 

주로 병사들의 입장에서 1차 대전에 관해 쓴 <참호에서 보낸 1460(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 마티 펴냄, 2005)>에 나온 당시 영국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존 프렌치 경의 회고는 이러하다.

 

“비무장 상태의 병사들이 머리 위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들고 독일 쪽 참호에서 우리 쪽 참호로 건너왔다. 이런 제의가 몇 곳에서 우호적으로 수용됐고 제한적인 우애 활동이 있었다. 이런 내용을 보고받은 나는 재발을 금지하는 긴급 명령을 발동했다. 나는 해당 지휘관들에게 엄중한 문책을 지시했고, 이 때문에 상당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 책에서는 존 프렌치 경을 화나게 한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과 같은 사태를 20쪽이 넘게 상당한 비중을 두고 기술하고 있다. 몽고메리는 다음과 같이 영국 병사들의 용맹과 헌신을 그들을 지휘한 장교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눈에 띄는 수치스러운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고위 장교들이 병사들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휘관들은 인명 손실은 무시하고 무조건 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예사였고 공격은 며칠 동안 계속됐다. 싸워야 했던 병사들의 자질은 명령을 내린 장군들의 자질과 큰 대조를 이뤘다. ‘1914∼1918년 전쟁의 영웅은 무명용사들이었다라는 테일러의 말은 타당하다. 당시 병사들은 보다 훌륭한 제너럴십의 인도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비록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병사들은 장군들보다 우수했다.”

 

1차 대전에 참전한 이들을 두고 영국에서는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란 표현을 쓴다. 200만 명이 넘는 전사자뿐 아니라 참혹했던 전장에서의 기억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던 귀환자들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몽고메리는 이들에 대한 부채 의식을 평생 갖고 산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항상 병사들의 편에 섰다는 근저에는 바로 1차 대전 때 스러져 간 그와 같은 또래들이 생각나고, 그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부채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타 나라나 사람들과는 다른 식으로 나타났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나서 몽고메리가 어느 호텔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을 하러 갔는데 엘리베이터에서 한 중년 신사가 그를 알아보고 감격해 무릎을 꿇으며장군님, 장군님외쳐댔단다. 무뚝뚝하게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려던 몽고메리가 뒤로 돌아서 계속 감격에 겨워 무릎을 꿇고 있는 노인에게 소리쳤단다. “이봐, 머리 좀 단정히 깎으라고.”

 

1887년에 태어났던 몽고메리도 기본적으로 빅토리아 시대 사람이었다. 역시 빅토리아 시대 후반에 태어났던 이들의 자서전에 담긴 1차 대전 종전 시의 풍경에 보면 몽고메리가 그의 옛 부하를 혼냈던 것과 같은 감정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

 

전쟁이 너무도 순식간에 끝나버렸기 때문에 달라진 상황에 맞춰 감정을 조절할 여유도 없었다.… 군중들은 여전히 경박했다. 공포의 세월 동안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는 듯, 전보다 더 경솔하게 쾌감을 붙잡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마치 다른 행성에서 우연히 떨어진 유령처럼,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기묘한 고독을 느꼈다.

-버트란드 러셀의 자서전 <인생은 뜨겁게> .

 

“오늘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전쟁은 끝입니다.”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리라는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6개월이나 1년 내에 전쟁이 끝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교착 상태는 여전했고 몇 미터 전진하는가 싶으면 다시 몇 미터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어리벙벙한 채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내 평생 최고의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지금도 그때를 돌이켜보면 두려움이 인다. 거리 곳곳에서 여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영국 여성은 대중 앞에서 결코 춤을 추지 않으며, 그것은 파리나 프랑스에서나 어울릴 행동이다. 그런데 영국 여자들이 웃고 떠들고 소리치고 춤을 추고 깡충거리며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

 

‘경솔하게 쾌감을 붙잡는 데 여념이 없고’ ‘파리나 프랑스에서 어울릴 행동으로여자들이 웃고 떠들고 소리치고 춤을 추고 깡충거리는 모습에 당황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상류층 출신 두 사람의 모습에 옛 부하를 혼내는 몽고메리가 겹쳐진다. 1차 대전이 영국에 남긴 브랜드의 핵심은 ‘Lost’가 아닐까? 외부적으로는해가 지지 않는세계 최강대국으로서의 위용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감정을 통제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장치까지 사그라지는 기미가 바로 1차 대전에서 시작된 것이다.

 

脫亞入歐(탈아입구)’의 꿈을 버린 일본

1차 대전을 국가의 위상을 올리는 기회로 보고 접근한 아시아의 국가들이 있다. 하나는 뻗어나가는 세력권을 더욱 확대해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충만했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당해온 것들을 일시에 만회하고자 했다. 전자는 일본이고, 후자는 중국이다.

 

1895년의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수천 년 동아시아의 세력판도에 변화를 가져와 중국을 대신한 맹주로 발돋움했다고 여겼다. 실제로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을 경계한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독일과 프랑스의삼국간섭으로 알려진 압박에 굴복해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사건이었고와신상담이 국가적인 슬로건으로 대두됐다. 그러던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흥 제국으로서 인정받기를 기대했다. 전쟁을 마무리하는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인정받고, 사할린 도서를 차지했으며, 연해주의 어업권을 획득하는 실질적인 이득도 거뒀으나 배상금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 이 결과로 승전을 축하하려던 시민모임이 폭동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아시아를 넘어 서구의 일원이 된다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 의해 주창된脫亞入歐(탈아입구)’.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이 지향하던 국가 브랜드는 달성했다 싶으면 한발 앞으로 빠져나가는 양상이 반복되는 형국이었다.

 

일본은 1914 1차 대전을 메이지 유신의 원로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말처럼영국, 프랑스,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개선하고 동양에 대한일본의 권리를 확립하고, 이를 배경으로 중국 정부를 회유할 수 있는천재일우의 기회로 인식했다. 일본은 영국의 동맹국이란 명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山東)반도와 적도 이북의 남양군도로 진격했다. 1차 대전 동안 일본은 중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으나 1차 대전에 전투력이 아닌 노동력으로 연합국 측에서 참전을 했던 중국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그리고 서구 열강들도 중국에서의 일본의 급속한 세력 확대에 대해 견제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은 1918 7월에 미국, 영국,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혁명 세력에 대항한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했다. 28000명의 병력 중 일본군이 12000명이나 됐고, 3개월 후에는 다른 3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73000명까지 출병 인원을 증원했다. 3개국이 1920 6월에 철군한 이후에도 일본군은 1922 10월까지 머물렀다. 결국 전투로 인한 사망자는 3000명 이상이 되고 더 많은 수의 동사자를 내고서야 철수했다.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탈아입구를 향한 국가적 열망도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자신의 제국주의적 야욕보다는 먼저 발을 뺀 서구 열강에 대한 배신감과 피해의식이 더욱 크게 부각됐다.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1921 11월부터 1922 2월까지 열린 워싱턴군축회의에서 일본의 주력함의 비율이 미국과 영국에 대비해 60%선으로 정해지자 서구 열강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서구 제국과의 동맹관계보다 독자적인 제국주의 행보를 보이는 계기가 됐고 1928년의 장작림 폭살에 이어 결국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까지 치달았다. 만주사변 이후 국제연맹이 파견한 리튼조사단이 일본의 책임을 거론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함으로써탈아입구의 구호를 접고 그들만의 행보를 펼쳐버렸다. 이후 거기에대동아공영이란 슬로건이 붙여졌다. 1차 대전은 일본이탈아입구라는, 메이지 유신 이래 30년 넘게 추구하던 국가적인 브랜드 목표를 접고 2차 대전을 향해 달려가는 전환점이 됐다.

 

혁명의 맹아와 쿨리 - 중국

1차 대전이 터졌을 때 제국주의 세력들에 의해 이미 70년 이상 고통을 받고 있던 중국인들은열강들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다며 재미있어 했다고 한다. 일본이 거기에 끼어드는 것조차도 즐거웠다. 그러나 좀 더 냉철한 시각을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정부의 실력자였던 량스이(梁士)는 군대를 대신해 노동자를 연합국 쪽에 파견해 성의와 능력을 인정받을이공대병지책(以工代兵之策)’을 내놓았다. 독일에서 뭐라 해도 핑계가 되는 엉거주춤한 입장을 취했다. 유럽 전장에서의 엄청난 인명 손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 중국의 계책에 더욱 유리하게 작용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주로 농민 출신으로 구성된 14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프랑스로 건너갔다. 직접 전투에 뛰어들지 않은 노동자임에도 2만 명이 현지에서 사망했고 3000명은 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공격으로 희생됐다. 그러나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말은 중국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산동반도를 일본에 할양하기로 합의했다. 마침 조선에서도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학생들로부터 일었다. 중국 학생들도 들고 일어났다. 그게 바로 5·4운동으로 번졌고 결국 중국공산당의 창당과 혁명으로 이어졌다.

 

중국인들이 해외로 나간 역사는 길다.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쇄국정책을 써도 생활고에 시달린 이들이 살길을 찾아서 바다 건너로 가는 것을 일일이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쇄국정책을 강하게 내세우는 정부일수록 정부의 조직적 행정능력은 떨어졌다. ()대 이후 중국인들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등지로 가서 화교사회를 형성했다. 대부분 산발적인 이주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골드러시(gold rush)가 일어난 미국과 노동력이 부족했던 중남미 지역으로의 대규모 이주가 행해졌다.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와 파나마운하는 중국인 노동자, 소위쿨리(苦力)’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중국인 쿨리들로 중국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19세기 중반에 제국주의적인 침략이 전개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중국은 지식인연하는 사람들이 고상한 취미나 남다른 학식을 내세울 때 들먹이는 신비(神秘)의 제국이었다. 아편전쟁과 그에 이은 불평등조약, 의화단사건에 이은 열강들의 침략 등으로 중국이 종이 호랑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공룡과 같은 취급을 받았어도 유럽인들로 보면 일부에 국한된 이미지였다. 1차 대전에 유럽으로 간 중국인들의 다수가 현지에 정착하며쿨리=중국인의 이미지가 완전하게 형성됐다. 힘들거나 더러운 일도 마다 않는 억척 같은 중국인의 이미지가 유럽인들에게 자리잡은 계기도 바로 1차 대전이었다.

 

 

트렌드 연구는사람들, 소비자들은 한꺼번에 확 변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욕구는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단지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거나 새로운 형태로 펼쳐질 뿐이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역사는 새로운 트렌드를 찾는 원천

필자는 2003년 말에 러시아를 비롯한 CIS 지역에 대한 마케팅전략을 짜러 모스크바에 간 적이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를 높이고 긴 비행기 시간과 겨울철 별 오락거리가 없는 모스크바의 저녁 시간을 때우기 위해 집의 서가에 몇 년 동안인지 모르지만 보일락말락 자리 잡고 있던 페이퍼백 하나를 가방에 넣고 나섰다. 가 바로 그 책이었다. 책을 언제 샀는지 가물가물했고, 이 책을 비행기에서 읽기 전까지 90년대 초에 나온 책으로 개방의 물결에 휩싸인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지역과 사람들에 대한 안내서로 발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전으로 훨씬 올라가서 1971년에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된 로버트 카이저가 자신이 주재했던 3년여의 경험을 회고하며 저널리스트다운 감각을 발휘하며 지은 책이었다.

 

그 책이 20년 전에 지어진 것임을 알고 러시아의 신흥 중상층 이상을 겨냥한 프리미엄 마케팅에 어떤 도움이 될까 실망감이 들었지만 특수한 시기와 장소를 다룬 회고록을 읽는 듯한 재미로 쭉 단번에 읽어 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과거의 소련과 단절된 새로운 유형만이 강조되던 러시아 중상층에게서 그 책에 그려진 70년대 소련인들의 모습과 성격이 많이 투영돼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친 김에 1차 조사 후 귀국해 집에 있는 러시아에 관련된 몇몇 책들을 훑어봤는데 앙리 트로아(Henry Troyat)란 프랑스 사람이 쓴 피터 대제의 전기의 영문판인 를 보니 공산 러시아 혁명 수백 년 전부터 변하지 않은 러시아인의 속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성이 현재 러시아인을 파악하는 첫 번째 열쇠가 될 수 있었다.

 

현상과 다른 새로운 것을 얘기하는트렌드 연구에서도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 트렌드 전문기관 trendwatching.com의 트렌드 연구는사람들, 소비자들은 한꺼번에 확 변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욕구는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단지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거나 새로운 형태로 펼쳐질 뿐이다(Human beings, and thus consumers, don’t change that much: their deep needs remain the same, yet can be unlocked or newly serviced)’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른 것만을 강조하는 ‘Or’보다는 달라 보이는 가운데 같은 것을 찾는 ‘And’에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And’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바로 역사라는 큰 호수가 우리 앞에 있다. 100년이 지난 옛날의 사건이 아닌 끊임없이 신선한 물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1차 대전은 서구 제국을 넘어 동아시아 현재에도 살아 있다.

 

박재항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미래연구실장 jaehang@hotmail.com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삼성전자 홍보실에서 근무했으며 제일기획 미주법인 AP 팀장과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 연구소장,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0호 플라스틱 순환경제 2021년 10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