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경영이 화두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일부 선도적 기업은 디자인 경영으로 날개를 달았지만 아직까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기업도 많습니다. 디자인 경영 매뉴얼 업데이트를 위해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경험과 융합, 소통이란 세가지 최신 트렌드와 이론적 배경, 한국 기업의 성공 사례, 디자인 구루와의 대담 등을 전해드립니다. 또 세계적 디자인컨설팅사 IDEO의 팀 브라운 CEO가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6월호에 실은 논문도 함께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문권모·정임수 기자 dbr@donga.com
도움말 이안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ahnjlee@seri.org
기업 경영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구문(舊聞)’이 됐다. 경쟁 격화와 기술 평준화, 소비자 욕구 변화 속에서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는 전통적 비즈니스 방법론만으로 시장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경영자들은 대부분 잘 알고 있다. 소비자들은 오래 전부터 품질이 아닌 디자인을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떻게 디자인 경영을 실천해야 할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기업이 많다. 디자인 경영과 디자인적 사고를 통해 혁신을 이뤄낸 기업들의 최신 사례를 통해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사점을 찾아본다.
고유의 디자인 정체성 구축해야
한때 MP3 플레이어 부문에서 세계 1위 업체였다가 애플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걸은 레인콤 양덕준 사장은 일본에서 한 당돌한 고등학생에게 질타를 받았다. 2005년 도쿄 시부야의 매장 개막 행사에 참석한 한 학생이 양 사장에게 버럭 화를 낸 것이다. “당신들 제품(아이리버) 자체에 훌륭한 매력이 있는데 왜 자꾸 애플 아이팟(iPod)을 흉내내려 하느냐”고 따졌다.
양 사장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아이팟을 의식하다 보니 어느새 짝퉁이나 다름없는 제품을 만들고 있었다. 점유율 경쟁에만 매몰돼 아이리버다운 것이 무엇인지 잊고 말았다”며 후회했다. 이후 양 사장은 다시 아이리버만의 특징을 살리기로 결정했다. 이후 디자인 정체성을 회복하자, 적자에 시달리던 레인콤은 지난해 흑자전환에 이어 올해에도 실적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레인콤 사례는 기업의 디자인 정체성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일관성 있는 제품 디자인은 소비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쉽게 해당 브랜드를 알아보게 하며, 고객 충성도를 높여준다.
몇 년 전 국내 휴대전화 업체들이 문자입력 방식 등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를 통일했으면 좋겠다는 정부 의견에 반대한 적이 있다. 각사 고유의 디자인이 고객을 잡아두는(lock-in)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정 문자 입력 방식에 익숙하거나, 특정 디자인 컨셉트를 좋아하는 소비자는 재구매 시 동일한 방식의 제품을 선호한다.
또 디자인 정체성은 기업이 고객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철학을 의식과 무의식적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일을 한다. 소니는 작고 가벼우며 심플한 소니 스타일이란 일관된 이미지를 모든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 미국의 유통업체 타깃(Target)은 매장과 종업원의 복장, 전단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디자인 컨셉트를 유지하고 있다.
디자인 정체성을 중시하는 기업은 별도의 관리감독 기구를 설치해 운영하기도 한다. IBM은 1990년대부터 ‘기업 아이덴티티 & 디자인’ 부서를 설치해 제품, 포장, 카탈로그, 매뉴얼, 건물디자인 등 기업과 관련한 모든 디자인을 관리하고 있다.
트렌드를 앞서가는 선행 디자인이 핵심
미래는 트렌드를 따라가는 자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앞날을 창조하는 자의 것이다. 2008년 국제가전전시회(CES)에서 혁신대상을 받은 슈팅스타폰을 기획한 팬택계열 디자인기획팀의 홍주영 수석연구원은 “환경 변화가 심하고 제품의 수명주기가 짧아지는 상황에서 현재 고객 니즈만 조사·분석하면 어느 순간 뒤처지게 된다”며 “근미래(近未來)적 사고를 갖고 적어도 2∼3년 정도 트렌드를 앞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래 디자인을 연구하면 제품 차별화는 물론이고 기술 개발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효과도 있다”고 덧붙였다. 팬택계열 SKY가 업계 최초로 시도해 선풍을 일으킨 슬라이드폰과 하얀 휴대전화 색상은 모두 선행연구를 통해 나왔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 역시 상품의 디자인과 컨셉트를 먼저 정하고 기술 개발에 들어가는 ‘선(先) 디자인, 후(後) 개발’ 전략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또 ‘디자인 뱅크’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활용해 혁신적 제품을 개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행디자인을 모두 ‘뱅크 시스템’에 저장해 놓았다가 정기적으로 활용가능 여부를 검토하면 앞선 디자인의 제품을 순발력 있게 만들어낼 수 있다. 삼성의 첫 텐밀리언셀러인 이건희폰(T100)에서부터 최근의 보르도TV에 이르기까지 많은 디자인 혁신 제품이 이런 과정을 거쳐 나왔다.
LG전자는 지난해 ‘디자인경쟁력 강화 4대 방안’의 첫째 방안으로 디자인이 기술의 개발방향을 리드하는 선행디자인 프로세스를 강화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