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DBR은 현대·기아차 인재개발원(마케팅 아카데미)과 함께 최신 글로벌 마케팅 사례를 연재합니다. 현대·기아차의 판매, 마케팅, 상품 관련 지식을 보유한 마케팅 아카데미는 주요 대학 경영학 교수들과 함께 내부 임직원 교육을 위해 글로벌 경영 사례를 개발했습니다. DBR은 이 가운데 독자 여러분들께 도움이 될 만한 사례를 엄선해 시리즈로 전합니다.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은 도전과 응전의 스토리를 통해 글로벌 경영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의 제작에는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윤지온(24·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현지 법인에 소속된 대부분의 딜러들이 수작업으로 고객 정보를 관리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객을 찾아 다니기보다 대리점에 내방한 고객을 중심으로 영업 활동을 하거나, 고객의 불만이 들어와도 ‘내가 알 바 아니다’라는 태도를 보이는 딜러도 많았다. 판매를 통한 단기 인센티브에만 관심이 많을 뿐 고객과 장기적으로 신뢰를 쌓으려는 노력을 하는 딜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CRM(Customer Relation Management·고객관계관리)의 불모지였다.”
인도 법인의 CRM 시스템 도입 및 활용을 주도한 민왕식 전(前) 현대차 인도법인(HMI) 판매·마케팅 본부장(현 상용 수출사업부 전무)의 말이다. 현대차는 CRM의 정확한 의미조차 잘 모르는 딜러가 많던 인도에서 2006년 6월 해외 법인 중 최초로 CRM 시스템을 구축했다. 현대차는 인도 시장에서 고객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콜센터 설립, 딜러관리 시스템 도입 등 간단한 방식의 CRM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냈다.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율을 달성했기 때문에 해외 법인 CRM 사례 중 대표적인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차는 2000년대 중반까지 해외 시장에서 주로 2개의 마케팅 수단에 의존했다. 바로 광고와 인센티브다. 일단 광고를 통해 인지도를 확보한 후, 딜러들에 대한 판매 인센티브를 높여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다는 비교적 단순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적게는 수백억 원, 많게는 수천억 원을 써야 하는 광고는 정량적인 성과 측정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각국 상황에 맞는 광고를 제작하다 보니 초과 비용도 상당했다. 판매 인센티브 역시 만만치 않은 비용을 필요로 했고, 인센티브를 얻기 위해 딜러가 과도한 디스카운트를 해줄 경우 딜러 망 전체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진다는 약점이 존재했다.
해외 시장에서의 마케팅 및 영업 역량 강화 방안을 찾던 현대차는 BMW가 CRM 시스템을 통해 해외 시장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는 점에 주목했다. BMW는 일찌감치 개별 고객의 상세한 정보가 담긴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해 이를 딜러와 공유하며 고객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BMW 고객이 차 문제로 콜센터에 전화를 걸면 콜센터 직원의 화면에는 해당 고객의 차량 구입 시기, 정비 이력, 취미 등이 일목요연하게 뜬다. BMW는 기념일에 고객의 성향에 따라 골프대회 초청장, 음악회 초대권, 박물관 전시회 관람권 등을 수시로 보낸다. 차량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출동 서비스를 제공한다.
차량을 판매할 때도 그 과정을 인도 전(Pre Delivery, 직업, 취미, 성향 등 상세한 고객 개인 정보 사전 취합), 인도(Delivery, 직접 고객과 대화하며 자사 제품의 특장점을 설명하고, 고객 개개인의 독특한 경험을 모집), 허니문(납품 6주 후 제품에 만족하는지 추가 확인)의 3단계로 나눠 구매 단계별 고객 경험 및 만족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세심하게 고객을 관리하니 고객과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차는 해외 시장에서 의미있는 성공을 거두려면 단순히 차를 많이 파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절감했다. 하지만 CRM 도입 비용, 구축 시 걸리는 시간, 세계 각국의 서로 다른 문화 및 환경을 감안할 때 모든 해외 시장에서 동일한 CRM을 도입하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CRM 수행 시 제도적인 문제는 적고, 도입 후 바로 효과를 볼 수 있는 해외 시장을 찾았다. 그 결과 인도 시장이 적격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 인도일까. 우선 인도 시장은 1억 명 이상의 잠재 고객을 보유한 현대차의 해외 시장 전략 거점이었다. 또 1억 5000만 명에 달하는 두터운 규모의 인도 중산층은 단순히 저렴한 가격의 싼 자동차가 아니라 고품질, 신기술, 브랜드 중시 등으로 소비 패턴을 바꿔나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인도 소비자들은 3∼4년 전후로 자동차를 바꾼다. 1998년 현대차가 인도에 처음 진출한 이후 지속적으로 확보된 기존 고객들의 재구매율(Retention Rate) 향상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를 감안할 때 현대차는 선진 고객관리 기법을 도입하면 인도 시장에서 추가 도약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인도 법인의 열악한 현실
2000년대 중반 인도 법인의 현실은 열악했다. 당시 인도 법인에서는 엑셀 프로그램을 이용한 수작업으로 고객 정보를 관리했다. 무려 45만여 명의 누적 고객 정보를 수작업을 통해 모았다는 뜻이다. 고객 불만 접수 및 처리, 정비 및 수리 내역, 잠재 고객 정보 등도 역시 수작업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월 평균 신규 고객 정보가 3만 명 이상씩 늘어나는 상황에서 수작업으로만 고객 DB를 관리하니 고객 정보가 제대로 쓰일 리 만무했다.
기껏 모아놓은 정보를 의미있게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우선 오류나 중복으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정보가 절반에 가까웠다. 데이터의 정합성과 신뢰도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데이터의 형태도 딜러별, 지역별로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딜러는 고객 정보를 상세하게 표기한 반면 다른 딜러는 이름과 전화번호 정도만 적어놓는 일이 빈번했다. 심지어 같은 고객의 이름을 다르게 표기한 자료도 있었다. 인도인의 이름이 워낙 길고 복잡하다 보니 본인의 이름 철자도 그때그때 다르게 적는 고객도 있었고, 딜러들도 고객 이름을 제대로 받아 적지 못했다. 주소 또한 ‘무슨 길 몇 번지’가 아니라 ‘감나무집에서 세 번째 뒤에 있는 집’ 등으로 알려주는 고객이 많았다.
딜러들을 관리하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민 전무는 “열악한 사회 인프라보다 더 힘든 건 인도 현지 직원들의 태만이었다. 오랜 식민지 통치 경험 때문인지 주도적으로 일하기를 꺼렸다. 지시를 받아도 마지못해 하는 시늉만 냈고, 책임감도 부족했다. 인도 공장 설립 초기 주요 부품을 싣고 오던 운전기사가 행방불명 된 적이 있었다. 한달 반 후에 나타났길래 어디에 있었느냐고 했더니 오는 길에 고향에 들러 결혼을 하고 왔다고 하더라. 기가 막혔지만 부품을 들고 도망가지 않았다는 점에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었다. 한국 본사에서 인도 주재원들에게 1년에 2번 정도 음식 및 생필품들을 보내준다. 첸나이에서 뭄바이를 거쳐 델리까지 오는데, 델리에 도착할 때는 처음 물품의 상당량이 사라진다. 현지 운송회사 직원들이 가져가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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