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72호 (2011년 1월 Issue 1)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냉혹한 의사다. 그는 마치 으레 있는 일인 듯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직장암 말기군요. 이제 6개월 정도 남은 것 같네요.” 어느 햇빛 좋은 날 사형선고를 받는다면 당신은 절망할 것이다. 병원 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 벤치에 앉아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젊은 커플, 무심하게 피어있는 꽃들. 도대체 이것들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말기암 환자로 판명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커튼을 친다고 한다. 살아있는 것들을 보면 너무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분홍빛으로 생생하기만 한데 자신만이 차가운 겨울 속으로 잠기는 것 같다. ‘왜 나인가? 이렇게 많은 살아있는 것들이 있는데, 왜 하필 나인가? 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많이 했는가?’ 친구가 와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려는 그가 밉기까지 하다. ‘네가 지금 내 고통을 아니? 그렇게 걱정스럽다면 네가 대신 죽어줄 수 있니?’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죽음은 혼자 걸어갈 수밖에 없는 외로운 길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죽음의 문턱까지만 따라올 뿐 그 다음부터는 오직 나 혼자 가야만 한다. 그래서 죽음은 지독하게 무섭고 두려운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험업계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공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공포를 가중시켜 새로운 보험 가입자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민하느라 지금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될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는 존재이기에 앞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죽음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 장밋빛 삶을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현자 에피쿠로스(Epikouros, BC 342?-BC271)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2000여 년 전에 그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부질없는 공포를 해체하려고 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서한(Epistolē pros Menoikea)>
 
과거 반역을 저지른 사람을 체포할 때, 사법당국은 재갈을 물리곤 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재갈이 물린 반역자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불행일 것이다. 연루자를 찾기 위해 진행될 가혹한 고문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그나마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는 죽으면 모든 고통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의 권리는 권력자가 부여할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었다. 동양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이란 사형제도가 있었던 것이나, 서양에서 화형(火刑)이란 사형제도가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고통을 느끼면서 서서히 죽도록 하려는 권력자의 잔혹함이 엿보이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이것은 자살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반역자로 붙잡혔을 때도 그렇지만, 너무나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보다 먼저 죽거나, 혹은 소중한 아이를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렸을 때가 그렇다. 문제는 앞으로 이런 고통이 사라지거나 줄어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럴 때 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살아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상대적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살아있을 때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반면 죽어있을 때 우리는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현자의 이런 생각은 냉정해보이지만 확실히 옳다. 그가 이토록 죽음에 대한 어리석은 공포를 해체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때로는 죽음을 가장 큰 악이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고, 다른 때에는 죽음이 인생의 악들을 중지시켜준다고 생각해서 죽음을 열망한다. 반면 현자는 삶을 도피하려고 하지 않으며, 삶의 중단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삶이 그에게 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삶의 부재가 어떤 악으로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음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려고 노력한다.
 
-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서한(Epistolē pros Menoikea)>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죽음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생각과 현자의 생각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는 일반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평상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어떻게든 삶을 늘리려고 열망한다. 조그만 질병에도 병원을 들락거리며 몸에 좋다는 온갖 보양식을 찾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해서든지 죽으려고 열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삶에 어떤 희망도 남아있지 않거나 허무를 느낄 때 그들은 아주 쉽게 자살을 꿈꾼다. 그렇지만 죽음을 피하려고 하든 죽음을 꿈꾸든 그들이 자신의 삶을 삶 자체로 향유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회피의 대상이든 소망의 대상이든 일반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삶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우려했던 상황이다.
 
그렇다면 현자는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는 죽음을 기준으로 삶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그 자체로 향유하는 사람이다. 현자는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말기암이란 진단이 떨어진다면, 현자는 어떤 자세를 보일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동요 없이 삶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겁게 향유할 것이다. 6개월 뒤 죽는다는 두려움으로 지금 주어진 소중한 삶을 회색빛으로 물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현자는 살아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죽었다면 죽음은 어떤 고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즐겁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언젠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으로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와 향내에 소홀한 꽃을 본 적이 있는가. 인간이 이름 모를 꽃보다 어리석어서는 안 될 일이다.
 
 
 
강신주 철학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 contingent@naver.com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철학 VS 철학>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상처받지 않을 권리>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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