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칠레라는 낯선 나라의 소식이 익숙한 주제, 인물, 나라들로만 가득 찼던 뉴스 공간을 파고들었다. 매몰된 지 69일, 구조 작업 22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33명의 칠레 광산 근로자들은 세계 언론을 통해 연일 감동스러운 에피소드를 쏟아냈다. 세계는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이겨낸 소시민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열광했고, 칠레라는 나라는 그렇게 세계인의 가슴 속에 새겨졌다.
칠레 광산 근로자들의 이야기는 극한 상황에서 발현되는 인간다움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흡인력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몸짓과 음성을 통해 전달된 칠레라는 국가 브랜드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국민’ ‘가족의 따뜻한 사랑’ ‘자국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부’ 등의 자산이 더해졌다.
커뮤니케이션 전략 관점에서 본다면 칠레 지도자와 국민들은 33명의 매몰 광부를 구출(challenge)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objective)를 수행하면서 전 세계인들(audience)에게 인류 보편의 가치(message)를 이야기(story)로 잘 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칠레는 앞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계를 향해 풀어나갈 수 있는 훌륭한 ‘스토리 플랫폼’을 얻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이 갖지 못한 탄탄한 플랫폼이 있다. 바로 이달 열릴 G20 정상회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주요 20개국 정상이 모여 국제 현안과 협력을 논의하는 자리이니 세계인의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은 이 정상회의의 의장국이다. 개최국에 돌아올 막대한 경제적 효과 외에도 대한민국 브랜드를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발판으로 이번 행사를 활용해야 한다. 대한민국 브랜드는 지금까지 ‘한식’이나 ‘한류’ 등 문화 측면에서 조명을 받았다.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국가 간 이해관계를 잘 조정한다면 대한민국은 국제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도 리더십을 행사하는 국가로 위상을 높일 수 있다. 당연히 국가의 브랜드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브랜드는 일종의 보증서다. 소비자들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할 때 세부 제품 구성이나 효용을 일일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브랜드만 보고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국가 차원으로 관점을 확대해도 이 보증서의 위력은 유효하다. 강력한 국가 브랜드는 글로벌 시장에서 막 진출한 한국기업에 쏟아질 수 있는 ‘불신의 장대비’를 막아주는 든든한 우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은 기업들도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국민들도 격조 높은 세계 시민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로 국가 브랜드를 격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이 행사를 통해 형성된 국가 브랜드의 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기업들은 더 큰 힘을 얻은 국가 브랜드를 활용해 글로벌 시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고객과 커뮤니케이션 할 것인지 준비해야 한다. 칠레 광산 근로자의 스토리처럼 G20 정상회의를 통해 확보한 ‘스토리 플랫폼’에 무엇을 얹어야 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예기치 않았던 사고의 반전이 주는 충격 효과와는 다른 차원의, 철저히 준비되고 구성된 ‘웰 메이드(well-made)’ 드라마가 필요하다.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facts)만으로 특정 브랜드를 애써 기억하고 인정하는 관대한 청중은 없다. 지금부터라도 국가 브랜드라는 씨줄에 독창적이며 감동적인 무늬(스토리)를 가진 기업만의 날줄(콘텐츠)을 세심하게 엮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국가의 품격이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통의 품격으로 이어질 때 G20 정상회의 개최국으로서의 가치는 더 빛날 것이다. 플랫폼은 마련됐다. 이제 ‘웰 메이드’ 드라마를 그 플랫폼에 올리는 것은 우리 기업과 기업인의 몫이다.
이승봉 PR컨설팅 프레인 대표 sblee@prain.com
필자는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비서실 이사를 거쳐 현재 PR 컨설팅 회사인 프레인의 대표로 재직하고 있다. <마케팅 종말> <기업 홍보의 힘> <대변인> 등의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