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과 파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기업과 도시인데, 이 둘은 모두 매우 창조적이고,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능수능란하다는 점이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라는 스타 경영자로 인해 창의성과 기술 혁신의 대명사로 꼽힌다. 대중들도 ‘첨단’이라는 기술력보다는 ‘세련됐다’는 감성적인 측면을 떠올린다. 파리 역시 오랜 역사 도시이지만, 고부가가치의 명품 산업 덕분에 시간이 흘러도 세련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애플에 스티브 잡스가 있듯이 파리에는 1980년대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있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새로운 프랑스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라는 국가 브랜드의 강점을 문화로 이해했다. 문화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어서 한 방향으로 전략화하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그는 이를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삼기로 했다. 루브르 미술관, 라데팡스의 신개선문, 프랑스 국립도서관(추후 미테랑 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재무성 청사 등 국가의 주요한 상징 건축물을 그가 말하는 국가의 문화적 전략으로 설정한 것이다. 언뜻 보면 건설 사업으로 보이지만, 미테랑의 시각에서는 단순한 건축이 아닌 도시와 국가를 이미지화할 수 있는 문화 사업이었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실제로 루브르 미술관의 증축 계획안이었던 유리 피라미드는 프랑스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문화적으로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한 미국 건축가인 아이 엠 페이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이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의 권위가 아니라, 대통령의 안목이었다. 아이 엠 페이의 루브르 미술관 유리 피라미드는 20세기 최고의 건축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파리의 유산이 됐다. 역사적인 루브르 궁전의 외관은 전혀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확장한 그의 건축안은 프랑스인들의 역사적 유산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디자인 언어를 철저하게 적용했다. 예를 들면 공사 중 발견된 중세 유적을 제거하지 않고, 전시관의 일부로 디자인을 변경한 것이다. 공사비와 기간이 늘어났지만,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감탄을 자아내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지하로 시작되는 새로운 미술관에 감동했으며, 루브르 미술관의 새로운 경험은 할머니들이 가는 공간에서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또 파리 변두리 지역이었던 베르시에 건립된 프랑스 국립도서관도 주목할 만했다. 전작이 거의 없던 신참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의 모험적인 작품이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곳 역시 도서관 이용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베르시의 상징이 됐다. 프랑스는 이런 도서관 건립을 통해 지식과 문화를 국가적 자원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 국립 도서관을 해외의 관광객들이 온다고 생각해보라. 국가적인 문화 자원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문화적 안목, 즉 큐레이터 같은 안목을 지닌 리더의 존재가 결국 중요한 스페이스 마케팅의 성공을 결정하는 시작인 셈이다.
아무리 뜻이 있고, 노력이 있고, 뛰어난 디자인이라고 해도 선택받지 못하면 성공의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스페이스 마케팅에서는 디자이너만큼 중요한 존재가 바로 선택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진 리더다.
일본의 지역 문화 정책으로 유명한 ‘구마모토 아트폴리스’는 이런 점에서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0년대 말 일본의 대표적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가 제안한 공간 문화 정책은 일본 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받았다.
경찰서, 서민 아파트, 전망대, 청소년 수련원 등 건축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구마모토 아트폴리스는 제대로 관광 자원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지역 건축가를 우선해야 한다는 여론, 큐레이터와 같은 역할을 했던 ‘마스터 아키텍트’의 권한 축소, 예산 삭감 등으로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스페이스 마케팅의 전략이 성공하려면 의사 결정, 실행의 과정이 매우 민감하고, 섬세하면서도 과감해야 한다.
미국의 호텔 체인 모건호텔(http://www.mor-ganshotel.com)그룹이 필립스탁이라는 프랑스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거의 모든 호텔 디자인을 일임했다. 한 명의 디자이너에게 위임한 결과 작가를 통한 시각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디자인을 가시화했다. 호텔은 마치 예술 작품을 수집한 듯한 모습이 됐는데, 이는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유럽의 다국적 호텔 체인인 래디슨 사스 호텔(Radisson SAS: Rezidor hotel group)도 과감한 건축이나 인테리어 디자인을 통해 성공적인 성과를 만들었다.
성공하는 스페이스 마케팅은 몇 가지 특징을 띤다. 우선 뛰어난 안목의 리더가 디자이너를 발굴 또는 선택하는 것이다. 개인인 이들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모든 디자인의 권한을 행사하도록 한다. 흥미로운 것은 디자인 기업보다 캐릭터가 강한 창조적 디자이너가 더 주목받는다는 점이다. 이는 집단으로 창작하는 경우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리스크를 줄이려고 다수결 원칙을 디자인과 관련된 의사 결정에도 도입하긴 하지만, 집단 의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보편성으로 흐르게 된다. 안전해 보이지만, 시장의 변화를 리드하기 어렵게 된다. 안전하다는 것은 익숙하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고, 특별하지 않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엄청나게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가 실험되고 실현되며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적인 화젯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위험에 대한 부담감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의사결정에 여러 집단이 참여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강남 도산공원 주변의 국내외 패션 브랜드들의 공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에서는 과감한 외국 기업의 성공과 국내 패션 기업들의 실패가 확연히 나타난다.
스페이스 마케팅은 기능과 성능에서는 집단의 의사결정과 조언을 받아야 하지만, 시각화되는 실천의 단계로 들어서면 디자이너에 의사결정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물론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리더가 디자인 안목을 지녀 적절한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디자이너를 키울 줄 알아야 한다.
편집자주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공간’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도 공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직원들의 삶의 터전이자 고객과 만나는 소중한 접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영학에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합니다. 이 분야의 개척자인 홍성용 모이스페이스디자인 대표가 공간의 경영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