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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자아 ‘아바타’의 경제적 가치

정재승 | 48호 (2010년 1월 Issue 1)
영화 <음란서생>의 김윤서(한석규 분)는 당대 최고 문필가였다. 그러나 ‘추월색’이라는 필명 속에 자신을 숨기면서 음란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에게 필명은 억압적인 현실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게 만들어주는 ‘익명의 방패막’이다. <반칙왕>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던 김대우 감독은 ‘반칙왕’ 송강호에게 가면을 씌워주듯 한석규에게 필명 ‘추월색’과 함께 ‘안경’을 씌워준다. 그가 안경을 끼고 추월색이 되는 순간, 그의 성적 상상력은 날개를 편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필명은 인터넷 ID로 바뀌었다. 인터넷 ID를 사용하는 순간, 나는 ‘또 다른 나’로 탄생한다. 일례로 몇 해 전 미국의 한 70대 노인은 인터넷에서 25살 여성 행세를 하며 중년 남자들과 성적인 대화를 나누고 선물도 받아 챙기는 등 수년간 이중생활을 하다가 발각됐다. 그의 밤과 낮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굉장히 달랐다. 평소 이웃들에게 ‘점잖고 인자한 할아버지’로 통하던 그의 집은 젊은 여성 행세를 하며 얻은 속옷과 보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노인은 인터넷이란 익명 세계에서 ‘되돌릴 수 없는 젊음’에 대한 로망을 실현하고 있었다.
 
인간의 모순적 욕망
이처럼 사람들에겐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구와 함께 현재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순적인 욕망’이 있다. 이 점에 착안해, 미국의 SF소설가 닐 스티븐슨은 자신의 소설 <스노 크래시(Snow Crash)>(1992)에서 가상의 나라 ‘메타버스(Metaverse)’를 창조하고 그리로 들어가려면 ‘아바타’라는 가상의 신체를 빌려야만 하는 세상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바 있다.
 
사이버 공간에 대한 개념조차 모호한 시절, 이 독창적인 이야기는 천재 과학자 필립 로즈데일에게 창조적 영감을 준다. 이 소설을 읽는 순간, 그의 뇌 속에는 이미 메트릭스 같은 세상이 통째로 들어서게 됐고, 그는 ‘필립 린든’이라는 필명으로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3차원 가상 세계를 창조한다.

 

 
2003년 린든랩에 의해 처음 선보인 ‘세컨드 라이프’는 수많은 아바타들이 모여 사는 온라인 3차원 가상 세계다. 우리는 그 안에서 나만의 아바타와 이름을 가지고 현실 세계와는 다른 두 번째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사용자는 자신이 꿈꾸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며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고 자신이 그 인물이 될 수도 있다. 그 안에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고, 토지를 소유할 수도 있으며, 그 안에서 통용되는 전자 화폐를 현실 화폐로 환전할 수도 있다.
 
이 사이트는 처음 만들어지자마자 현실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많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학생들과 직장인들은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세컨드 라이프’의 주민이 될 수 있는 시간만 기다렸다. ‘세컨드 라이프’를 창조한 린든랩은 21세기 가장 전도유망한 벤처 기업으로 떠올랐다. ‘세컨드 라이프의 조물주’란 별명이 붙은 로즈데일의 목표는 소설 <스노 크래시>처럼 ‘꿈꾸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온라인상에서 만들어진 인간들의 사회와 현실 세계가 점점 유사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경제 행위가 오프라인 시장을 능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게임 시장은 무려 7조5000억 원(이는 영화 시장의 2배, 음악 시장의 5배에 달하는 수치다)이다. 온라인 쇼핑몰 시장 또한 5조 원을 육박한다. 지난 10년 사이 새로 생긴 시장 중에 이처럼 눈에 띄는 성장을 한 곳은 드물다.
 
2009년 한 해 국내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특징은 ‘유저들 간의 커뮤니티 기능을 강조한 게임’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현실 세계의 활동을 온라인 가상 세계에서 즐길 수 있으며, 유저들과 함께 게임을 통해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게임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중 가장 인기를 모은 선두주자는 누리엔 소프트웨어의 ‘누리엔’이다. 기존 게임에 커뮤니티 공간인 ‘하우징 시스템’을 추가한 이온소프트의 ‘프리즈’부터 넥슨의 ‘넥슨별’, JCE의 ‘오! 패밀리’까지 커뮤니티 기능을 강화한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했거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가상 세계에서 나를 대변하는 ‘아바타’의 사실적인 표현이 누리엔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150개 이상의 뼈대로 만들어진 아바타는 움직임과 표정이 실제 사람과 흡사해 온라인상에서도 친구들과 현실감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 누리엔은 사용자 개인마다 자신의 취향에 맞춰 벽지, 바닥, 가구 등의 아이템을 골라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3D 홈을 갖게 되며 이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게다가 누리엔에는 3D 댄스게임 ‘엠스타’가 장착되어 있으며 최상의 그래픽으로 아바타가 정말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표정 그리고 다양한 패션을 통해 게임 몰입감을 더욱 높인다.
 
자아에 대한 인식 확장
이제는 친숙한 단어가 된 ‘아바타’는 분신·화신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바타라(avataara)’에서 유래했는데, 사이버 공간에서 나를 대신해줄 분신으로 활동 중이다. 로즈데일은 어느 과학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아바타가 웹과 웹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가상공간 이동 프로그램을 IBM과 함께 내놓을 예정’이라고 했다. 지금은 플랫폼이 달라 이동이 불가능하지만, 앞으로는 ‘세컨드 라이프’ 속 아바타가 네이버나 싸이월드 속으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얘기다.
 
아바타에게 근사한 옷을 입히고 강력한 무기를 주고 멋진 남자친구를 선사하기 위해 해마다 사람들이 지불한 돈은 우리나라만 약 1조 원. 지난 5년간 매년 70% 이상 성장한 이 시장은 앞으로도 가장 중요한 시장이 될 전망이다. 왜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에 살고 있는 아바타에게 근사한 옷과 집을 선물하려고 하는 걸까? 왜 그에게 강력한 무기를 제공하려는 것일까?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아바타는 사실 ‘나’다.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만든 ‘아이디’ 하나만으로 새로운 인물이 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인터넷을 활보하는 아바타가 나로 인식될 전망이다.
 
최근 신경과학자들 사이에선 ‘내가 나를 인식하는 뇌 영역(self-center)’이 어디인지 찾는 데 분주한데, 그들은 ‘내 아바타를 봤을 때 과연 나를 인식하는 뇌 영역이 활성화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연구 중에 있다.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확장된 자아’라는 개념으로 아바타와 나를 분간하지 못하는 수준이 된 현실을 해석한다. 그렇다면 과연 ‘확장된 자아’란 무엇일까? (다음 호에 계속)
 
편집자주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려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 구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정재승 교수가 인간의 뇌에 대한 최신 연구 성과 및 경제적 의미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간 심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 정재승 정재승 | - (현)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부교수
    - 미국 컬럼비아의대 정신과 교수
    - 예일대 의대 정신과 연구원,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jsjeon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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