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국민 작가 제인 오스틴의 도시, 배스

38호 (2009년 8월 Issue 1)

영국 남서부의 인구 8만5000여 명의 소도시 배스는 2000여 년 전 로마군이 세운 온천 휴양도시다. 하지만 최근에는 온천보다 영국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 제인 오스틴 관련 축제로 더 유명하다. 2001년부터 도시가 가진 역사, 문화, 사회적 자산에 제인 오스틴의 콘텐츠를 입히는 차별화 전략으로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지방자치단체를 대표할 날도 멀지 않았다.
 
영국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을 아는가. 문학 작품에 친숙하지 않다면 낯설게 들릴 수도 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영화는 어떤가. 드라마나 영화로 각색될 정도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소설 <오만과 편견>(1813년)의 원작자가 바로 제인 오스틴이다. 소설에서 오만한 남자와 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여자는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가로막던 ‘오만과 편견’을 접고 결혼에 골인한다. 신분과 재산을 뛰어넘는 낭만적 사랑과 날카로운 펜으로 그려내듯 세밀하게 묘사한 당시 영국 시민과 귀족의 생활상이 이 소설의 묘미다.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 외에도 <이성과 감성>(1811년), <맨스필드 파크>(1814년), <엠마>(1815년), <노생거 사원>(1817년), <설득>(1817년) 등의 명작을 남겼다. 그는 영국 공영방송 BBC가 조사한 ‘지난 1000년간 최고의 문학가’ 순위에서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에 오를 정도로 영국인의 사랑을 받는 국민 작가다.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고 비교적 젊은 나이인 42세의 나이로 병사한 그녀의 삶 자체도 소설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2007년에는 그녀의 삶을 그린 앤 헤서웨이 주연의 영화 <비커밍 제인>도 나왔다.
 


제인 오스틴의 문학 세계와 영향력에 영감을 받은 영국의 소도시가 있다. 영국 런던에서 170km 떨어진 인구 8만5000여 명의 작은 도시 ‘배스(Bath)’다. 이 도시는 2001년부터 ‘제인 오스틴 축제’를 열고 있다. 도시가 가진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자산에 ‘제인 오스틴’이라는 창조적 예술가의 혼을 입혀 도시 경쟁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배스의 역사는 1세기경 브리튼 섬을 지배한 로마군이 개발한 온천 도시에서 시작됐다. 로마가 3세기경 개척한 독일 남서부의 온천 휴양지 ‘바덴바덴’과 비슷한 유래다. 배스는 18세기 영국의 앤 여왕이 온천욕을 즐기기 위해 자주 방문하면서 가장 인기 있는 온천 휴양도시로 떠올랐다. 제인 오스틴도 당시 이 도시에 살았다. 소설에 나오듯 당시 유럽 귀족들의 사교장 역할을 한 배스는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기 위한 귀족 자제들로 넘쳐났다.
 
도시의 문화 자산도 풍부하다. 로마 시대 대형 온천장이었던 ‘로만 배스’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16세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배스 수도원’과 18세기 후반 존 우드의 설계로 건립된 ‘로열 크레센트’도 유명하다.
 
고대의 역사 유적과 중세의 건축물, 근세의 유럽 사교 문화가 공존했던 배스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영국 남부 햄프셔 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나 25세까지 살았으며, 윈체스터에서 사망했다. 말년에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곳은 햄프셔 주 초턴이다. 이곳에는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2층 집이 박물관으로 꾸며져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인구 400명 정도의 이 작은 시골 도시에 매년 3만여 명의 관광객이 이 박물관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는 배스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제인 오스틴은 1800∼1806년까지 6년 동안 배스에서 살았다. 이때 배스의 사교 문화를 접했다. 이 경험이 그녀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겼다. 유작인 <노생거 사원>과 <설득>의 주요 배경이 이 도시다. 작가가 오랜 기간 살았던 지역보다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지역이 관광객에게는 더 매력적일 수 있다.
 
배스는 이 점에 주목했다. 배스의 ‘제인 오스틴 센터’ 디렉터로 일했던 데이비드 볼독은 도시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아이디어로 작가를 떠올렸고, 2001년 ‘제인 오스틴 축제’가 처음 열렸다. 초턴과 달리 도시가 가진 오랜 역사와 문화적 자산에 제인 오스틴이라는 콘텐츠를 입힌 것이다.
 
 배스의 중세분위기가 풍기는 거리. 제인 오스틴 축제가 열리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과 배스의 시민들이 당시의 복장으로 갈아 입고 소설 속의 분위기에 빠진다.


매년 9월 하순이면 배스에서는 ‘제인 오스틴 축제(www.janeausten.co.uk)’의 막이 오른다. 첫째 토요일에 18세기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 행진을 펼치며 축제가 시작된다. 극장 공연, 콘서트, 야간 문화 행사, 음식, 댄스, 워킹 투어 등 다채로운 행사들도 이어진다. 이 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광객의 참여다. 관광객들은 18세기 의상을 유료로 빌려 거리 행진 등에 참가할 수 있다. 행사가 예약제로 진행되기 때문에 티켓이 매진되면 이벤트에 참가할 수 없다. 예약은 필수다. 2008년 10일간 진행된 축제 기간에는 행사 티켓의 98%가 팔렸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올해는 9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린다.
 
배스의 또 다른 매력은 ‘걷기’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에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도시를 걸어서 한 시간 반 정도 둘러보는 유료 워킹투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영국 여느 도시처럼 빨간 2층 버스를 타고 ‘시티투어’를 할 수도 있다. 도시를 걷다 보면 제인 오스틴이 소설에서 묘사한 건물과 정경에 푹 빠져들게 된다. 그녀가 좋아했던 에이번 강 산책로를 직접 걸어볼 수도 있다.
오스틴이 실제 살았던 게이 스트리트에 마련된 제인 오스틴 센터에서는 관련 책, DVD, 음악 CD 외에도 당시 의상과 액세서리, 보석, 부채, 레이스, 카드 등 다양한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다. 온라인 구매(giftshop.janeausten.co.uk)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도 제인 오스틴과 같은 여류 국민 작가가 있다. 지난해 별세한 박경리(1926∼2008) 선생의 삶과 작품 세계는 한국 현대사의 애환과 한국인의 삶을 대변한다. 박경리 선생은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하동의 평사리를 배경으로 <토지>를 썼다. 작품 활동은 강원도 원주에서 주로 했고, 서울에서 타계했다. 하동에는 <토지> TV 드라마 세트장이 있고, 원주에는 토지문학공원과 토지문학관이 있다. 원주시는 작가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공간을 빌려주고, 토지문학공원을 둘러보는 시티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영국의 소도시 배스가 뒤늦게나마 2001년 제인 오스틴을 테마로 지역 축제를 시작해 작가의 삶을 기리고 도시의 차별화를 이뤘듯, 우리 지방자치단체도 ‘박경리 축제’를 열면 어떨까. 박경리 선생의 삶과 작품이 녹아 있는 통영, 하동, 원주가 협조해 동시에 축제를 열어도 좋을 것이다. 선생이 토지를 탈고한 8월 15일 무렵이면 더 좋겠다. 
 
편집자주 한국 최고의 마케팅 사례 연구 전문가로 꼽히는 김민주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가 전 세계 도시의 혁신 사례를 분석한 ‘City Innovation’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급격한 환경 변화와 거센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도시를 운영한 사례는 행정 전문가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자들에게도 전략과 조직 운영, 리더십 등과 관련해 좋은 교훈을 줍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필자는 마케팅 컨설팅 회사인 리드앤리더 대표이자, 비즈니스 사례 사이트인 이마스(emars.co.kr)의 대표 운영자다. 서울대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은행과 SK에너지에서 근무했고 건국대 겸임교수를 지냈다. <로하스 경제학> <글로벌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하인리히 법칙> 등의 저서와 <깨진 유리창 법칙>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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