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3. 차별 없는 직장 문화 구축 위한 ‘젠더 중립성’

4차 산업혁명 키워드는 ‘초개인화’
이젠, 남녀 아닌 개성-성향 존중을

306호 (2020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젠더 중립성은 젠더의 역할을 구분 짓는 언어, 정책, 사회적 제도, 생각, 개념 등에 반대하는 것이다. 즉, 남성과 여성의 구분 없이 각자의 개성과 성향만으로 인정하고 공존한다. 젠더 중립성은 더 이상 남성에게 남자답고 의리 있는 동료를 강요하지 않으며, 여성에게 싹싹하고 센스 있는 동료를 기대하지 않는다. 서로를 구분 짓지 않기에 서로를 비하하거나 비난할 필요도 없다. 약자에 대한 우월 의식을 갖기도 어려워진다. 이렇듯 성(性)의 다름에서 탈피할 수 있는 사고를 하는 것이 직장 내 차별적 요소를 없앨 수 있는 첫걸음이다. 차별적 요소가 사라지면 조직 내에서 성을 근거로 한 폭력이 제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가히 ‘젠더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젠더 간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김치녀(한국 여성이 남성의 돈이나 재력으로 신분 상승을 노린다고 비하하는 언어) , 된장녀(명품 등을 소비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뜻), 한남충(한국 남성 전체를 비하하는 말), 꽁치남(공짜를 좋아하고 가성비를 따지는 남자를 비하하는 말) 등 상대방 젠더를 조롱하고 비방하는 혐오의 언어는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누적된 성차별은 여성의 분노를 용암처럼 들끓게 했고 이는 상대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하는 미러링(mirroring)으로, 다시 미러링의 미러링으로 이어져 젠더 갈등의 골을 더 깊어지게 하고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생물학적 성(sex)과 달리 ‘젠더(gender)’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실천되는 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젠더의 의미는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구시대적 젠더 인식은 집요하고 치밀하게 우리의 일상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한 인간을 젠더를 떠나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당연하고도 쉬운 명제가 이토록 실천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젠더가 곧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와 같은 제도를 통해 다수의 합의로 창출되는 권력과 달리 젠더 권력은 남성으로 태어나 남성성을 수행하기만 하면 주어진다. 특정 집단이 독점하고 있던 권력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은 언제나 진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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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남성들이 무슨 권력을 그리 많이 누려왔느냐고. 남자들은 군대도 다녀와야지, 뼈 빠지게 일해서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지, 희생하는 건 오히려 남자들이라고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맞다. 젠더권력은 비록 여성에게만큼은 아닐지라도, 남성에게 또한 억압적으로 작용한다. 젠더 권력을 누리기 위해 남성들은 끝없이 남성성을 증명해야 하는 삶을 산다. 강한 척, 대범한 척, 용감한 척하느라 있는 그대로의 자아로 살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남녀 모두가 패자가 되는 젠더 전쟁을 끝내고 불필요하게 소모되는 사회적 에너지를 보다 건설적인 일에 쏟아부을 수 있을까? 2018년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성 평등이 매우 후진적인 나라로, 만약 성 평등을 이룩한다면 2025년까지 172조 원의 국내총생산(GDP)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전 세계가 4차 산업혁명의 무한 경쟁을 고민하는 요즘, 성 평등은 어쩌면 이제 인권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됐는지도 모른다. 젠더 갈등이 더 이상 성장 동력에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우리 안에 내면화된 성차별적 인식을 혁파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기업이 고질적으로 겪고 있는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약자와 강자를 구분하고 이로 인해 폭력을 가할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젠더 감수성은 ‘프로 불편러’들의 것?

젠더 권력은 성폭력과 같이 명명백백히 그릇된 범죄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너무 당연해서 그것이 문제인지조차 모르게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교육학자 진 킬본의 저서 『부드럽게 여성을 죽이는 법』은 광고가 어떻게 여성에게 남성 중심의 젠더 권력을 은밀하게 가르치고 확대 재생산해 결국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가를 파헤친다. 젠더 권력을 유지하는 손쉬운 방법은 여성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것보다 여성이 스스로 성차별적 인식을 내면화해 젠더 권력에 복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을 혁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젠더 감수성’이다. ‘젠더 감수성’이라는 용어는 ‘gender sensitivity’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감수성(感受性)이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이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을 의미한다. 즉,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은 외부 세계의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는 것이고, 감수성이 무디다는 것은 큰 자극에도 별 반응이 없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젠더 감수성’이라는 용어는 예민한 사람(주로 여성)들이 별말 아닌 젠더 관련 발언에도 이른바 ‘발끈’하는 성질로 오인되곤 한다.

문득 젠더 감수성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누가, 왜, 사용하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성차별에 분노하는 많은 사람을 일순간 까탈스럽고 예민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용어에 대해 적잖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용어의 유래를 속 시원히 설명해주는 문서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1995년 제4차 유엔 세계베이징여성대회가 성 평등 담론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일종의 분수령이 됐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성 인지(gender awareness), 젠더 감수성 같은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 주류화는 쉽게 말해 세상이 운영되는 여러 규칙 중에 성 평등의 원칙이 주류가 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주로 정책 과정 전반에 성 평등적 시각이 반영돼야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무조건 여성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의 정책이 성 평등에 대한 아무런 고민 없이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에 근거해 관성적으로 마련됐다면 앞으로는 성 평등이 정책 결정의 중요한 요소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육아휴직은 대표적인 여성 친화적 제도로 평가받아 왔다. 아주 오랫동안 육아휴직은 여성만 사용하는 제도였고, 성 평등에 남다른 철학을 지닌 고용주가 선심 쓰듯 허락하는 제도였다.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라는 매우 자연스러운 생애주기별 발달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여자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여자들은 이래서 뽑으면 안 된다”는 억울한 누명을 감수하며 휴직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육아는 여성이 아닌 부부가 젠더에 관계없이 수행해야 할 과업이다. 육아휴직제도는 여성 친화적 제도라기보다는 가족 친화적 제도이며, 여성과 남성이 동일하게 향유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성 평등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육아휴직을 여성 친화적 제도라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여성 차별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젠더 감수성’인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성 평등 담론이 ‘감수성’이라는 용어에 갇혀 ‘프로 불편러’ 여성들의 예민한 역린 정도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젠더 감수성’을 넘어 ‘젠더 중립성(gender neutrality)’의 개념이 논의되기도 한다. 젠더 중립성은 젠더의 역할을 구분 짓는 언어, 정책, 사회적 제도, 생각, 개념 등에 반대하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여성 승무원을 지칭하는 ‘스튜어디스(stewardess)’라는 말 대신 ‘항공 승무원(flight attendant)’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항공 승무원은 여성의 직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이에 속한다.

물론 젠더 중립성은 단순히 용어 몇 가지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또한 기존의 성차별 구조가 공고한 상황에서 젠더 중립성을 논하는 것은 오히려 젠더 차별에 대한 몰이해, 또는 젠더맹(gender blind)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 또한 적지 않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해 없이 획일적으로 같은 기준과 잣대를 적용해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용어가 무엇이 됐든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바는 젠더에 따라 차별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젠더 감수성이 강조되는 까닭은 결국 젠더적 정의(gender justice)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젠더적 정의는 여성만이 쟁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성 차별적으로 구조화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젠더적 정의를 실현하는 주요한 목표가 되겠지만 여성 못지않게 남성에게 얽어매어진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누가 더 피해자인가’를 경쟁적으로 파헤치는 여혐과 남혐의 악순환을 끊고, 양성이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만끽하는 삶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것이 젠더적 정의 실현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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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모두가 고통받는 젠더 불평등

그동안 성 평등 논의는 늘 여성들만의 것으로 여겨졌다. 여성을 남성보다 더 대접해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에도 성 평등 정책은 ‘여성 정책’으로, 성 평등 운동은 ‘여성 운동’으로 이름 붙여졌다. 여성들끼리만 추진되고 공유되는 성 평등은 절반의 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다. 여성의 의미는 남성을 배제하고는 정의될 수 없다. 구조주의 창시자 레비 스트로스는 ‘이원적 대립’을 통해서만이 의미가 발생한다고 봤다. 즉, 남성이 없다면 여성은 정의되기 어렵고, 역으로 여성이 없다면 남성도 정의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남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봐야 여성의 문제도 해결이 가능하다.

젠더사회학을 연구하는 남성 연구자 중 하나인 존 매키니즈(John MacInnes)는 저서 『남성성의 종말(The End of Masculinity)』에서 남성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시대상을 반영한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봤다. 그는 어떠한 특징을 ‘남성성’이라고 인지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탐구하면서 남성성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다만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건장한 신체, 강한 성격, 의지력, 용기, 명예, 경제적 능력과 같은 덕목이 남성성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남성상을 희구하는 시대상이 투영됐을 뿐이다.

그렇게 정의된 남성성이 과연 남성들에게 권력과 자유만을 허락하느냐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허약한 남성, 소심한 남성, 돈 없는 남성, 명예 없는 남성, 겁 많은 남성 등 이른바 ‘헤게모니적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에 부합하지 않는 남성들을 모두 ‘루저’로 만들어버리는 오늘날의 성별 고정관념은 분명 남성과 여성 모두를 고통받게 하고 있다. 성 평등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바로 잡아 남성과 여성을 모두 해방시키는 것이 돼야 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국제기구들은 성 평등 파트너로서의 남성의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목소리만으로는 성 평등 증진 노력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2004년 제48차 유엔여성지위위원회(UN 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는 ‘성 평등 달성을 위한 남성과 소년의 역할(The role of men and boys in achieving gender equality)’을 주요 의제로 상정하고 동일한 제목의 ‘합의결론(agreed conclusion)’을 도출했다. 이 문서는 성 평등 달성에 남성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강조하면서 성별 고정관념 타파, 성 상품화 방지, 에이즈(AIDS) 치료와 예방, 젠더 기반 폭력 근절 등에 있어 남성과 소년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회원국 정부가 장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러한 논의는 단지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남성이 ‘조력자’가 돼 달라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성별 불평등의 피해는 남성들, 그리고 소년들에게도 고스란히 전가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성세대 남성들은 많은 경우 중•고등학생 시절 교사의 폭력적 체벌을 경험했으며, 군 복무를 거치면서 폭력과 서열의 문화에 길들었다. 이렇게 일상화된 폭력은 남성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힘겨루기’에 대한 강박을 야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 사회에서 취업, 결혼, 가정은 남성의 ‘능력’을 테스트받는 일종의 ‘힘겨루기’ 관문으로 작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성들이 갖는 그 평범한 욕구라는 것도 결국은 ‘돈 버는 아버지, 살림하는 어머니, 자녀(들)’로 구성된 이른바 ‘정상 가족’이라는 허상이 무비판적으로 강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성을 좌절시키는 것은 김치녀가 아니라 남성의 능력 또는 성과를 남성성과 등치하는 한국 사회의 왜곡된 젠더 인식에 있다. 군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남성성이 증명되고, 고연봉이라는 경제적 능력을 획득해야만 남성성이 증명되는 현실에 우리는 좀 더 분노의 초점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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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억 명의 인구, 77억 개의 젠더?

여성학자인 주디스 버틀러는 저서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에서 성별이란 남성과 여성으로 무 자르듯 양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페미니즘 논의가 여성 내부에 존재하는 무수한 다양성을 간과해 왔다고 지적한다. 세상에는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한 젠더가 존재하며, 개인은 그중 자신이 원하는 젠더를 선택해 ‘수행(perform)’한다고 본 것이다. 버틀러의 논의는 정형화된 성별 고정관념과 여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끼워 맞춰야 하는 남녀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77억 명의 인구가 모두 다른 얼굴, 체격, 성향, 성격을 가졌는데 이 많은 사람을 단 2개의 젠더로 분류해 특정한 모습과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성 평등이 이뤄지려면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형태의 젠더를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키 작은 남자, 깡마른 남자, 리더십 없는 남자, 소심한 남자, 모험을 싫어하는 남자, 살림하는 남자, 뜨개질하는 남자, 화장하는 남자, 분홍색 좋아하는 남자 등 소위 ‘대장부’로 분류되지 않는 남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할 용기, 마찬가지로 덩치 큰 여자, 목소리 큰 여자, 모험심 강한 여자, 카리스마 있는 여자, 돈 잘 버는 여자, 살림 못하는 여자, 힘센 여자, 자기주장 강한 여자, 애교 없는 여자, 무뚝뚝한 여자 등 ‘천생 여자’로 분류되지 않는 여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할 용기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용기를 자신이 속한 젠더뿐만 아니라 상대방 젠더에 대해 갖는 것, 즉 남성 내부의 다양성을 여성들이 인정하고, 여성 내부의 다양성을 남성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여성 내부의 다양성을 인정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여 왔지만 정작 남성 내부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는지, 남성들 역시 남성 내부의 다양성이 무시당하는 것에 분노하고 오히려 남성들이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여성 내부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점검해 볼 일이다.

개그우먼 김숙은 ‘가모장’ 콘셉트로 한때 인기를 끌었다. 그는 2016년 개그맨 윤정수와 가상 결혼 프로그램에 부부로 출연해 수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조신하게 살림하는 남자가 최고” “그깟 돈이야 내가 벌면 되지” “어디 남자가 집구석에서 인상을 구기고 있냐” “남자가 돈 쓰는 거 아니야” 등 기존의 젠더 고정관념을 뒤바꾼 언행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반면 윤정수는 청소와 빨래를 즐겨 하고 외국에 나갈 때마다 예쁜 그릇을 ‘깔별로’ 쟁이는 ‘윤 주부’ 콘셉트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러한 ‘미러링’은 성별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우리가 그동안 수행해온 (또는 강요당한) 젠더 역할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때로 폭력적이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가부장제가 억압적이라면 성별만 바뀐 가모장제 또한 억압적일 것이다. 따라서 ‘미러링’은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 가부장제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 가모장제를 들어 앉히는 게 목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숙과 윤정수의 유쾌한 미러링은 과연 성별 고정관념에 들어맞지 않는 여성과 남성을 우리가 실제로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지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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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의 성 평등

그럼에도 여전히 일터에서의 젠더 평등은 어렵고 민감한 주제다. 여성과 남성의 구분 없이 함께 일하고 존중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 같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젠더 평등의 대의가 오인되는 대표적인 예가 펜스룰이다. 펜스룰은 2002년 당시 연방하원의원이었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아내를 제외한 여성과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즉, 성 추문 발생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아예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굵직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빠짐없이 해결책으로 논의되는 것이 바로 이 펜스룰이다. 남성 상사를 자주 만나야 하는 보직에는 여성을 배제해야 한다거나 이제부터 여자 비서 대신 남자 비서를 두자는 식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의 협업을 원천 봉쇄하는 것은 직장 내 성 평등을 달성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펜스룰은 오히려 남성으로 하여금 여성을 동료로 바라보기보다 데이트가 가능한,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 한 팀이 돼 출장 가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것 역시 남녀 사이에는 언제든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여자 직원에게 ‘여자니까’ 출장을 보내지 않는 것, 지방 발령을 보내지 않는 것, 남자 직원에게 ‘남자니까’ 주말 근무를 시키는 것, 외근을 강요하는 것 모두 업무의 범주를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펜스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일터에서 남녀의 영역을 완벽히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서로에 대한 불신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조직 구성원이 젠더의 구분 없이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며 소통하고 협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조직의 생산성 향상의 측면에서도 훨씬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이는 직장 동료들이 서로에게 폭력적이지 않고,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성 평등 문화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산업계다. 2019년 12월을 기준으로 한국의 경제 활동 인구는 2800만 명가량이다. 집을 제외하고 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아마 직장일 것이다.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당연히 직장에서 겪게 되는 겪게 되는 젠더 인식이 사람들의 젠더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직장 내 성은 조직 구성원에게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에너지 소모를 막아준다는 점에서도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 성차별적 조직문화와 근무 환경이 야기하는 스트레스,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발생으로 인한 갈등,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펜스룰, 이로 인한 불공정 시비, 구성원들의 사기 저하, 그리고 기업의 이미지 하락으로 인한 손실 등 젠더 불평등은 조직의 ‘리스크’로 작용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내가 가장 나다울 때’ 생각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젠더 다양성을 존중하는 조직문화는 생산성 향상에 핵심이다.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이 불필요하게 남성적 사고와 방식을 따라야 한다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조직의 발전을 이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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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과 젠더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한국은 다른 선진국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경제 발전을 반세기 만에 달성했다.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장시간 노동하는 아버지, 가족 구성원의 돌봄을 전담하는 전업주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로 구성된 핵가족이었다. 아버지의 노동력은 전적으로 산업 현장에 투입됐고, 가족 구성원의 삶 역시 아버지의 노동이 최대의 효율을 거두는 방식으로 기획됐다. 그만큼 산업 구조가 그 사회의 젠더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은 젠더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또는, 어떠한 젠더 구조가 4차 산업혁명을 가장 효율적으로 지지할 수 있을 것인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적 키워드 중 하나는 ‘초개인화(hyper-personalization)’다. 빅데이터, 인공지능의 발달로 소비자 개인의 행동과 수요를 더욱 정확하게 파악해 개인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기업이 살아남는 중요한 전략이 될 수밖에 없다. 기업은 이제 소비자를 특정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기보다 개인으로 파악해야 한다. 예전에는 화장품 회사가 ‘집단으로서의’ 여성의 니즈(needs)만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지금은 소비자의 젠더보다 그 사람 ‘개인’의 소비 패턴과 외모 인식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쉽게 말해, A라는 사람의 외모 콤플렉스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A라는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것이다. 3D프린팅 기술로 세상에서 하나뿐인 개인 맞춤형 화장품을 생산하는 시대에 그 소비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여성과 남성을 양분해 “여성은 이렇다(혹은 이러해야 한다)” “남성은 이렇다(혹은 이러해야 한다)”고 단정 짓는 젠더 인식은 기업의 사업적 판단을 흐리게 할 가능성이 높다. 문명 없던 수렵•채집 사회에서야 남성이 사냥과 전쟁을, 여성이 채집과 육아를 담당했다지만 오늘날과 같은 정보혁명의 시대에 남녀의 특성을 구분 지어 역할을 나누고 젠더에 따라 권력을 불공평하게 나누는 가부장적 관행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젠더가 권력이 아닌 개성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여자다운 여자, 남자다운 여자,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남자가 모두 공평하게 자유로울 때 4차 산업혁명은 폭발적인 힘으로 인류의 역사를 견인하게 될 것이다.


김수경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 sookim@kinu.or.kr
필자는 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스탠퍼드대(Stanford University)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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