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Article at a Glance – HR,인문학
‘청백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조선 초기 명재상 황희는 사실 청렴함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태종 시대 최고 실세 중 하나인 ‘지신사’를 거쳐 세종시대에 거의 20년간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황희에게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조정능력’이었다. 왕의 개혁과 정책이 현실에 제대로 착근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조정했고, 신하들 사이에서의 논쟁을 조율해가며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처럼 황희는 비록 ‘청백리’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2인자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덕목이자 능력, 바로 ‘탁월한 조정능력’으로 조선 최고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 ‘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황희는 청백리가 아니다?
최근 총리 인사와 개각 등과 관련해 “지금 같은 검증 시스템에서는 황희(黃喜) 정승이 와도 통과할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됐다. 총리를 비롯한 장관 후보자에게 요구되는 기준이 너무 높고 엄격해서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황희라도 요즘의 잣대를 댄다면 인준을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잘못됐다. 청문회가 지금보다 더 쉬웠다고 해도 황희는 아마 통과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황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신선 같은 수염을 기른 인자한 노(老) 정승, 그리고 청백리 재상이다. 황희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져 온다. “붓으로 먹을 찍어 글씨를 쓰려고 하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쌌으나 아무런 노여운 기색도 없이 손수 그것을 훔칠 따름이었다.”1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의 어린아이들이 들어와서 어느 놈은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또 어떤 놈은 공의 옷을 밟으며 술상 위의 안주를 모두 움켜쥐고서 먹고, 또 공을 때리기도 하니, 공이 말하기를 ‘아프다. 아파’라고 할 뿐이었다. 이 어린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아이들이었다”2 라든가, 어느 날 세종이 미복 차림으로 황희의 집을 방문했다가 청빈하고 검소한 모습에 감동해 새 집을 하사했다3 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스토리들이 정말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 내내 황희가 재상의 사표(師表)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하는 재상상이 황희라는 인물에 투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종의 구전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 것이다. 더욱이 황희가 온화하고 관대했다는 것은 당시의 기록 곳곳에 등장하지만 청백리라는 부분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의정부사 황희 졸기(卒記)’에 보면 그는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비판을 받았다”고 돼 있다.4 주로 청탁에 관한 내용이 많은데 “친한 사람을 주로 추천하는 등 인사에 공정하지 못했고”5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챙겼다”는 비난도 받았다.6 그는 대사헌을 겸하고 있던 세종 7년, 남원부사로부터 유지(油紙)로 만든 안롱(鞍籠·수레나 가마 등을 덮는 우비)을 받았다가 자수했으며 좌의정으로 재임하던 세종 9년에는 소위 ‘서달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 자신의 사위이자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인 서달이 신창현의 고을 아전을 때려 죽인 일이 벌어지자 사건을 덮어달라고 우의정 맹사성을 통해 해당 고을 수령에게 청탁했다가 진상을 재조사하도록 지시한 세종의 명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 투옥된 것이다.7 세종 12년에는 관리 소홀로 말 1000마리를 죽게 만든 감목관(監牧官·목장 관리 책임자) 태석균의 죄를 완화시켜주려고 형조에게 사적으로 부탁을 했다가 “법을 맡은 사람과의 사적인 인연을 기회로 공공연하게 청탁을 행한다”며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의정으로 임명되기 몇 달 전인 세종 13년 4월에는 교하현감에게 관의 소유인 둔전을 달라고 요청해 얻어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크게 망신을 당한다.
황희의 아들들도 하나같이 문제를 일으켰다. 서자 황중생이 세자궁의 재물을 훔치다 발각됐고, 이 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적자인 황보신도 함께 재물을 착복한 것이 드러나 처벌을 받았다.8 이어 황보신의 형인 황치신이 죄를 지어 몰수되는 아우의 기름진 과전을 자신의 과전과 바꿔치기하다가 걸려 파면된다.9 재산 문제로 잡음이 많았던 것은 막내아들인 황수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세조 때 영의정에까지 올랐지만 “뇌물이 폭주했으며 한 이랑의 밭이나 한 사람의 노복까지도 탐하고 다투어서 여러 번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10 고 <실록>에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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