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HR
18세기 조선의 한양은 인구 집중에 따른 도시 문제에 직면했다. 빈민들이 청계천 주변으로 대거 몰려들면서 하천의 면적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들이 버리는 쓰레기가 하천을 막으면서 홍수와 전염병 등 각종 문제가 발생했다. 해결책은 청계천을 파내 물길을 통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쉽지 않은 대공사였다. 당시 조선의 관행대로라면 청계천 준설공사는 지역 주민들이 감당해야 할 사안이었지만 워낙 대공사다 보니 청계천 주변 인력만으론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영조는 무리하게 공사를 밀어붙이지 않고 여론 몰이에 나섰다.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다 놓고 공청회를 열었으며, 청계천 주변을 시찰하며 직접 백성의 소리를 듣고 다녔다. 청계천 프로젝트 실현을 위해 영조는 무려 4년을 기다리며 여론 조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청계천 공사가 한양 전체 주민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백성들에게 납득시켰고, 한양은 물론 제주도의 공인들까지 공사에 자원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19세기 중반 런던에서 시민 수십만 명이 죽고 병드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원인은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해서였다. 1700년과 1830년 사이에 영국의 인구는 510만 명에서 133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산업화로 인해 온갖 종류의 사람들, 심지어 외국인까지 런던으로 모여들었다. 런던은 로마시대 이전부터 존재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였지만 수천 년 만에 도시가 감당할 수 있는 인구수를 넘어버렸다. 런던에서 배출되는 오물과 쓰레기를 자연 하천들이 감당하지 못해 지류가 막혔고, 강변은 오물로 뒤덮여 하루 종일 악취가 진동했다. 런던시민이 마시는 우물도 템스 강과 연결돼 있어서 하수와 상수가 뒤섞였다. 오염된 우물과 템스 강 지류의 물을 마셨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가 퍼졌다. 전염병도 전염병이지만 악취로 인해 구역질이 나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런던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임토목기사 바잘게트의 지휘하에 대규모 하수도 시설을 구축했다. 이때부터 런던, 파리 같은 대도시에 상하수도 공사가 필수적인 조건이 됐다.
인구 집중으로 도시문제에 직면한 18세기 한양
조선의 한양도 18세기부터 인구 집중에 의한 도시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한양의 상하수도는 청계천이었다. 조선시대의 청계천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청계천과는 많이 달랐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청계천의 본류다. 조선시대의 청계천은 남북으로 거미줄처럼 지류가 뻗어 있었다. 덕분에 도성 안의 모든 주민이 이 물을 식수로 사용했고 빨래도 했으며 하수로 내보내기도 했다. 상하수도가 분리돼 있지 않기 때문에 청계천이 수질을 유지하려면 인구가 적당해야 했고 유속이 빨라야 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조선에서도 한양의 인구가 급증했다.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7∼18세기는 세계적으로 인구 폭증의 시기였다. 조선에서도 인구가 급증하면서 한양 인구가 대폭 증가했다. 또 상업이 발달하면서 한양에 유동인구가 증가하고, 농촌 분화로 농업에서 이탈한 빈민들이 도시로 대거 올라왔다.
이들이 몰려든 곳이 바로 청계천변이었다. 식수를 얻어 생활하기 편했고 하천가의 빈 땅에서 경작을 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이들로 인해 하천의 면적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한양 주변의 산들에서 비만 오면 토사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인구 급증으로 장작 수요가 크게 늘어 산이 거의 민둥산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하필 이 당시 방바닥 전체를 덥히는 전면 온돌이 보급되면서 난방을 위한 나무의 소비가 갑작스레 늘어난 탓도 있었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하천에 마구 버리는 것도 문제였다. 심지어 죽은 짐승과 굶어 죽은 시신, 무연고 시신까지도 몰래 버렸다. 결국 물길이 막혀 하상(河床)이 높아지자 홍수가 자주 발생했다. 급격히 불어난 물은 동대문 쪽 성벽의 축대를 모두 무너뜨렸고 집도 떠내려가 버렸다. 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해 인명피해가 났는데,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런던에서 벌어진 대참사가 발생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대책은 청계천을 파내서 물길을 통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대공사였다.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사업을 할 때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다. 그 당시 조선시대에는 중장비도 없었다. 모든 흙과 오물을 일일이 사람들의 손으로 파내서 옮겨야 했다. 필요한 인원이 수십만 명이어서 한양 주민 전부를 동원해야 할 정도였다. 이들의 인건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조선의 재정은 이런 대공사를 할 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원래 조선의 관행은 ‘내 집 앞의 눈은 내가 치워야 한다’였다. 즉 도로나 다리, 축성 등은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해당 지역 주민들의 부역으로 대신했다. 이 원칙대로라면 청계천을 파내는 것은 청계천 주변 사람들만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청계천이 너무 심하게 막혀서 주변 사람들만으로는 청계천 준설공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청계천을 완전히 새롭게 정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양 주민 모두를 동원하게 되면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청계천 준설 공사 위해 여론몰이에 나선 영조
영조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1754년 3월, 영조는 한양의 각 지역에서 주민대표자를 궁궐로 불러 청계천 준설공사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랬더니 공사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영조는 주변에 있던 호위 군사들과 궁중악단의 악사들에게 눈을 돌렸다. 청계천 준설에 찬성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앉고 반대하는 사람은 일어서라고 말했다. 호위군사와 악사들은 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영조는 그들이 눈치껏 찬성 분위기를 조성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일종의 호의적 여론집단인 셈이었다. 영조의 예상대로 이들은 즉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장구를 메고 있던 악사 한 명이 초를 쳤다. 그는 뻣뻣하게 서서 이렇게 말했다. “개천을 파든 안파든 나는 상관없습니다.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가는 것이 안 됐기는 하지만 그건 그곳에 사는 집주인의 문제입니다.”
영조는 이 악공에게 솔직하게 얘기를 했다고 칭찬하고 포상을 했다. 그러나 속은 말도 못하게 쓰렸을 것이다. 이 눈치 없는 악사 한 명으로 인해 여론몰이를 해보려던 이날의 행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영조는 좌절하지 않고 청계천 공사의 필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했다. 영조는 과거 시험에서 ‘청계천 공사의 장단점을 논술하시오’라는 문제를 냈다. 그리고 일등에게는 바로 관직을 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하는 집단이 대학생들이다. 조선시대의 대학은 성균관이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서 또 청계천 문제를 가지고 공청회를 벌였다. 그외에도 청계천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설득하는 작업을 3∼4년간 지속했다. 1752년 1월, 영조는 광통교에 나가 청계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영조가 “나는 그대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보니 다리가 심하게 막혀서 치워내고 싶은데, 괜찮겠는가?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라고 운을 떼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모두 우리를 위한 일인데 누가 싫어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렇게 대답했을 수도 있고, 관원들이 미리 찬성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았을 수도 있다. 영조는 이것도 예상하고 즉석에서 사람들을 만나거나 신임하는 승지를 시켜서 당장 사람을 불러 모으게 하기도 했다.
조선의 왕 중에서 이렇게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왕은 영조가 처음이었다. 마침내 1760년 2월18일에 대망의 청계천 공사가 시작됐다. 이날도 영조는 현장에 나와 직접 첫 삽을 떴다. 이런 세리머니는 요즘엔 흔하지만 조선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말에 공사를 시작하는 것을 ‘첫 삽을 뜬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과 착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행사가 영조의 청계천 공사 착공식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
공사를 시작한 뒤에도 공사현장을 공개해 주민들이 공사현장을 보고 체감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공사현장을 공개하는 것은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영조에게는 청계천 공사의 필요성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자신도 직접 현장에 나가서 백성들과 섞여 앉아서 공사를 관람했다.
결국 청계천 공사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동원한 사람을 제외하고 자원자만 한양 전 지역에서 7000∼8000명이 몰려들었다. 나중에는 경기도 사람과 제주도의 공인들까지 자원해 모두 1만여 명에 육박했다. 청계천 공사의 성공 비결은 청계천 준설이 청계천 주변 사람들만의 이익이 아니라 한양 전체 주민들의 이익이라는 점을 납득하게 한 것이다.
청계천 공사의 성공 비결은 청계천 준설이 청계천 주변 사람들만의 이익이 아니라 한양 전체 주민들의 이익이라는 점을 납득하게 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성공 vs. 지속적인 성공 기반 조성
우리가 보통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사업의 목적과 필요성은 무엇이고, 비용은 얼마나 들지, 예상 수익은 얼마나 될지 등을 계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러나 정작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해당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하도록 하는 데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오늘날 많은 기업이 직원들에게 창의와 혁신을 요구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 프로젝트가 나의 일이고 내게 구체적인 이익이 될 때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법이다. 무턱대고 창의와 혁신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구성원들이 창의와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영조가 중흥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공감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이런 말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공사를 밀어붙이고 싶다”고. 즉 공사의 필요성과 정당성은 확신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공감대가 확산될 때까지 기다렸다. 영조는 4년 동안 청계천만 생각하면 잠도 못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한다. 그래도 영조는 꾹 참고 기다렸다. 왜? 프로젝트는 성공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가장 큰 성공은 모두가 그 이익을 공감하고 공유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성공이 그 프로젝트 하나만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프로젝트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밀어붙이면 프로젝트 하나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조직원은 지치고 불만은 누적돼 다음 프로젝트는 탄력을 잃게 된다.
청계천 프로젝트는 공감에 성공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영조가 새로운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영조는 노년에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의 가장 성공적인 업적이 청계천 정비사업이다”라고. 이 말은 결코 청계천의 물길을 뚫었다는 토목공사 하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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