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독과 몰입
지난 10월18일 만화 사이트 ‘도그하우스 다이어리’가 키워드 하나로 지구촌 각 나라의 특성을 정리한 것이 화제가 됐다. 예를 들어 미국은 세계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잔디 깎기 기계로 인한 사망자 수’에서 세계 최고다. 일본은 ‘로봇’, 러시아는 ‘라즈베리’와 ‘핵탄두’, 인도는 ‘영화’, 북한은 ‘검열’이라는 키워드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여기서 한국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바로 ‘일중독(workaholics)’이었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세계에 알려지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일중독은 초고속 경제 성장의 부산물이다. 한국전쟁 직후 국민 1인당 69달러에 불과했던 GDP를 2010년 2만 달러까지 끌어올렸고, 나라를 휘청거리게 했던 금융위기도 단기간에 극복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제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됐다. 부자 클럽으로 불리는 OECD 회원국이 된 지도 17년이 지났고 세계적으로 이름값을 인정받는 브랜드와 상품들도 적지 않게 갖게 됐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한류(韓流)는 지구촌 반대편의 이방인들까지 열광시키고 있다. 이런 많은 것들을 이뤄내기 위해 일중독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을까?
경제의 외연이 커지고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만큼 보통 사람의 행복도 커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꼭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해마다 줄어든다. 1인 가구 수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늘고 있고(1990년 102만 명 → 2011년 436만 명), 이혼과 자살, 노령인구 역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한정된 정규직 일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스마트폰 때문에 얼굴을 마주하는 인간 관계가 상당 부분 소셜미디어로 치환되고 있다.
과로, 스트레스, 일중독의 포로가 된 우리나라 직장인의 30.4%가 소화기 장애, 29.9%가 스트레스, 11.2%가 근골격계 질환을 겪고 있다.1 그리고 34개 OECD 회원국 중 한국은 최고의 자살률(2010년 33.5명)과 낮은 행복도(27위)를 보이고 있다.
어느 나라라도 일중독에 빠진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중독 판단 기준 자체가 여느 나라보다 높다. 2011년 기준 한국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2090시간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길다.2 일중독을 근로 시간만으로 판정하지는 않지만 이방인들의 눈에 한국 직장인들은 대부분 일중독자로 비춰진다. 더 큰 문제는 장시간 노동과 낮은 몰입이 공존하는 현실이다. 타워스왓슨이 2012년 전 세계 28개 국가에서 실시한 업무 몰입도 조사에서 한국은 응답자 18%만이 지속성 있게 몰입하는 것으로 나타나 일본과 함께 최하위를 기록했다. 일중독은 만연해 있지만 긍정적으로 업무에 몰입하는 근로자는 많지 않은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중독의 메커니즘
중독(addiction)은 어떤 물질이나 행동에 대한 갈망이나 탐닉이 의존성(dependence)을 갖는 수준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의존성이 생긴다는 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통제가 어렵고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된다는 의미다. 중독의 대상은 마약, 알코올, 니코틴 등과 같이 물질적인 것도 있고, 도박, 인터넷, 쇼핑 등의 경우처럼 행동적인 것도 있다.
1954년 캐나다 맥길대의 제임스 올즈(James Olds)와 피터 밀너(Peter Milner)가 실시한 유명한 실험에서 중독의 생리적 메커니즘이 알려졌다. 올즈와 밀너는 먼저 뇌의 변연계(limbic system) 주변 MFB(Median Forebrain Bundle) 영역에 전극을 연결한 실험용 쥐를 우리에 가두고 전극과 연결된 버튼을 제공했다. 그러자 쥐가 미친 듯이 그 버튼을 누르는 것이 확인됐다. 다음에는 같은 조건에 먹을 것이 나오게 하는 버튼을 추가한 후 굶긴 쥐를 가뒀더니 쥐는 먹을 것이 나오는 버튼은 누르지 않고 가벼운 전기 자극이 주어지는 버튼만 계속 눌러대다가 굶어 죽었다. 뒤이은 실험에서는 강한 전류가 흐르는 바닥을 지나야만 전기자극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쥐들은 발바닥에 가해지는 강한 전기 쇼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바닥을 건너가서 버튼을 눌러댔다. 어떤 어미 쥐들은 새끼를 돌보는 일조차 팽개치고 버튼 누르기에 매달리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부터 올즈와 밀너는 MFB 영역이 특정 자극에 반응해 쾌감을 느끼는 부위라고 추론, 이 영역을 쾌감중추(pleasure center)라고 명명했다. 실제로 이 부위는 도파민(dopamine)이라고 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방출되는 부위인데 같은 포유류인 인간에게도 동일하다. MFB에서의 도파민 방출에 의한 집중, 쾌감, 각성 등 효과는 성관계나 마약 복용 시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문제는 이러한 효과가 순식간에 왔다가 사라지기(면역성) 때문에 한동안 자극이 없어지면 불안해 지고(금단 현상), 때문에 끊임없이 쾌락중추를 자극하려고 시도(의존성)한다.
찰스 두히그(Charles Duhigg)의 베스트셀러 <습관의 힘(The Power of Habit)>에서는 습관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그림1>과 같이 3단계로 설명한다. 즉, 습관이 이미 형성된 사람에게 어떤 신호(Cue)가 주어지면 자동적으로 준비된 행동(Routine)을 하게 된다. 그것이 성공했을 때 기대했던 보상(Reward)이 주어지면 사람은 만족하게 되고, 이런 사이클은 더욱 강화된다는 것. 이 메커니즘은 워낙 강력해 신호가 주어졌을 때 정해진 행동을 그냥 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행동을 바꾸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저자는 조언한다.3 이 모델은 중독을 설명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의존성이 생긴 중독자에게 공허감, 불안감, 스트레스와 같은 신호(Cue)가 주어지면 자신이 빠져 있는 중독 물질이나 행위에 탐닉하게 되고 그에 따른 쾌감, 편안함, 극치감을 느끼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중독과 몰입의 구분
일중독 문제를 직시하려면 먼저 일중독과 몰입을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이 둘은 어느 정도 연장선상에 있다는 연구 결과도 많아 이를 명확히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다. 일에 빠져들면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나깨나 그것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두 가지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몰입은 집중력(attention)의 고조와 대상과 목적에 대한 동일시(identification)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설명된다. 전자에 대해 몰입 이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은 의식이 경험으로 꽉 차 있는 상태다. 이때 각각의 경험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느끼는 것,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때의 몰입은 정신적 각성과 집중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후자의 경우는 사명이나 목표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것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려고 하는 정서나 의지가 행동으로 표출된 상태다. 흔히 ‘조직 몰입’이라고 할 때는 이런 의미에서 쓰는 말이다. 쥴리 게바우어 등이 쓴 직원 몰입을 다룬 책에서는 몰입된 직원들은 “조직의 성공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정서적으로 조직 및 리더들과 강한 일체감을 느끼며, 자신 및 조직의 성과 제고를 위해 지식과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동기가 부여된”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일중독에 대한 정의는 생리학적, 사회·심리학적, 정치·경제학적등 여러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강조점이 다를 수 있지만4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잃은 채 강박적(compulsive)으로 일에 매달리는 현상으로 이해한다. 일중독은 부분적으로는 몰입과 유사하지만 몇 가지 본질적인 측면에서 다르다:
① 목적과 동기의 차이:몰입은 목표나 사명에 대한 동일시에서 출발해 과업에 전념하게 되지만 일중독은 그런 내재적 동기요인보다는 경쟁에서 승리, 외재적 보상/승진, 자기 능력 과시, 해고 또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 등 외재적 요인에 의해 강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② 자기 조절 능력 상실:독일 신경정신과 의사 피터 베르거(Peter Berger)는 일중독자와 열심히 일하는 건강한 사람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미룰 수’ 있는지로 봤다. 일중독에 빠지면 자기 의지로 일을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워진다.
③ 삶의 균형 파괴:일중독은 일과 및 개인 생활의 다른 영역과의 균형을 파괴한다. 일 외의 다른 정상적인 생활이 사라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악화 내지 소원해지며,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④ 지속가능성 부족:유기체로서의 인간은 본래 균형 속에서 살아갈 때 지속성 있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산다. 그러나 일중독은 건강한 삶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에 지속성이 없다.
일중독의 증상과 진단
일중독자의 이미지를 잘 그린 영화로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 주연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꼽을 수 있다. 실제 유명 인사를 모델로 한 이 영화에서 패션잡지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 분)는 ‘패션계의 마녀’ ‘미친 사디스트’ 등의 별명으로 불린다. 직원들은 그녀의 완벽주의에 겁 먹고, 그녀가 출근하면 직원들은 업무 상태를 점검하느라 온갖 소동을 겪는다. 한밤중에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일을 지시하는가 하면 남편한테 이혼 통보를 받고도 흔들림 없이 출장 스케줄을 소화한다. 경쟁에서 이기고 상대를 짓밟음으로써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스타일. 대인 관계 역시 철저하게 자신의 업무에 긍정적인지 여부로만 판단한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안드레아(앤 해서웨이 분)는 인턴으로 이 유명 회사에 입사, 미란다의 조수로 일하며 숨막히는 경쟁에서 살아남지만 결국은 자신의 가치와 맞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련 없이 떠난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일중독자의 모습을 잘 그려냈지만 모든 일중독자가 이런 모습을 띠는 건 아니다. 일중독의 근본 원인은 개인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방식 역시 다양하다. 어떤 이는 두통, 소화불량, 불면증 등 신체적 증상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가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는 신경정신과까지 가서 일중독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또 다른 경우는 남편이 일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하는 사이 부인이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녀 문제, 이혼 등 가정파탄을 겪은 후에야 뒤늦게 일중독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조직 현실에서는 종종 성과는 뛰어나지만 과도한 야심과 부하 직원들에 대한 가혹한 관리로 임원 후보에서 번번이 탈락하는 관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른 중독과 비교했을 때 일중독은 본인 또는 타인이 알아채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알코올, 마약, 도박과 같은 다른 중독은 본인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특성이 있다. 하지만 일은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자세히 관찰을 하지 않으면 타인이 판단하기 쉽지 않다. 본인의 경우는 일로 인한 여러 부작용을 느끼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중독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일중독 진단 방법은 여럿 있지만 무난하게 자가 진단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미국 일중독자 협회(Workaholics Anonymous)에서 사용하는 진단지를 소개한다. (‘미국 일중독자 협회의 20가지 증상 진단’ 참조.)
회원 가입만 해도, DBR 월정액 서비스 첫 달 무료!
15,000여 건의 DBR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