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객관화: 헤겔 법철학의 도전

48호 (2010년 1월 Issue 1)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룬다고 말이다. 과연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까? 자세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만 우리는 고독해질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불행히도 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고독의 실체다. 그래서 홀로 술을 마시거나 자기 방에 칩거하면서 힘들어한다. 그렇다면 이런 고독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손을 건네줘야 한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숙명이다.
 
 

 
우리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버려져 있다는 고독감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오직 사랑하는 타자가 손을 내밀 때에만 고독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말고는 전적으로 ‘타자의 자유’라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은 나의 프러포즈를 상대방이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역으로 말해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상대방도 무조건 나를 사랑해준다면, 고독으로부터의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타자의 자유’가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 최고의 희열을 경험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방도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란다. 이것은 간절한 프러포즈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생긴 허황된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게오르크 헤겔(1770∼1831)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사랑과 관련된 우리의 통념을 최초로 체계화했던 철학자다.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사랑이나 결혼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결단과 동의로 가능해졌다. 헤겔은 자유연애와 핵가족으로 상징되는 근대 사회의 가족 제도를 숙고했던 사람이다. 19세기 철학자인 그가 아직도 유의미한 이유는, 우리도 근대적인 사랑과 결혼의 메커니즘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랑, 결혼, 그리고 출산에 대한 헤겔의 심오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부부 사이에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사랑의 감정이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이 통일은 아직 아무런 객관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는 자녀를 통해 비로소 이런 객관성을 갖게 되며 또한 바로 이들 자녀를 통해 결합의 전체를 목도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통해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자녀를 통해 아내를 사랑하는 가운데,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에게서 다름 아닌 그 자신들의 사랑을 직감하는 것이다. -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두 사람이 단순히 사랑하는 연인인지, 아니면 부부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누가 보든지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임신을 해서 자녀를 가지면 된다. 누구도 임신부가 있는 커플이나 아이를 동반한 커플이 부부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헤겔은 “아이가 없는 부부 간의 사랑의 관계가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여기서 객관성이란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다른 사람도 부부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가 생기면 주관적인 사랑은 함부로 파손될 수 없는 객관적인 사랑으로 진입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헤겔이 사랑하는 두 사람의 주관적인 내면 혹은 자유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헤겔이 말한 객관적 사랑은 바로 자녀를 낳으면서 실현된다. 헤겔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껴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그 결과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태어난다. 헤겔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아내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리고 남편도 자식을 사랑한다. 그런데 자식은 바로 아내와 남편 사이의 사랑이 객관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헤겔의 주장은 타당할까? 사실 사랑하지 않았어도 두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육체적 관계를 맺었던 그 순간,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했을 가능성은 크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과거 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때 사랑했던 두 사람은 자식을 낳은 뒤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자식은 사랑의 객관적 모습이라기보다,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게 된 두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두는 족쇄로서 기능하게 된다.
 
헤겔을 읽다 보면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전래동화가 떠오른다. 아이를 셋이나 가졌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파국을 맞는다. 나무꾼이 선녀의 자유를 박탈한 채로 결혼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날개옷을 빼앗아 선녀의 자유를 박탈하고, 두 번째로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다시 한 번 선녀의 자유를 박탈한다. 하지만 날개옷을 되찾자마자, 다시 말해 자유를 되찾자마자 선녀는 나무꾼을 떠나버린다. 이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헤겔보다 더 지혜로웠다고 할 수 있다. 헤겔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결혼과 자식은 두 사람의 사랑을 보장해줄 수 없는 법이다. 헤겔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남편과 아내,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변모하는 과정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우리에겐 결단의 순간이 왔다. 사랑이라는 불안한 열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이라는 평안한 일상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와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가 걸었던 ‘제3의 길’도 존재한다. 결혼이나 가족 제도가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여 사랑의 열정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사람은 평생 동안 계약 결혼이라는 삶의 형식을 관철시켰다. 어쨌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결혼을 했든 아이를 낳았든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만큼 사라질 수밖에 없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이성복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신을 버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너’가 자유로운 결정으로 스스로 나를 사랑할 때까지 말이다. 이런 기다림을 유지한다면, 즉 사랑하는 타자의 자유를 긍정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항상 푸르게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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