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오간 느낌이 이럴까. 실연의 슬픔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더니 지금의 나는 세상의 모든 상처와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일, 대인관계, 그리고 연애까지도…. 아니, 완벽한줄 알았다고 해야 하나?
지난주 초 팀장님께서 신제품을 전담할 신규 조직 설계를 내게 맡겼다. 신제품의 개발과 유통, 마케팅 등을 담당할 조직의 구성과 인력 배치, 소요 경비 추산 등이 세부 내용이었다. 관련 지식이 전혀 없어 걱정이 됐지만 어쨌거나 팀장님이 나를 그만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내가 제품 콘셉트를 기획했고, 그 동안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으니 조직 구성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후로 며칠간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지냈다. 내 손에서 신제품 담당 부서의 밑그림이 그려진다고 생각하니 어느 것 하나 건성으로 넘길 수 없었다. 이번 사업은 그 동안 중저가 생활가전에만 집중해 온 우리 회사가 프리미엄 시장에 진출하는 첫 시도 아닌가. 대대적인 홍보와 마케팅은 물론 백화점 등 유통망 보강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마케팅 및 홍보와 유통 분야가 핵심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우리 회사 안에 적절한 인력은 있을까. 외부에서 전문 마케터를 스카우트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회사는 기능별 조직으로 이뤄져 있는데 신규 부서는 어떤 유형으로 만들어야 할까. 여러 기능이 한 제품에 집중되어야 하니 우리 제품만을 위한 사업부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참, 사내의 다른 부서에서 기존 기능이 다 있는데 왜 새 조직을 만드느냐고 반발하지는 않을까. 신제품은 우리 회사에서 처음 시도해 보는 프리미엄 조명 기기인 데다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한데, 기존 조직에 업무를 갈라 주어도 될까.
고민 중 한편으로는 임 주임과 내가 좀 더 ‘긴밀하게’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웃음이 났다. 공적인 일에 사심이 개입되어선 안 되겠지만 이로 인해서 일할 맛이 나고 능률도 높아진다면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얼마 전에는 손대수에게 임 주임과 연결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 또한 잘될 것 같았다. 손대수가 물어다 주는 영양가 없는 소개팅이 이어지면서 경제적인 압박도 심해지기 시작했고, 이왕이면 한 사람에게 올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선배 체면 다 버리고 임 주임을 향한 내 마음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마시던 맥주를 뿜어낼 정도로 놀라고 당황한 손대수.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일하는 같은 팀 후배에게 마음이 있다는 선배의 말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임 주임과 연결해 주겠다는 대답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 동안 나에게 해 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손대수는 무엇이든 능히 해낼 수 있는 녀석이라 안심이 됐다.
역시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로부터 며칠 후 임 주임이 내게 술을 사달라고 했다. 손대수가 손을 쓴 것일까. 보고서 작성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깟 일이 문제겠는가. 그나저나 무슨 바람이 불어 임 주임이 먼저 나한테 술을 사달라고 하는 거지?
‘그녀’는 술자리에서 편안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신제품 디자인이 마음이 든다는 이야기, 그 동안 등산 동호회에 자주 못 나간 건 쉬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디자인팀에서 미래상품 기획팀으로 오고 난 뒤에 적응에 힘들어 하던 자기를 따뜻하게 챙겨줘서 고마웠다는 이야기…. 앞으로도 힘든 일이나 고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오라는 나에게 임 주임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 고민이란다.
남자 친구? 남자 친구가 있었단 말이야? 헉! 만난 지 반 년 정도 지난 남자 친구가 있는데 그의 주변에 친구가 너무 많아 자기와 함께 하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투정인지 자랑인지 모를 그런 것을 고민이랍시고 나에게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녀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이 일편단심 강 대리한테!
그동안 내가 수 없이 많은 신호를 보낸 것을 임 주임이 모를 리가 없는데…. 새삼스레 이상한 고민을 나한테 털어놓는 저의는 대체 뭘까.
자기한테 남자 친구가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야? 혹시, 설마, 진짜 남자 친구는 없지만 나는 자기 눈에 차지 않으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그렇게 은근슬쩍 나를 자기로부터 떼어내려는 거야? 그런 거야?
남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고, 임 주임이 너그럽게 이해해 줘야 하고…. 뭐라고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냥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을 해 주고 돌아오는 기분이 이토록 참담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무거운 마음으로 조직 설계 보고서를 완성했다. 비록 임 주임과 나의 관계는 이렇게 일단락됐지만 공사는 엄격히 구분해야 하니 여전히 같은 팀에 있어도 상관은 없겠지. 조직 설계는 우리 제품만을 위한 신규 사업부 구성을 전제로 해 작성했다. 재무와 경리, 마케팅, 애프터서비스(AS) 담당자 등
신제품 시판에 필요한 인력을 모두 배치하고 나니 조직 구성원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스스로도 약간 놀랐지만 프리미엄 제품 사업을 하는데 이 정도 인력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런데 e메일로 보고서를 보낸 뒤에 과장님께서 보내주신 답장 제목이 좀 살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