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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2. 소비자는 지켜본다, 기업이 약속을 잘 지키는지

인종차별 철폐를 똑같이 외쳤는데도
넷플릭스는 박수받고, 보그엔 역풍 분 이유

강지남 | 315호 (2021년 0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지난해 여름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가 미 전역을 들끓게 한 이후 미국 기업은 달라졌고, 달라져야만 했다. 소비자, 특히 MZ세대가 기업이 인종 평등의 가치 실현에 나설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당위적 선언만으로는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기업 내부에서부터 인종주의를 몰아내고, 구체적인 계획하에 사회적으로 인종 정의를 추구하는 노력에 임해야 한다. 하지만 담대한 변화를 결심했다고 해서 하룻밤 사이에 결실이 맺어질 리 없다. 소비자는 기업이 약속을 실천하는지 냉철하게 지켜본다. 많은 기업이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고 똑같이 천명했음에도 누구는 박수받고, 누구는 오히려 역풍에 시달리는 이유는 일관된 태도와 오랜 시간 속에서 숙성되는 진정성의 유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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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기업이 올인하다시피 하는 인종차별 근절 활동은 아직 한국 기업의 발등에 떨어진 과제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인종 문제가 결국 사회 속에 깊게 뿌리내린 집단 간 갈등과 배제, 반목, 혐오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미국 기업이 취하는 전략과 행동은 한국 기업에 많은 함의를 던진다. 한국 기업이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젠더, 세대, 정치적 다름 간 문제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에 동참하는 미국 기업들의 행보는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한국 기업에도 큰 시사점을 준다.

먼저 본아페티(Bon Appe'tit) 사례를 보자. 본아페티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요리 잡지다. 뉴요커, 보그 등을 보유한 미디어그룹 콘데나스트가 발행한다. 본아페티에 실린 레서피는 에피큐리어스(epicurious.com)라는 웹사이트에 올라간다.

요즘 본아페티와 에피큐리어스는 ‘아카이브 수리 프로젝트(Achive Repair Project)’라는, 전례 없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1965년 이후 쌓아온 3만5000여 개 레서피를 뒤져 인종차별주의적인 내용을 찾아 수정하는 작업이다. 일례로 이 잡지는 앞으로 쌀국수 샐러드 레서피의 제목에 ‘아시안(Asian)’을 넣지 않기로 했다. 또 인도에서 유래한 커리 양념인 바두반(Vadouvan)에 대해서도 ‘이국적인(exotic)’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잡지가 이처럼 인종차별주의적 콘텐츠를 솎아내기로 한 것은 최근 뼈아픈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자 미 전역에서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이하 BLM)’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BLM 시위는 미국뿐만 아니라 해외 60여 개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는데, 물리적 공간만큼이나 온라인에서도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뜨거웠다. 그중에는 기업이나 브랜드가 성토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인종차별적 행보로 전격 사임

본아페티도 그중 하나였다. 그간 많은 유색 인종은 이 잡지가 그들의 음식 문화를 잘못 소개하거나 백인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조리법을 바꾸는 일이 적지 않다고 느껴왔는데, BLM 운동을 계기로 구체적인 고발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2010년부터 편집장을 지낸 애덤 라포포트가 과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인종차별주의적 게시물을 올린 것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의 아내가 벌겋게 술 취한 남편 사진에 #보리쿠아(boricua, 푸에르토리코인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남편과 공유했던 것이다. 사진에서 라포포트는 두건과 야구모자, 커다란 체인 목걸이 등 푸에르토리코인의 전형적인 패션으로 간주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대중, 그리고 잡지 제작에 참여하는 요식업계 전문가들의 격한 반응에 라포포트는 바로 사임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 잡지의 인종차별과 관련한 고발은 계속됐다. 조직 내에서 유색인종 직원에 대한 차별이 횡행했으며, 동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백인 출연자와 달리 유색인종 출연자에게는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은 일 등이 폭로됐다. 일부 유색인종 직원은 사표를 냈고, 몇몇 인기 전문가는 더 이상 본아페티와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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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아페티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정식 사과하며 “우리 브랜드에서 인종차별을 몰아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 어려운 법이다. 지난 연말에는 아이티의 전통 음식인 수프 주무(joumou)를 오인한 레서피를 소개했다가 바로 대중의 거친 항의를 받고 또 한 번 사과해야 했다. 아이티인들은 새해 첫날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쇠고기와 감자를 넣고 끓인 주무를 먹는다. 그런데 이 잡지는 쇠고기와 감자 대신 코코넛 밀크와 시나몬, 절인 견과류를 넣은 주무 레서피를 ‘아이티의 전통 음식’이라고 소개했다. 음식에 담긴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세밀하게 신경 쓰지 못한 셈이다.

지난해 여름 BLM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간 이래 인종 문제에 올바르게 처신하지 않은 바람에 대중의 철퇴를 맞은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꽤 인기 있는 크로스핏(CrossFit, 여러 종목의 운동의 장점을 섞은 피트니스)을 처음 고안해 낸 그렉 글래스먼 크로스핏 CEO는 SNS에 조지 플로이드를 조롱하는 글을 올리고 화상회의에서 “나는 플로이드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CEO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리복 등 브랜드를 비롯해 1000여 곳의 제휴 헬스클럽이 크로스핏과의 파트너십을 중단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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