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노벨물리학상 수상 나카무라 슈지

아무도 못한다던 청색 LED 산업화에 성공,용접하며 지킨 ‘필드정신’ 세상을 밝혔다

165호 (2014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혁신

 

기업인 출신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나카무라 슈지의 시사점

1) 다른 사람이 주목하지 않는 분야에 장인정신을 가지고 매달렸다.

2) 일류 대학이라는 간판과 기업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 지방대 출신 중소기업인이다.

3) 학계의 연구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연구에 몰두했다.

4) 용접으로 연구기기를 직접 만들 정도로 현장의 밑바닥까지 훑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5) 불확실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에 투자하는 벤처정신을 가진 투자자를 만났다.

 

올해 노벨물리학상이 일본 출신 과학자 3명에게 돌아갔다. 일본 출신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19명에 달한다. 일본에 큰 자랑이다. 그런데 이번 물리학상 수상자는 분야가 다소 특이하다. 소립자와 천체 등 순수학문이 아니라 발광다이오드(LED) 개발 등 응용학문에서 연구물을 냈다. 스웨덴 왕립아카데미는이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나카무라 슈지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버라캠퍼스 교수 등 3명은 에너지 소비가 적은 고효율 청색 LED를 발명했다. 백열등이 20세기에 세상을 비췄다면 21세기는 LED가 세상을 밝힐 것이라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LED의 발광 원리는 1940년대에 이미 예측됐다. 1962 GE의 닉 호로냑(Nick Holonyak)이 적외선에서 발광하는 LED를 개발했다. 왕립아카데미는 LED의 원리보다 산업화에 공헌한 연구자들을 높게 평가했다. 수상자 모두 일본 지방대 출신으로 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특히 나카무라 교수는 지방(도쿠시마현 아난시)의 중견 화학업체에서 논문과 특허에는 벽을 쌓고 오직 청색 LED에만 매달린 기업연구인 출신이다. 그가 어떻게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그의 과거 경력을 살펴보는 것은 국내 기업인과 연구자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고난의 길을 자청한 나카무라

나카무라의 업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LED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LED는 전기를 흘리면 빛을 내는 반도체다. 칩의 기본구조는 p형 반도체(정공이 많은 반도체) n형 반도체(전자가 많은 반도체)로 구성되는데 칩에 전압을 가하면 정공과 전자가 이동하고 재결합(pn접합)한다. 재결합을 한 뒤 전체 에너지는 p형과 n형 반도체의 에너지 총합보다 적은 수준이 되고 나머지 에너지는 빛으로 바뀐다. 이것이 바로 LED의 발광원리다. 그러나 백색 빛을 만들기 위해서는 3원색인 청색과 녹색, 적색의 발광 칩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파장이 가장 짧은 청색 발광 칩 제작이 쉽지 않았다. 나카무라 교수 등은 20세기에는 개발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견됐던 청색 LED를 개발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기여했다.

 

왜 청색 LED 개발이 어려웠을까? 빛의 색깔은 LED칩에 사용되는 화합물에 따라 달라진다. 청색 LED SiC(실리콘 카바이드), ZnSe(징크셀레나이드), GaN(질화갈륨) 등의 화합물로 만든다. SiC ZnSe로 청색 LED를 만들기가 쉽다. 하지만 밝기가 약하고 가격이 비싸다. 응용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제작이 쉽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SiC ZnSe로 청색 LED를 제작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나카무라 교수 등은 다른 연구자들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질화갈륨을 사용하는 연구에 매달렸다. 1989년 질화갈륨을 사용한 청색 LED 발명에 성공했고 1993년 대량 생산의 길을 열었다. 아카자키 이사무 메이조대 교수는 질화갈륨을 사용해 밝은 청색을 발산시키는 데 성공했고 아마노 히로시 나고야대 교수는 양질의 GaN 단결정을 제작하는 데 성공해 실용화를 앞당겼으며 나카무라 교수는 빛을 안정적으로 장기간 발산하는 청색 LED 재료를 개발해 제품화에 기여했다.

 

3명 모두 연구하기 어렵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분야를 과업으로 삼았다. 아카자키 교수는 당시 질화갈륨으로는 p형 반도체를 만들 수 없다는 학계의 편견에 도전해 고독한 연구에 매달렸다. 그는마치 황야를 혼자서 걷는 기분 같았다고 말했다. 아마노 교수는 이런 아카자키에 매료돼 제자를 자청했다. 1500번 이상 실험을 거치며 저온의 성장로에서 양질의 결정이 형성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원리 발명 불과 4년 후인 1993년 니치아화학공업이라는 지방 중견화학업체가 휘도 1cd(칸델라)의 청색 발광다이오드를 출시한 것이다. 개발자는 학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나카무라 교수였다. 사실 나카무라 교수는 노벨물리학상을 아카자키와 하마노 교수와 함께 수상했지만 별다른 관련이 없다. 그는 독자적으로 청색 LED 개발과 실용화에 성공했다.

 

 

책과 논문 대신 장인정신

나카무라 교수는 1979년 도쿠시마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뒤 종업원 180, 매출액 40억 엔 정도의 니치아화학공업에 입사했다. 교토 교세라에도 합격했으나 이미 결혼을 했고 자녀도 있어서 집에서 가까운 회사를 선택했다. 니치아는 오너인 오가와 노부오가 개발한 CRT 모니터나 형광등에 사용되는 형광체 재료를 생산·판매하는 지방 중견기업에 불과했다. 대다수 직원은 샐러리맨과 자영 농업을 겸했다. 순수 샐러리맨은 나카무라뿐이었다. 나카무라의 전공은 전자공학이었지만 전자 재료를 개발하고 싶다고 알려 개발과에 배속됐다.

 

첫 연구는 화합물반도체 인화갈륨(GaP)의 재료인 금속Ga을 정제하는 것이다. 개발과에는 과장과 나카무라를 포함해 연구원 2명이 전부였다. 게다가 전자 관련 학문을 전공한 사람은 나카무라가 유일했다. 개발과 자체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런데 영업과에서 금속Ga뿐만 아니라 인화갈륨 자체를 만들면 잘 팔릴 것이라 제안했고 개발담당자로 나카무라가 지명됐다. 말이 신규 사업 개척이지 개발에 필요한 기기와 부재료를 구입할 예산이 거의 없었다. 나카무라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나카무라는 개발 이전 교과서와 논문, 특허 관련 자료 등을 탐독해서 인화갈륨 제조기술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책과 자료를 아무리 읽어도 인화갈륨을 만들 수 없었다. 회사는 결과물을 원할 뿐이다. 책을 버리고 개발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스스로를 장인이라고 생각했다. 인화갈륨의 결정이 성장하려면 비싼 석영관이 필요하다. 문제는 결정 성장 과정에서 석영관을 잘라야 한다. 나카무라는 석영관을 용접해서 다시 사용했다. ‘용접공이 되기 위해 입사했나라며 자책도 여러 차례 했다. 용접기술은 거의 장인수준으로 발전했다. 폭발사고도 빈번했다. 연구실에 화재가 발생하기 일쑤였고 화재를 진압하면 퇴근 시간이 될 때도 잦았다.

 

대학 동기들은 논문을 쓰거나 학회에도 이름을 알렸다. 자신은 매일 용접이나 하는 처지였다. 낙담하기도 했으나 연구하고 싶은 분야인 반도체 재료 개발에 매진할 수 있는 게 행운이라고 자위했다. 제품 개발 의욕은 남달랐다. 왜냐하면 팔리는 제품을 개발하지 않으면 회사가 언제 도산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개발에 성공했다. 1981년 인화갈륨을 판매했다. 영업에도 뛰어들었다. 영업담당자가 반도체 재료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고객 불만사항도 직접 처리했다. 하지만 제품 판매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인화갈륨의 매출은 월 수백만 엔 정도에 불과했다.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사업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982년 제조를 후임에게 맡기고 개발에서 손을 뗐다. 나카무라는회사가 시키는 것을 모두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나카무라는 1982년 갈륨비소(GaAs) 개발에 착수했다. 갈륨비소는 빛을 내기 때문에 발광다이오드나 반도체 레이저용 재료에 사용된다. 갈륨비소 개발 역시 영업과가 제안했다. 자금사정은 여전히 열악했다. 웨이퍼를 절단하는 1500만 엔짜리 기기 구입을 요청하자 공무과는 톱으로 대신하라고 답변했다. 나카무라가 직접 톱으로는 자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서야 기기 구입이 가능할 정도였다. 이번에는 웬만한 장치도 스스로 제작했다. 1983년 갈륨비소의 다결정을 제조하게 됐고 1985년 발광다이오드용 갈륨알루미늄비소(GaAlAs)막의 결정성장 개발에 착수했다.

 

나카무라는 연구뿐만이 아니라 제조, 품질관리, 영업 등을 모두 혼자 해냈다. 자신이 제조한 단결정을 거래처인 발광다이오드 제조업체에 가지고 간다. 경쟁사보다 품질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빨리 개발해도 경쟁사를 이길 수가 없었다. 왜 경쟁사를 이길 수가 없을까. 결과 평가의 속도가 경쟁사보다 늦었다. 니치아는 발광다이오드를 직접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자의 평가를 기다려야 했다. 1개월 후에나 평가를 반영해 개선해도 항상 경쟁사보다 출시가 늦었다. 발광다이오드를 직접 만들지 않으면 대응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발광다이오드를 직접 제작해 평가하는 장치를 도입했다. 이후 GaAlAs의 개발을 마칠 수 있었다. GaAlAs는 자력으로 개발한 사례다. 나카무라는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GaAlAs가 사업성이 큰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개발 가치가 크지 않았다. 나카무라가 사업성을 생각하고 정한 연구 주제가 바로 청색 발광다이오드 연구다. 나카무라는 10년간 기술자로 근무하며 2가지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첫째, 만드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제작 대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업성이 있는 분야를 개발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둘째, 개발 주제를 찾으려면 기술자가 고객과 대화하고 현장에 뛰어다니면서 비즈니스의 현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소기업 연구원으로 한계를 느끼며 체득한 뼈저린 교훈이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방법만 선택

청색 LED는 잠재 수요가 많아 잘 팔릴 것이라 확신했다. 10년간 LED용 원료의 결정성장에서 LED 램프까지 연구했기 때문에 이를 집대성하면 청색 LED를 개발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만류했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청색 LED를 개발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나카무라는 사장과 담판했다. 만약 거절하면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이었다. 사장은 무슨 생각인지 쉽게 수락했다. 예산이 수억 엔이나 필요하다고 밝혔지만그래도 괜찮다고 답했다. 사장은 나카무라를 믿었다. 인화갈륨과 비소갈륨을 개발한 나카무라의 실력을 믿었다. 그는나카무라는 상용화도 할 줄 아는 연구자라고 평가했다. 사장은 형광체 재료를 직접 개발해 회사를 설립했기 때문에 신제품 개발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신제품을 만들어도 매출을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도전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카무라의 선택에 투자했다.

 

나카무라가 개발에 착수했을 때 다른 대기업도 청색 LED 개발에 매진하고 있었다. 나카무라는 후발주자의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대기업이 사용하지 않는 재료를 사용했다. 제품 개발이 어려운 질화갈륨을 채택했다. 대기업들이 사용하는 세렌아연을 재료로 활용하면 제품화의 성공률도 높았다. 하지만 관련 논문이 많았고 후발주자의 추격도 쉬웠다. 제품 개발에 성공해도 대기업들이 금방 추격할 확률이 높았다. 기술 개발은 도박과 비슷하다. 위험부담이 큰 만큼 이윤의 폭도 크다. 나카무라는 연구개발, 제조, 품질관리에까지 정통했으며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들으며 용기를 냈다. 10년간 연구하며 닦은 기본체력이 바로 용기였다. 결국 자신을 믿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연구해야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생긴다고 판단했다. 다른 사람의 특허를 읽으면 무의식중에 흉내내고 독창적인 연구가 어렵다고 봤다.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독창성이다.

 

그는 청색 발광다이오드를 만들기 위해서 단결정막 형성부터 시작했다. 여기에는 MBE(molecular beam epitaxy) MOCVD(metal organic chemical vapor deposition) 2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MBE를 활용하려면 장치 투자에만 수억 엔이 필요하다. MOCVD를 선택했다. 그는 MOCVD 관련 장치를 2대나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미국 플로리다대에 연구원으로 1년간 파견됐다. 그러나 막상 플로리다대에 도착해보니 MOCVD 관련 장치는 없었다. 1대는 다른 연구실에서 사용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대는 앞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MOCVD 장치를 직접 만들기 위해 배관과 용접을 해야 했다. 장치를 완성한 것은 귀국 1개월 전이었다. 귀국이 1개월밖에 남지 않았으니 우선 사용하게 해달라고 연구실 관계자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3∼4회 정도 결정성장실험만 해보고 일본에 돌아왔다. 사장은 나카무라에게 연구원 2명을 붙여주며 배려했다. 나카무라는 MOCVD 관련 장치를 구입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MOCVD는 고온으로 가열한 기판에 원료가스를 흘려보내 기판표면위에서 가스를 분해하고 결정박막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발광재료인 질화갈륨으로는 쉽게 막을 만들 수 없다. 게다가 시중에서 구입한 장치로는 쉽게 막이 형성되지 않았다. 나카무라는 기판을 히터로 가열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질화갈륨 막을 만드는 원료가스인 NH3는 부식성이 있어서 히터가 견디지 못했다. 전기는 갑자기 찾아왔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겨우 부식에 견디는 히터를 완성했다. 이 노하우는 용접기술, 배관기술과 함께 나카무라의 특기 중 하나다. 나카무라는 장치개조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과거 열악한 연구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용접과 배관 등을 하던 현장 기술이 빛을 발한 것이다. 1990 9월 막 성장에 성공했다. 이후 안정적으로 GaN막을 성장시키는 조건도 알게 됐다. 이후 p형 막을 쉽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고 1991 3 pn접합형 질화갈륨발광다이오드를 시험으로 제작했다. 그러나 시험제작품은 겨우 빛을 낼 정도였다.

 

나카무라는 후발주자의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대기업이 사용하지 않는

재료를 사용했다. 제품 개발이 어려운

질화갈륨을 채택했다.

 

니치아는 연구 예산과 인력을 늘렸다. 사장은 좀 어두워도 pn접합형 발광다이오드로 상용화를 하라고 독촉했다. 나카무라는 더블 헤트로 구조로도 발광다이오드를 제작하고 싶었다. 회사에는 pn접합을 개발한다고 말하고 실험실에서 더블 헤트로 구조에 몰입했다. 1992 9월 더블 헤트로 구조의 GaN발광다이오드도 성공했다. 하지만 좀 어두웠다. 곧 왜 어두운지도 알아냈다. 이유는 발광파장이 자외선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발광층인 InGaN에 불순물을 첨가했다. 밝기가 4배로 됐다. 또 막의 성장조건을 개선해 결정성을 높였다. 매일매일 더 밝아졌다. 1993 10월 제품화가 가능해졌다. 휘도는 1cd에 달했다. 당시 시판되고 있었던 SiC를 사용한 청색 발광다이오드의 약 100배 밝기다. 1993 1130일 신제품을 발표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주위에서 나카무라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카무라는 1999년 니치아를 사직하고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버라캠퍼스 교수로 임용됐다. 사직 이유는 회사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발명 특허를 회사가 독점하고 나카무라에게는 보너스로 단돈 2만 엔만 보상했다. 후임 사장은 나카무라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청색 LED의 상용화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개발 중지 명령을 내렸다. 나카무라는 명령을 무시했다. 나카무라는 묵묵하게 자신을 믿고 지원해준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자 니치아와 결별했다.

 

 

나카무라의 교훈

나카무라는 청색 LED 양산뿐만 아니라 거의 독자적으로 청색 발광다이오드를 발명했다. GaN AKR 성장을 위해 Two-Flow법을 선택하고 p형 반도체를 제작할 때 버퍼층으로 아마자키와는 달리 질화갈륨을 사용했다. 히터로 가열하는 방법과 질화갈륨에 인디움을 첨가해 고휘도 청색 발광다이오드를 발명한 것은 이전 연구자들과는 다른 나카무라의 독창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특허소송에 시달려야 했다. 나카무라는 1990년 질화갈륨결정성장기술을 특허(404특허) 출원해 고휘도 청색 LED의 길을 열었다. 1993년 니치아는 청색 LED 제품을 발표하며 급성장했다. 니치아는 2000 12월 미국에서 나카무라를 기업비밀 유출로 제소했다. 분노한 나카무라도 2001 8월 니치아를 도쿄에서 제소했다. 이것이 4년에 걸친 청색 LED 소송 사건의 시작이다.

 

2004 1월 도쿄지방재판소는 404특허의 발명대가를 604억 엔으로 인정하고 니치아가 나카무라에게 200억 엔을 지불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니치아는 청색 LED의 매출이익률이 60%에 달했다. 재판소는 특허로 인한 초과이익이 1200억 엔에 달할 것으로 계산했다. 직장인들은 나카무라를 응원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 기업에서 직무발명에 대한 보수제도가 재검토됐다. 그러나 니치아는 판결에 불복했다. 2004 12월 고등법원은 니치아와 나카무라의 화해를 권고했다. 그리고 모든 특허에 대해 니치아가 6억 엔을 지불하라고 했다. 나카무라는 무엇보다 기업연구자에게 꿈을 줄 수 없었던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화해 결정을 받아들였다. 당시 판결은 연구자와 엔지니어에 대한 일본 사회와 기업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기업연구자는 묵묵히 회사에 무조건 봉사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미국행을 택하는 일본 과학자도 상당하다. 일본의 자연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의 4분의 1은 미국 이민을 선택했다. 이유는 나카무라와 비슷할 것이다. 현재 나카무라는 미국에서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벤처기업들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반도체레이저회사다. LED의 발광효율은 50∼60% 정도로 거의 한계다. 하지만 반도체레이저를 활용하면 100% 효율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기에서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2014년 말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나카무라 교수 등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일본에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분야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에 장인처럼 매달리는 연구자가 많다. 나카무라는 다른 사람이 선택하지 않은 방법을 일부러 선택해 연구했다. 유행을 좇거나 단기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독창적인 연구가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둘째, 명문 대학 출신의 간판이나 연구 환경이 반드시 노벨상 수상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해외유학파도 아니며 도쿄대 출신도 아니다. 모두 지방대 출신이다. 나카무라만 1년 정도 미국에서 유학했지만 찬밥 신세로 실험도 제대로 못해보고 1년 만에 귀국했다. 또 일본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19명 중 단지 1명만이 도쿄대에서 연구했다. 일류 대학이나 기업의 관습에 얽매이다 보면 자유로운 연구가 쉽지 않다. 나카무라의 연구 행로는 국내 연구자들에게 상당한 용기를 준다. 셋째, 나카무라는 기업 출신 연구자다. 나카무라는 논문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만으로 연구에 몰두했다. 국내 중소기업의 연구자에게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나카무라는 연구뿐만 아니라 생산·영업도 섭렵했고 장비도 직접 제작했다. 바닥까지 훑은 경험은 이후 청색 발광다이오드 발명의 밑거름이 됐다. 넷째, 연구비는 노벨상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나카무라는 충분한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했다. 용접 장인의 경지에 올라 단결정 장치를 모두 제작해 노하우를 쌓고 고객과 현장을 살핀 것도 연구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연구비가 풍족하지 않는 중소·중견기업 연구자에게 많은 용기를 주는 대목이다. 다섯째, 기업에는 안팎을 가리지 않고 벤처캐피털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니치아의 창업주는 벤처캐피털 역할을 맡았다. 나카무라의 수상 배경을 보면 국내에도 노벨과학상 수상 가능성을 한층 넓혀주고 있다. 특히 반도체와 같은 공학 분야에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노벨과학상을 수상하는 날을 기대한다.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 wklee@kjc.or.kr

필자는 중앙대 통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 경제학연구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삼성경제연구소에 입사해 주로 일본 경제와 산업·기업 등을 연구했고 일본연구팀장, 해외연구실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일본재발견> <일본시장 진출의 성공비결, 비즈니스 신뢰> <도요타: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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