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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

“힘들어도 사람 아끼며 1등제품 개발 ‘70점 경영’으로 조선강국 기적 일궜다”

정지영 | 161호 (2014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전략,HR,혁신 

 

우리나라가 조선산업의 불모지에서 30년 만에 최고 조선강국이 되기까지는 현대중공업의 역할이 컸다. 현대중공업은 뛰어난 전략과 끊임없는 연구개발(R&D) 2003년 세계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 같은 성과 뒤에는 전문경영인으로 11년 동안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를 지냈고조선산업의 아버지라 불리는 민계식 전 회장이 있었다. 민 회장은 현대중공업의 성장비결로 사업군의 다변화, 전략의 구체화, 주력제품 일류화를 꼽았다. 덕분에 현대중공업은 2003∼2010년 동안 매년 평균 성장률 27.4%로 성장을 거듭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선정효(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 정주영 회장이 42년 전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를 건립하기로 했을 때 모든 사람이무모한 도전이라고 비웃었다. 당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던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에 비해 자금과 기술력 등 모든 면에서 크게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현대중공업이 조선사업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란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은 2003, 조선산업에 뛰어든 지 3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세계 1위 자리에 올라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런 성과를 낸 주역 가운데 한 명이 바로조선업의 아버지로 불렸던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72·현재 현대중공업 상담역 겸 현대학원 이사장)이다. 그는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아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으로는 드물게 회장을 지냈다. 2001년부터 11년 동안 대표이사로 현대중공업 황금기를 열었다. 현대중공업은 2007년 매출 155330억 원, 영업이익 17507억 원을 기록하며 ‘1조 클럽에 가입했다. 2011년에는 미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 가운데 219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포브스>에서 선정한 글로벌 2000대 기업 순위에서는 중장비 분야 세계 3위에 올랐다. 이는 기계 및 중장비 분야에서 국내 제조기업 가운데 단연 최고 기록이었다. 2000 12 18000원대(종가 기준)던 주가는 2011 6 51만 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는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후 여러 기업의 스카우트 제안을 물리치고 지난해 대학에 둥지를 틀었다. KAIST에서 해양시스템공학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는 민 전 회장을 만나 경영 노하우를 들어봤다.

 

CEO로 있으면서 회사를 크게 성장시킨 비결은 무엇인가.

 기업은 성장하거나, 도태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걷게 된다. CEO는 성장하는 방향으로 배를 끌고 갈 수밖에 없다. 나도 처음 2001 CEO가 됐을 때 위기의식이 컸다. 1990년대 후반부터 회사의 매출액이 늘지 않는 정체 상태였다. 우선 매출 구조를 다변화해야 했다. 조선산업본부가 회사 전체 매출액의 80%를 차지하는 구조를 바꿔야 했다. 갑자기 조선산업에 불황이 닥치면 회사의 위기는 불 보듯 뻔하다. 조선산업부를 제외하고 해양, 엔진기계, 플랜트, 전기전자시스템, 그린에너지, 건설장비사업 등 나머지 6개 산업본부 가운데 조선산업본부에 필적할 만한 사업을 키우자고 했다. 나는 사업본부장들을 불러서매출 3조 원 이상을 하는 곳에만 사업본부장을 두겠다. 매출이 안 되면 부서로 강등시킬 것이다. 사업본부장 타이틀을 유지하고 싶으면 3년 내에 각 부서는 3조 이상의 매출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모든 부서의 매출이 서서히 오르더니 놀랍게도 누가 빨리 목표 매출을 달성하느냐로 경쟁을 하게 됐다.

 

 

세계 일류제품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2001년에는 현대중공업에서 당시 산업자원부가 지정한 세계 일류제품이 딱 한 개밖에 없었다. 1등 제품이 없으면 결코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없지 않느냐. 그래서 세계 일류제품 개발을 독려하고 투자했다. 2011년에는 세계일류화 제품이 34개가 됐다.

 CEO가 된 이듬해에는글로벌 리더사업계획을 수립하고 2003년부터 추진했다. 이 계획은 크게 3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는 2004년까지 현대중공업 그룹을 포천 500대 기업에 진입시키는 것이었다. 목표는 매출액 85억 달러, 영업이익률 4%였다. 2단계는 2006년까지 세계 중공업 분야 톱10에 진입하는 것. 목표는 매출액 110억 달러, 영업이익률 6%였다. 3단계는 2010년까지 세계 중공업 분야 톱5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매출액 175억 달러, 영업이익률 10%를 목표로 삼았다. 처음 이 계획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던 임원들도 시간이 갈수록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에는불가능하다” “무리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던 이들도할 수 있다” “더 해보자는 식으로 자신감과 의욕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4년 실제 실적은 매출 80억 달러, 영업이익률 5%. 매출액은 당초 목표보다 다소 적었지만 영업이익률은 더 높았다. 포천 선정 기업 501위에 올랐다. 그전에는 1000위 안팍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2단계가 되니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2006년 매출액은 133억 달러, 영업이익률은 7.6%로 목표보다 훨씬 결과가 좋았다. 중공업 분야 글로벌 톱10을 훌쩍 넘어 톱6 기업이 됐다. 3단계가 되니 당초 목표와 실제 결과물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목표보다 매출액이 90억 달러 이상 높았고 영업이익률도 14.9%나 됐다.

 

 

영업이익률이 이 정도라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경상이익률로 따지면 16%가 훌쩍 넘는 수준. 세계적 산업평가기관인 스위스의 IMD가 제조업이나 중공업에서 영업이익률의 상한선이 6%라고 봤는데 이의 세 배에 가까운 결과다. IMD에서는 현대중공업 영업이익률을 두고기적이라고 표현했다. 2010년 글로벌 리더 사업성과의 결과를 보고 나는 사표를 냈다. 당초 목표했던 일들을 달성했기 때문에 자리에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사주가 반려해 계속 일하게 됐다.

목표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력해야 한다. 그건 기본이다. 보통 새벽 2시가 넘어야 퇴근했다. 12시에 퇴근하면 회사 경비가일찍 집에 간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오전 630분에 열리는 조찬회의에 늦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아파서 빠진 적도 없다. 회사에서 별명이최후의 퇴근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직원들까지 계속 회사에 묶어 두진 않았다. 비서나 일반 직원들은 정시에 무조건 퇴근시켰다.

결과적으로 비결을 생각해보면 대표이사가 바뀌지 않고 오래 일한 것이 회사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다. CEO가 자주 바뀌면 비전과 목표가 계속 변하게 되고, 또 직원들은 나름대로 새로운 리더 스타일에 적용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 현대중공업과 미쓰비시중공업을 비교해보자. 2001년 내가 대표이사가 됐을 때 미쓰비시중공업의 매출액은 현대중공업의 18, 연구개발비는 48배에 이르렀다. 근데 9년 뒤에는 이 격차가 거의 사라졌다. 2010 IMD 자료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매출액이 330억 달러, 미쓰비스중공업이 350억 달러였다. 미쓰비시중공업의 영업이익률이 현대중공업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현대중공업의 완전한 승리인 셈이다. 두 회사 모두 연구개발을 열심히 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미쓰비시중공업의 패착은 엄격한 정년제에 있다고 본다. 미쓰비스중공업은 상무 2, 부사장 2, 사장 2, 회장 2, 이런 식이다. 2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나. 회사 발전의 큰 판을 짜거나 장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는 11년 동안 CEO로 있으면서 의욕적으로 일을 했고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미쓰비시중공업도 현대중공업의 사례를 참고해 정년제를 유연하게 적용했다. 어떤 CEO에게는 임기 6년을 보장하기도 했다.

 우리는 또 목표 달성 방법을 사업본부마다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말 그대로 목표달성 방법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계획했다. 이 때문에 계획을 수립하고 본격적으로 글로벌 리더사업을 추진하기까지 꼬박 1년의 시간이 걸렸다. 수없이 많은 회의를 했다. 본부장과 실무진과 만나이 목표액이 가능한가”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시기를 앞당길 방법은 없을까를 논의했다. 방향은 하나로, 방법은 최대한 자세하게 했다. 성공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고 혹시 내가 물러날 경우 후임자들이 일을 처리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 계획을 짤 때 총론만 얘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 CEO ‘5년 동안 매출 얼마 달성이런 식으로 목표를 던져놓기만 하고 나머지 일은 실무진에게 떠넘기는 건 웃기는 일이다. 계획을 세웠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과정을 주시하고, 수시로 목표를 변경하고, 상황에 따라 방법도 바꿔야 했다.

 중점적으로 한 것이 주력제품 일류화였다. 3년 내에 세계 일류제품이 안 되면 그것을 주력제품에서 탈락시켰다. 핵심기술 고도화, 생산기술 일류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일등제품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스스로도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배 한 척을 지으려면 수만 개의 블록이 필요하다. 근데 블록 정리가 잘 안 돼 있어서 필요한 블록을 바로 찾기가 어려웠다. 블록 하나를 찾는 데 3일이 걸린 적도 있다. 그래서 내가 블록에전자 태그를 붙이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예전의 관행처럼필요할 때 찾으면 되지’ ‘그까짓 걸 하는 데 비용이 더 들 거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근데 해보니까 달랐다. 필요한 블록을 바로 찾을 수 있으니 생산성이 훨씬 높아졌다. 이런 식으로 변화가 곳곳에서 일어나다 보니 회사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2003∼2010년의 회사 평균 성장률은 매년 27.4%에 이른다.

 

전략을 잘 짜고 선택을 잘하려면.

 알렉산더 왕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가 그렇게 넓은 땅을 쉽게 정복했을 리 없다. 수없이 많이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알렉산더 딜레마(Alexander Dilemma)’라는 말이 나왔다. 알렉산더 대왕은 한 번의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고민했다. ‘다음은 어떡할까? 정복하러 갈까, 말까?’ 전쟁에서 이기면 또 생각했다. ‘정복하러 갈까? 그렇다면 어떤 새로운 전략을 쓸까?’ CEO나 경영진도 매일 고민을 하고 선택을 한다. 나는 알렉산더 왕의 전기가 영어로 된 것을 포함해 총 7권을 갖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에서 선택과 결정에 대해 배울 게 굉장히 많다.

 

CEO로서 선택하고 결정하기 전에 고독한 고민을 많이 했다. 돌이켜보면 선택을 하는 데 보편적이고 일률적인 원칙은 없다. 그때의 상황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선택은 일종의 모험이다. 두렵다. 외롭고 힘든 것이지만 리더라면 선택을 해야 한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본인이 믿는 대로 소신 있는 선택을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시도하는 것이다. “60% 이상 성공할 가능성이 있으면 시도하라고 말하고 싶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는데 요즘과는 맞지 않는 말이다. 돌다리 두드리는 동안 경쟁자에게 시장 다 뺏긴다. 비즈니스에서 누가 먼저 시장을 선점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무모하게 시작하라는 것과는 다르다. 면밀히 검토하고 성공 가능성이 절반을 넘는다면 일단 시작하고 그 후에 가능성을 차근차근 올려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고 선택을 내릴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릴 때부터 내 생각은세상에는 절대로 되는 것도 없고 절대로 안 되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직접 느꼈던 경험이 있는데 대우조선공업에서 설계 및 기술담당으로 일할 때다. 그때 우연히 신문에서 노르웨이 국영회사가 석유를 실어 나르는 특수 유조선을 발주한다는 기사를 봤다. ‘해보자고 했더니 회사에서 다들 미쳤다고 했다. 회사 규모가 경쟁기업에 비해 현저히 작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팀 멤버는 고작 3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혼자서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며칠 밤을 새며 배의 스펙을 구성했다. 엔진설계에서 차별화를 시도했다. 보통 유조선들은 하나가 고장 날 경우를 대비해 두 개의 엔진을 갖고 있다. 나는 엔진 두 개를 아예 하나로 묶어서 설계해 엔진에 딸린 다른 부품들을 공유할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해냈다. 하나가 고장나더라도 다른 하나의 엔진이 돌아가기 때문에 위험에 대비한다는 점은 기존 유조선과 똑같았지만 다른 부품을 공유하기 때문에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는 구조였다. 결국 일본 회사를 꺾고 아슬아슬하게 대우조선공업이 최종 계약을 따냈다. 회사 관계자와 국내 조선사업 담당자들이 모두 놀랐다. 1981년 이 유조선은 세계 최우수 선박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2년 현대중공업에서 독자 엔진을 개발할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회사 중역들은 과거에 해오던 대로 하면 되지 굳이 비용을 들여 독자 엔진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결재를 해주지 않아 혼자서 했다.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여기저기 다니면서 남은 자재를 모아 엔진 개발을 시작했다. 엔진 개발이 가시화되자 회사에서도 조금씩 지원을 해줬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2000년 완성된 엔진을 판매하려니 막상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한국산 엔진을 써 본 적이 없는데 무얼 믿고 쓰냐고 거래처에서 타박을 줬다. 직접 독일에서 제일 큰 규모의 컨테이너 선사 기업을 찾아갔다. 사장에게당신도 기술자고 나도 기술자니까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 기술적으로 기존 제품보다 우리 제품이 훨씬 뛰어나다. 6개월만 무료로 써봐라. 만족하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고 만족한다면 그 다음부터 돈을 내고 우리 것을 쓰면 된다고 제안했다. 3개월 만에 답이 왔다. 엔진 5대를 추가로 주문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컨테이너 회사에서 우리 엔진을 썼다고 하니까 곧이어 다른 회사에서도 주문이 밀려왔다. 비슷한 엔진을 만드는 회사들이 10곳이 넘는데 지금 현대중공업힘센엔진의 점유율이 28% 정도 된다.

 

회사의 모든 사업에서 수익이 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100점 경영은 망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업이 만드는 제품의 70%에서 돈을 벌고 30%

미래를 보는 상품에 투자해야 한다.

 

 후회하는 선택은 없는지.

 선택을 해서 망한 사업은 없다. 후회라기보다 아쉬운 점이 있다. 사실 하이닉스를 인수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이닉스를 인수하고 싶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하이닉스는 원래현대전자에서 출발했다. 원래 현대 것이니까 다시 현대가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IT 산업이 있는 한 반도체 산업은 성장한다는 점과 현대중공업 전기전자시스템사업본부에 만드는 제품에 반도체가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꼭 하이닉스를 인수하고 싶었다. 하이닉스의 뛰어난 기술력도 매력적이었다. 여러 모로 장점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내부의 반대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중간에 유찰되면서 하이닉스의 가격도 절반 이상 떨어졌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 동료와 직원들을 더 설득해서 우리가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내가 선택한 사업 중에 매출이 가장 적은 것이 신재생에너지 사업이다. 여전히 유망하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계속해나가야 한다고 보지만 지금까지 봤을 때는 기대했던 것만큼 매출이 나오고 있지 않다. 그래도 이 사업은 계속해야 한다. 화석연료는 고갈되는 에너지이고 환경 문제를 고려하면 계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태양광 사업은 지금 중국 기업이 대부분 잡고 있는데 현대중공업도 잘하고 있다. 중국 제품 가운데 불량품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독일, 스페인 등의 기업에서는 조금 비싸도 한국 제품을 사고 싶어 한다. 지금 당장 폭발적인 수익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기술개발을 계속하다 보면 분명히 좋은 성적을 낼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조직 관리도 경영자의 중요한 과제다.

 현대중공업처럼 커다란 조직에서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 그래서 능력 있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앉히기 위해 애썼다. 인사(人事)가 만사라고 하지 않나.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CEO의 중요한 핵심능력이다. ‘사람은 무능해질 때까지 승진한다는 말이 있다. 능력 있는 임원이나 경영진이 대부분이지만 일 못하는 임원도 분명히 있다. 부장 때 일 잘했다고 상무가 되고 전무가 돼서도 당연히 일을 잘하는 건 아니다. 직급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어떤 직원이 잘못을 저질러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저 사람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됐으니 회사에서 잘라야 한다고 했다. 난 다르게 봤다. 잘못을 개선할 의지가 있는가, 실제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를 살폈다. 기회를 더 주는 게 맞다고 봤다. 자세히 보니 해외 공사 관련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불러서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술을 안 먹는데 술도 한 잔 하면서 다독였다. “당신의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징계위원회에 갔다고 해서 모든 게 다 끝난 건 아니다. 열심히 해서 명예롭게 끝을 맺자고 타일렀다. 그는 나의 믿음대로 일을 잘해냈고 다 망해가던 해외 사업을 되살려냈다.

 인사는 소통인데 쉽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도 타고난 급한 성질을 죽이려고 애썼다. 일방적인 관계보다는 서로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한 직원이 회사에 커다란 손해를 끼친 일이 있었다. 손해액을 보니 대번에 화부터 났지만 일단 참았다. 뒷짐을 지고 한참동안 창 밖을 바라봤다. 화가 나 쿵쾅거리던 가슴이 진정되면 그제야 그 직원을 불러 얘기를 했다. “자네가 책임지고 한 프로젝트가 회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나? 왜 그랬나?”라고 물은 후에 상황이 이해가 되면앞으로는 잘해봅시다라고 타일러 보내곤 했다. 한번은 임원이설계팀 직원이 설계는 안 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이야기하고 남의 일을 방해한다고 직원을 해고하라고 했다. 나는 해고 대신 그 사람을 대민활동 부서에 보냈다. 이런 식으로 강제적인 구조조정이 없다 보니 내가 CEO로 있는 동안 노사분규가 없었다.

 또 겸손하고 겸허해지려고 노력했다. 남의 말을 듣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겸손이 남을 높이고 나를 높이지 않는 것이라면 겸허는 내 생각을 비우고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남의 말을 듣는 것이다. CEO라고 해서 직원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 조직은 절대로 잘될 수 없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려고 했다. ‘평등은 존경하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강조했던 가르침이기도 했다. 될 수 있으면 직원들에게 잘해주려고 했고 약속한 것은 꼭 지켰다. 현장에서는 작업복 차림으로 편하게 직원들과 어울렸다.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이런 것을 불편해하는 경영진도 있었지만 나는 자연스런 관계가 좋았다. 또 시무식 연설 초안이임직원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것을사우 여러분으로 바꿨다. 우리는 모두 회사 친구라는 의미에서였다.

 

 

경영철학은 무엇이었나.

 

세 가지다. 투명경영, 고용 안정 및 고용 창출, 70점 경영이 그것이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보잉에서 일할 때 미국식 경영의 실체를 봤다. 점심 먹고 회사에 왔더니 동료들의 책상 위에 봉투가 쫙 놓여 있더라. 열어보니 급여와 함께더 이상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내용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때 해고당한 사람들의 비참한 심정과 회사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남은 직원들의 불안한 마음을 봤다. 그때 결심한 것이경영하면서 절대로 이런 식으론 안 하겠다’였다. 그래서 나는 CEO가 되고 나서 직원들한테 종종 말했다. “해고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일하라.” 그런데 임원들이 자꾸 100, 120명의 이름이 적힌 명예퇴직자 명단을 갖고 와서 이 중 최소한 40명은 해고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원칙을 고수했다. 대신 예외는 있다. 도박이나 절도를 한 직원, 안전 규정을 어기는 직원은 해고시킨다.

 70점 경영이란 것도 미국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에서 비롯됐다. 회사의 모든 사업에서 수익이 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100점 경영은 망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업이 만드는 제품의 70%에서 돈을 벌고 30%는 미래 상품에 투자해야 한다. 30%는 다시 파생적 신제품 20%와 혁신적 신제품 10%로 나눌 수 있다. 기존 제품과 신제품의 비율이 73이어야 이상적이다. 30%에서 당장 돈을 못 버는 것은 부분적인 후퇴고 전략적인 희생이다. 보통 이렇게 해도 계획을 잘 세우고 체계적으로 사업을 하면 신제품에서 적자가 나는 것을 줄일 수 있다. 사업 초반에 적자가 나더라도 성장성이 있고 유망하다면 금방 만회할 수 있다. CEO가 모든 일에서 다 잘하고 모든 결정에서 전부 완벽히 성공할 수는 없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전략과 전술을 구분해 전략적인 승리를 하자고 생각했다. 작은 전술에서 패배하더라도 큰 전략에서 이기는 게 전략적 승리다.

 

CEO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다 중요하다. 나는 특히 세 가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 무엇을 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할 것인가. 셋째, 실행. 이 세 가지는 인문학, 과학기술 관련 지식, ()과 같은 의미인데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발점은 인문학이다. 이건 단기간에 안 된다. 말을 배울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나는 역사를 좋아해서 역사책과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 CEO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철한 분석, 판단, 결단인데 이것은 역사와 철학에서 배울 수 있다. 그 다음은 과학기술이다. 처음에 연구원 출신인 내가 CEO가 된다고 했을 때 말들이 많았다. 전임 CEO들은 대부분 법대나 경영대학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우려를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90년 말에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한진중공업 등 4곳의 사장이 1년에 두 번씩 모임을 했다. 그때 세간에서 뭐라고 했냐면법대 동창회 한다고 했다. 중공업 회사 CEO들이 모두 법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과학기술 전문가나 연구원 출신 CEO들이 많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드문 케이스였다. 전문기술을 갖춘 CEO들이 좋은 성과를 내면서 지금은 연구원 출신 CEO들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 관련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느냐는 분명 경영에서 중요하다.

 포천에서 조사한 결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2003년 포천에서는 세계 주요 기업 2만여 명의 CEO에게 설문지를 보내책임자로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주관식이었는데 가장 많이 나온 답이예견력’ ‘결단력’ ‘친화력이었다. 이 세 가지 답이 99%에 가까웠다. 나도 예견력이라고 답했다. 이 외에 다른 답을 한 CEO들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유부단한 CEO들이 있다. 신중한 성격에다 아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박한 일을 두고도 시간을 놓치고 만다. 이럴 때는 결정의 데드라인을 정해놓으면 도움이 된다. CEO의 역할과 자질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유능한 CEO가 되살릴 수 없을 만큼 엉망인 기업도 없고 무능력한 CEO가 파괴할 수 없을 만큼 우량한 기업도 없다.” GE CEO였던 잭 웰치와 만났을 때 서로 동의했던 말이다. CEO들이 잘해서 국내 기업들이 다들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면 좋겠다.

 

 

정지영 기자 jjy20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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