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agement Science 2.0
편집자주
경영 현장에 수많은 수학자와 과학자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이들은 전략, 기획, 운영,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첨단 수학·과학 이론을 접목시켜 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경영 과학은 첨단 알고리즘과 데이터 분석 기술로 기업의 두뇌 역할을 하면서 경영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나가고 있습니다. <경영학 콘서트>의 저자인 장영재 교수가 경영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합니다.
올해 3월 미국 부동산 역사상 최고가의 건물 매매가 이뤄졌다. 세계 패션의 메카인 뉴욕 5번가 중심부에 위치한 빌딩이 무려 3억2400만 달러에 매각됐다. 최고가의 부동산 거래라는 사실만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패션계에서는 이 뉴스가 또 다른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건물의 새 주인이 다름아닌 스페인의 패션 그룹 인티덱스(Intidex SA)였기 때문이다. 인티덱스는 세계 패션계의 아이코노클라스트 (iconoclast)인 패션 브랜드 자라 (Zara)의 모회사다. 인티덱스는 매매가 이뤄진 날, 이 거대한 건물을 통째로 자라의 플래그십 매장으로 삼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인티덱스의 건물 매입 뉴스는 ‘패션의 종결지’이자 세계 패션 브랜드의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뉴욕 5번가에 화려한 입성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패션업계는 자라의 거침없는 성장세에 경악했다. 그것도 소위 일류 명품 브랜드도 아닌 저가의 패션 브랜드가 명품숍이 즐비한 5번가에 성대한 입성을 발표했으니 경악할 만도 하다. 자라의 놀라운 성장 이면에는 첨단 과학과 수학이 숨어있다. 이 글에서는 자라의 거침없는 성장세의 주역인 과학과 수학에 관해 알아보겠다.
트렌디와 저가 전략
1975년 스페인에 첫 자라 매장이 문을 연 뒤 1990년대 이르러 적극적인 글로벌 전략으로 유럽지역과 북미지역으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70여 개국에 1600개 이상의 매장을 거느린 명실상부한 글로벌 브랜드다. 특히 지난 3년간 패션업계의 가장 큰 시장인 미국과 유럽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라는 지속적인 매출 성장세를 이어나가며 15% 이상의 영업이익률을 유지하는 저력을 보였다. 비결은 무엇일까? 해답은 자라의 독특한 운영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 패션 브랜드와 달리 자라는 자라만의 독특한 매장 운영, 유통망 관리, 그리고 전략을 구사한다. 자라의 상품 전략은 유행을 신속하게 파악해 초스피드로 시장에 공급하는 패스트 패션 전략을 구사해 트렌드를 성공적으로 상품화한 트렌디(Trendy) 전략과 저가(Low cost) 전략으로 나눌 수 있다.
1. 저가의 비밀, 유통의 과학
우선 저가 전략을 살펴보자. 자라는 제품을 신속하게 제작해 전세계 매장에 공급하는 스피디 운영, 다른 패션 브랜드와 달리 자체 생산 시설에서의 다품종 소량 생산, 번화가에 초대형 매장 운영 등의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이런 자라만의 독특한 운영 방식은 저가 전략의 첫째 조건인 저 비용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상품을 저가에 제공할 수 있을까?
우선 마케팅 비용 절감을 꼽을 수 있다. 다른 일반 브랜드의 경우 6개월 전 상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한다. 이미 디자인이 결정돼 제조에 들어간 상품은 어떻게든 소비자들에게 알려 판매해야 한다. 그래서 카탈로그를 제작하고 유명인을 내세워 광고하며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부어서 자사의 상품을 알린다. 하지만 자라는 다르다. 현재 시장에서 진행되는 유행을 파악해 상품을 내놓기 때문에 특별히 마케팅을 할 필요가 없다. 유행에 호소할 필요가 없이 현재 유행의 흐름만 신속하게 반영하면 된다.
이런 유행타기 전략은 유행 오판에 따른 위험을 줄인다는 장점도 있다. 유행 판단을 잘못한 브랜드들은 시즌이 지난 후 재고 방출을 위해 ‘세일’을 실시해 저가에 물건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자라는 유행을 잘못 판단할 위험 부담이 없어 저가에 재고를 소진할 필요가 없다. 제값 받고 판매하는 상품이 많으니 자연히 전체 비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케팅 비용 절감과 상품을 제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는 이 두 가지 사실만이 자라가 저렴한 가격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비결일까? 자라만이 실행하는 또 다른 비밀이 또 있다. 바로 ‘유통의 과학’이다.
2006년 자라는 새로운 문제점에 직면했다. 당시 브랜드의 글로벌화를 향해 기존 유럽 시장을 벗어나 미주와 아시아권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던 때였다. 전세계 매장 수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문제점이 생겨났다. 당시 자라 본사 물류센터에서는 주 2회 전세계 각 매장으로부터 제품 주문을 받았다. 자라 본사에서 전세계 모든 매장과 연결된 IT 네트워크로 신상품 정보를 전송하면 각 매장의 매니저는 이 신상품 정보와 현재 매장 내 재고를 고려해 신상품과 재입고해야 할 기존 제품의 수량을 전송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인기 상품의 경우 매장마다 경쟁적으로 상품을 확보하기 위해 일종의 ‘유령 주문’을 하면서 물량 주문에 거품이 발생했다.
프랑스 파리의 자라매장을 담당하는 줄리안 라셀링은 이런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한달 전, 신상품으로 나온 재킷 20벌을 본사에 주문했지요. 하루 만에 다 팔렸습니다. 그래서 다음 번 주문할 땐 150벌을 주문했습니다. 이들 재킷도 사흘 만에 다 팔렸죠. 그래서 다시 200벌을 주문했어요. 그런데 본사에서 보내온 물량은 100벌밖에 안되더군요. 다시 추가 물량을 주문했는데 이미 본사에서도 재고가 바닥나서 없다더군요.”
인기 상품은 각 점포가 서로 경쟁적으로 주문한다. 그런데 본사의 재고는 한정돼 있다. 라셀링처럼 주문한 물량만큼 물량을 공급받지 못할 수도 있다. 매장 매니저는 실제 필요한 물량보다 더 부풀려 물량을 주문해 최대한 많은 물량을 확보하려 했다. 이게 바로 유령 주문이다. 모든 매장이 주문 물량 부풀리기를 한꺼번에 시도하면 실제 소비자가 필요한 물량보다 더 많은 상품이 만들어지고 전체 유통망에 거품이 발생한다. 만일 본사에서 이러한 유령 주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실제 시장의 요구로 판단하게 되면 너무 많은 물량을 제조할 것이고, 이는 결국 모든 점포의 재고 부담으로 돌아간다.
자라의 글로벌 팽창 전략으로 매장 수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전세계 모든 지역의 실제 수요를 정확히 판단하는 데도 한계에 이르게 됐다. 실제 수요를 매장 매니저의 경험이나 판단에 의지하는 것도 무리였다. 또 모든 매장을 직접 관리하는 자라로서는 매장마다 서로 경쟁적으로 유령 주문을 하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조치가 필요했다. 여기에 꺼내든 카드가 바로 MIT공대와 협력한 적정 재고량 산출 방식이었다.
당시 MIT 경영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제레미 갤리언(Geremie Gallien) 박사는 ‘수학의 최적화’ 방식을 유통에 응용하는 것에 대해 연구 중이었다. 수학에서 최적화란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적절히 이용해 최대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식이다. 이는 우주 왕복선의 제어 기술에서부터 금융 포트 포트폴리오 결정, 반도체 생산과 같은 첨단 산업의 주간 생산량 결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응용되는 수학적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패션 산업에 응용한다는 생각은 갤리언 교수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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