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의 이미지 생성 AI 기능이 제법 쓸 만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지브리 화풍’으로 표현된 인물화가 각종 메신저 프로필 이미지와 SNS 피드를 도배했다. 지브리의 일러스트 샘플 폴더가 유출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그림이 지인들의 피드를 좇는 내 손끝을 따라 무수히 스크롤된다. 디지털 드로잉을 하나 완성하려면 태블릿과 프로그램, 몇 시간의 수고가 필요했는데 이제는 텍스트 몇 줄만으로도 꽤 근사한 이미지를 뽑아낼 수 있으니 기술이 열어준 새로운 시대에 감탄이 나올 수밖에. AI는 형태를 흉내 내는 데 매우 능하다. 누구나 “이거 진짜 같다”고 말할 만큼 그럴듯한 이미지를 뚝딱 만들어낸다. 하지만 창작자의 시선, 손끝의 망설임 같은 미묘한 결은 결코 담을 수 없다. 처음 볼 땐 감탄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금세 익숙해지고, 세 번째엔 관심이 옅어진다.
반면 진짜 작가가 만든 창작물은 조금 더 투박하거나 덜 완성돼 보여도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에너지와 이야기, 일종의 존재감이 있다. 우리는 한 장의 그림을 보고도 “이건 누구 그림 같아”라고 느낄 수 있고 때론 그런 느낌이 작품의 진짜 힘이 되기도 한다.
모방이 쉬워진 시대일수록 오리지널의 가치는 더욱 분명해진다. 모두가 비슷한 걸 만들 수 있게 될수록 ‘비슷한 것’보다 ‘진짜인 것’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복제된 것들이 넘쳐날수록 그 틈에서 빛나는 건 결국 창작자와 그가 쌓아온 고유한 맥락이다. 진짜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 진짜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희망적이다. 이것은 비단 예술 영역만의 일은 아니다. ‘진짜’는 비즈니스에서도 강력한 차별점이 된다. 브랜드가 넘쳐나는 시대, 소비자는 점점 더 그 제품이 누구의 것인지, 어떤 스토리를 품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정체성이 분명한 브랜드를 선택한다. 이는 곧 예술가의 고유한 시선과 이름을 아카이브하고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 사업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핀즐은 세계 최초로 그림 정기구독 서비스를 개발하면서 바로 그 접점을 만드는 것을 비전으로 삼았다. 단순히 예쁜 이미지를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 뒤에 있는 작가의 시선과 철학, 서사를 브랜드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 전 세계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며 그들의 그림이 단발적인 소비로 끝나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되고 회자될 수 있도록 돕는다. 화풍, 즉 작가의 스타일이 곧 그 작가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그 이름이 브랜드처럼 작동하는 확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 세계 다양한 아티스트가 핀즐을 통해 LG, 현대, 스타벅스 등 세계적인 기업과 함께 브랜드 캠페인을 만들고, 제품을 디자인하며, 수백만 명의 소비자 앞에 그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이고 있다. 현장에서 느끼는 바는 기업들도 이제는 그럴듯한 이미지보다 명확한 작가의 정체성이 담긴 콘텐츠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차별화이고 브랜드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AI의 등장은 분명 예술의 방식과 유통 구조를 바꾸고 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누가’ 보여주는가다. 여전히 사람을 감동시키는 건 사람의 손에서 나온 이야기다. 잘 흉내 내는 세상일수록 진짜는 더욱 특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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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준화jin@pinzle.net
㈜핀즐 대표이사
100여 명의 글로벌 아티스트가 소속된 글로벌 아트 에이전시 ㈜핀즐을 운영하고 있다. ‘예술 경험의 무한한 연결’을 미션으로 2016년 핀즐을 창업하고 2017년 세계 최초의 ‘그림 정기 구독 서비스’를 선보여 2018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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