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은 전 세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운명 해설서이다. 주역의 원리와 운명의 사이클을 활용하면 이미 정해졌다고 느껴지는 운명도 통제할 수 있다. 천지비괘는 상하 간의 소통이 꽉 막힌 상태를 의미하는데 천지비괘를 뜻하는 숫자 ‘111000’의 1과 0의 위치만 바꿔도 소통이 매우 원활한 상태를 의미하는 지천태괘(000111)가 된다. 같은 논리로, 상사나 부하 직원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는 것 같은 간단한 소통의 시도만으로도 운명을 180도 바꿀 수 있다.
쾅쾅쾅쾅. 운명은 장중하게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고 입장한 운명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변주되면서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인간은 불안한 눈빛으로 운명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옷매무새를 고쳐 매고 경건한 자세로 운명을 마주한다. 그리고 싸운다. 운명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한 인간은 환희의 송가를 부른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은 고난에 찬 운명을 극복한 인간 베토벤의 삶을 음표로 옮겨놓은 것이다. 음표는 운명의 행로를 나타내는 기호이고, 그 음표의 연결과 흐름으로 삶이라는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된다. 주역의 64괘도 운명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괘마다 다양한 운명의 변주들이 배열돼 있다는 점에서 주역의 효는 ‘운명교향곡’의 음표와 그 시니피에가 같으며, 괘와 효들의 집합적 구성과 상호작용으로 운명이 완성된다는 점에서 주역은 한 편의 교향곡과도 같다.
주역 64괘는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의 문을 여는 일종의 비밀번호와 같은 것이다. 비밀번호가 숫자의 조합으로 구성돼 있듯 주역의 괘도 숫자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 다만 0과 1 두 숫자의 조합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도어록이나 통장 계좌의 비밀번호와는 조금 다르다. 0은 수축의 성질을 가지는 음(陰)의 상태를 기호화한 것으로 ‘--’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1은 팽창의 성질을 가지는 양(陽)의 상태를 기호화한 것으로 ‘-’으로 표시한다. 111000이라는 숫자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비밀번호를 가진 괘가 64괘 가운데 어떤 괘인지 알아보자. 이미지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된다. ䷋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가 위에 놓이고 땅을 상징하는 곤괘가 아래에 놓이는 복합 괘로 이 괘를 주역에서는 천지비괘라고 읽는다. 초심자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주역에 어느 정도 숙달된 연구자들은 111000이라는 비밀번호를 보면 이것이 천지비괘임을 쉽게 짐작해낼 수 있다. 다른 괘들도 마찬가지다. 주역 64괘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중천건괘는 양효가 여섯 개 중첩돼 있으므로 111111이라는 비밀번호를 갖고 있고, 그다음에 나오는 중지곤괘는 음효가 여섯 개 중첩돼 있으므로 000000이라는 비밀번호를 갖고 있다. 이 비밀번호들을 누르고 입장하면 그곳에서 기다리는 운명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운명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나에게 좋은 상황으로 운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박영규chamnet21@hanmail.net
인문학자
필자는 서울대 사회교육학과와 동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승강기대 총장과 한서대 대우 교수, 중부대 초빙 교수 등을 지냈다. 동서양의 고전을 현대적 감각과 트렌드에 맞게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에 『다시, 논어』 『욕심이 차오를 때 노자를 만나다』 『존재의 제자리 찾기; 청춘을 위한 현상학 강의』 『그리스, 인문학의 옴파로스』 『주역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실리콘밸리로 간 노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