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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이 본 이건희 리더십

“5년 뒤의 세상을 잘 모르겠다면
인재가 신바람 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라”

김윤진 | 309호 (2020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1988년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취임 이듬해 제2의 창업 선언을 통해 경영 이념으로 강조한 것은 ‘자율 경영’ ‘기술 중시’ ‘인간 존중’이었다. 이 같은 이념을 제시한 배경에는 조직의 문화(culture)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구성원 개개인을 존중해야만 ‘세기 말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1993년, 삼성의 핵심 관계사의 임원 200여 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집결시켜 68일간 유럽 산업 현장을 둘러본 것도 모든 경영진이 세계 ‘일류’가 되는 데 필요한 조직문화를 직접 보고 느끼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아날로그 시대를 발로 찬 방향으로 곧장 날아가는 축구공에, 디지털 시대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에 비유하며 변화하는 세상에 대비할 것을 주문했던 이 회장의 리더십을 돌아본다.



“2000년 경기도 용인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그룹 사장단의 5개년, 10개년 계획을 쭉 듣고 난 고(故) 이건희 회장이 이렇게 묻더라고요. 5년 뒤, 10년 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당신들 눈에 보이냐고. 본인은 세상이 어디로 갈지 도저히 모르겠다며, 지금 할 수 있는 건 어떤 미래가 닥치든 능동적으로 대응할 인재를 키우고 그들이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이 회장의 경영 철학이기도 합니다.”

경기도 용인시 자택 인근에서 만난 손욱(75•사진) 전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은 오래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인재와 창의적 조직문화의 힘으로 불확실성의 시대를 돌파할 수 있다고 믿었던 리더”라고 평가했다. 삼성SDI(구 삼성전관) 사장, 삼성인력개발원 원장, 삼성종합기술원 원장, 농심그룹 회장 등을 역임한 손 전 원장은 40여 년을 그룹에 몸담으며 창업주 이병철 선대 회장과 이 회장의 핵심 참모로 일했던 삼성 역사의 산증인이다. 1993년 6월 이 회장이 낡은 업무와 사고방식을 버리라며 경영진에게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일갈했던 것으로 유명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 당시 삼성전자 비서실 팀장으로 이 회장을 수행하기도 했다. 삼성의 경영 철학이 구축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본 손 전 원장에게서 이 회장의 리더십은 어땠는지, 그의 행보가 이 시대 기업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지 DBR(동아비즈니스리뷰)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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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관리의 삼성’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 회장이 조직문화를 강조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이병철 선대 회장은 주어진 목표를 향해 전 구성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관리의 삼성’의 기틀을 닦았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선친으로부터 그룹을 물려받은 1987년은 삼성에는 위기의 시기였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삼성이 한국에서 압도적 1등 기업이었지만 1980년대 접어들자 재계 순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취업 선호도 등 여러 측면에서 현대, 대우에 밀렸다. 특히 당시 경기에 민감한 저부가가치 기술 위주였기 때문에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를 겪으며 심한 타격을 입었고, 2년간은 신입 사원을 아예 뽑지 못했다. 이 회장은 이를 지켜보면서 ‘삼성이 왜 최고의 인재를 뽑고 교육하는데도 계속 뒷걸음질 치는지’를 고민했고, 결과적으로 리더십과 조직문화가 문제라고 진단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더 능동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현대와 대우에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본 것이다.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의적으로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관리의 삼성’ 틀을 깨야 했다. 그가 취임 이듬해였던 1988년, 제2 창업 선언을 통해 ‘자율 경영’의 이념을 가장 앞에 내세운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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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이 말한 자율 경영은 무엇이고, 실제 그룹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

기본적으로 누구나 시켜서 일할 때는 신바람이 안 나니까, 직원들이 스스로 책임 의식을 갖고 성취하도록 하자는 게 자율 경영의 핵심이다. 그래야 창의력이 발휘되고 능력을 꽃피울 수 있지 않나. 이 선대 회장은 늘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고, 목표를 지시하고, 관리하는 정형화된 시스템대로 움직였다. 이와 달리 이 회장은 사장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책임을 부여했다. 오직 인재 교육만 직접 챙겼다. 원래 경기도 용인 삼성인력개발원에는 호암관이라는 연수원밖에 없었는데, 이 회장이 여기에 ‘창조관’이란 더 큰 연수원을 짓고 직접 인력개발원장으로서 어학코스 등 교육 프로그램을 싹 바꿨다. 아울러 전국에 교육장들을 만들고 창의 교육을 강조했다.

신경영을 외친 ‘프랑크푸르트 선언’ 때 수행팀장을 맡았는데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

그때 비서실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된 초임 팀장이었다.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 이 회장이 일본에서 약 13년간 삼성의 고문이었던 기보 마사오, 후쿠다 다미오 등 일본 전문가 4명과 삼성전자의 높은 불량률 등의 문제에 대해 새벽까지 토론하고 아침에 일본 고객사까지 만나 한숨도 못 잔 상태였다. 당연히 비행기에서 푹 주무시고 편하게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륙하자마자 서류 가방에서 고문들의 제언이 담긴 보고서들을 꺼내더니 ‘대체 왜 이런지 답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더라.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부품을 썼으면 원위치에 돌려놓고, 측정기도 다음 차례를 위해 관리하고, 데이터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남겨 놓는 게 정리정돈의 기본인데 삼성 연구•개발자들은 13년간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변하지 않으니 이 회장이 직접 나서 해결하라는 결론이었다. 6명의 수행 팀원이 머리를 싸매고 규칙이 없어서, 교육을 못 받아서, 처벌이 약해서 등의 이유를 찾았지만,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3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숙소에 가서도 자정이 되도록 숙제를 하고 있으니 오죽 딱했으면 홍라희 여사가 “이제 그냥 답을 알려주고 자러 보내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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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답이 뭐였나.

10여 시간 숙제 끝에 해주는 말이, 모든 문제는 ‘직원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거라고 하더라.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갔다. 이 회장의 설명은 이랬다. 부품, 도구, 데이터 등 모든 걸 정리하는 건 다른 동료를 위한 일이고, 다른 동료들에게 베풀면 결국 그들도 나에게 똑같이 해줄 것이므로 정리정돈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현재 삼성의 문제는 직원들이 자기 자신, 동료를 그만큼 아끼지 않고 있는 거라며 신경영은 결국 ‘나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직원들의 일하는 환경,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이 회장이 내세운 ‘자율 경영’의 밑바탕에는 구성원들이 행복한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간 존중의 믿음이 깔려 있었다.

신경영 선언 때 삼성 관계사 임원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68일 동안 유럽, 일본의 일류 기업들을 탐방했다고 들었다.

사전에 계획된 탐방은 아니었다. 일본 고문들의 보고서를 본 이 회장이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절박함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관계사 임원들을 소집한 것이었다. 그는 삼성이 한국 1등인데도 포천 500대 기업 중 꼴찌 기업들과 비교해도 일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참 못 미친다며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임원이 일류를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유럽과 일본 주재원들에게 ‘세계 일류를 전부 찾아라’는 미션을 던진 뒤 200여 명이 자동차부터 백화점, 에어버스, 헬리콥터, 다리 등에 이르기까지 세계 일류의 제품과 인프라들을 경험을 통해 체득하게 했다. 그리고 매일 전원이 임원 출장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유럽 최고급 호텔인 켐핀스키에서 묵으며 밤새 느낀 점을 토론했다. 한국의 업무는 실무자들에게 맡기고 전화조차 받지 말고 몰두하라고 주문했다. 직원들은 임원이 없어야 일을 더 잘할 수 있으며 아래 직급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시간에 임원은 임원의 일을 하라는 설명이었다. 이 회장에 따르면 임원이 해야 할 일은 5년 뒤, 10년 뒤를 위한 전략을 짜는 것이었다.

회장과 토론하면 다들 말을 잘 못할 것 같은데 수평적 대화가 가능한가.

이병철 선대 회장은 카리스마가 있고 숫자 하나라도 틀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영진이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경우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이유가 추궁이라기보단 스스로 생각을 정제하기 위한 목적인지라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됐다. 이 회장이 높은 지위에 있다고 무게를 잡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오히려 몇십 명이 앞에 앉아 있으면 말도 잘 못했다. 신경영 선언 이후 약 1년에 걸쳐 신들린 듯이 7∼8시간 넘도록 강연을 하면서 경영 이념을 조직에 퍼뜨리는 것을 보고 놀랐을 정도다. 그만큼 회사가 변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컸던 것 같다. 보통은 3인용 소파 정 가운데 앉아 양옆에 자료를 쌓아놓고 앉아서는 밤새 질문하고, 듣는 것을 좋아했다. 수요 임원회의 때도 다섯 번은 ‘왜’를 물으면서 현상의 표면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찾을 때까지 파고들고, 또 파고들었다. 이렇게 탐구하고, 질문하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려는 태도는 이병철 회장, 이건희 회장, 이재용 회장 3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산이다.

‘왜’라는 질문을 계속 받으면 경영진도 긴장할 것 같다.

긴장하면서 함께 ‘왜’를 고민하게 된다. 가령, 회사의 점유율이 떨어졌다고 보고할 때도 ‘그건 왜 그렇지’를 다섯 번은 묻는데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진짜 핵심이 무엇인지 윤곽이 드러난다. 1999년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으로 있을 때도 이 회장이 삼성의 미래 먹거리가 무엇인지를 하도 물어봐서 내놓은 답이 바로 ‘바이오’였다. 분명 앞으로의 시대에는 바이오와 IT의 융합이 화두가 될 텐데 ‘왜 삼성엔 바이오가 없지?’의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1980년대 제일제당에서 바이오산업을 시작하긴 했는데 계열 분리가 되면서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그때 바로 삼성종합기술원이 100여 명의 바이오 핵심 인재들을 영입했고, 그들이 주축이 돼 일군 회사가 현재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에피스다. 예전에 삼성SDS의 한 사장이 흑자 전환을 기뻐하며 보고했다가 ‘왜 삼성SDS가 흑자를 내야 하냐’며 작은 이익을 좇는 것보다 삼성SDS의 소프트웨어로 삼성전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게 훨씬 가치가 큰 일 아니냐고 물어 해당 경영자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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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영 당시 삼성헌법도 발표했다.

삼성헌법에는 ‘인간미, 도덕성, 예의범절, 에티켓’이 포함됐다. 처음에 비서실 팀장급들한테 신경영을 위해 헌법을 만들라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을 해도 헌법 조항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막막한 거였다. 너무 어렵다고 이실직고하자 이 회장이 이 네 가지를 직접 불러줬다. 예의범절과 에티켓은 같은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민족은 노인공경 같은 예의범절이 이미 몸에 배 있다. 하지만 에티켓은 다르다. 곰탕집을 하는데 청년 둘이 들어와서 곰탕 두 그릇을 시키고, 조금 있다가 노인 2명이 들어와 똑같이 곰탕 두 그릇을 시켰다고 하자. 두 그릇을 청년들에게 먼저 주는 것은 순서를 지키는 에티켓이고, 노인들에게 먼저 주는 것은 예의범절이다. 생각이 있는 주인이라면 청년들에게 비록 1∼2분 간발의 차이겠지만 노인들을 먼저 대접해도 되는지 양해를 구하고 드리는 게 에티켓과 예의범절을 모두 충족시키는 답이다’라고. 이 회장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에티켓과 한국인 DNA에 박힌 예의범절, 이 모든 걸 잡아야 일류가 될 수 있다고 봤다.

1995년 3월 구미공장에 쌓아둔 5000만 달러어치 불량품을 불태운 ‘애니콜 화형식’도 유명하다.

신경영 선언을 하기 전에 삼성그룹 사내 방송국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작업 현장들을 촬영한 적이 있는데 이때 세탁기 공장에서 직원들이 플라스틱 불량 부품이 발견됐을 때 반품하는 게 아니라 면도칼로 태연하게 깎아 쓰는 게 포착됐을 정도로 품질 문제가 심각했다. ‘그래도 되는 거 아니냐’고 넘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회장은 이를 보면서 ‘아, 회사가 망하겠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1994년에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불량률이 무리한 제품 출시로 11.8%까지 치솟았다. 신경영 이후에도 휴대전화의 결함이 계속해서 발견되자 이 회장은 이를 크게 질책했고, 2000여 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란 현수막을 내걸고 전화기 15만 대를 불구덩이에 내던졌다. 이런 충격요법이 있었기 때문에 불량률이 2%대로 떨어졌고 품질 경영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제품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것 같다.

이 회장은 무조건 ‘월드 베스트’를 지향했다. 항상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기업, 제품과 우리의 현재 위치를 비교하도록 했다. 선진 제품 비교 전시회도 열었다. 수원에 있는 실내체육관에서 매년 회사별로 자기 제품을 세계 1등과 하나부터 열까지 비교하며 회장 앞에서 발표해야 한다. 삼성이 더 나은 부분, 비슷한 부분, 더 떨어지는 부분을 분석한 뒤 개선안을 내놓아야 했다. 문제는 전 과정을 녹화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해 그 약속을 어떻게 이행했는지 다시 같은 자리에서 보고해야 했다. 이처럼 선두주자가 기준이기 때문에 회사 경영진 입장에선 압박도 컸지만 그만큼 일류라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이 회장의 인재 사랑도 각별했다고 하던데...

1990년대 미국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소프트웨어의 시대가 왔고, 많은 예측가는 전 세계 산업의 구조가 ‘하드웨어 100%’에서 ‘소프트웨어 100%’로 옮겨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들 같으면 그냥 트렌드라고 읽고 넘어갔겠지만 이 회장은 바로 정보통신기술(ICT)의 시대를 예견하고 소프트웨어 인력 1만 명 양성을 주문하며 닥치는 대로 뽑고 인사 부문에 해마다 채용 현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인력을 모아놓고 무슨 일을 시킬지조차 몰라 혼란이 있었지만 이들이 결국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IT 기업으로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또 ‘S급 인재 1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발언도 유명하지만 고급 인력을 영입하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연봉과 인센티브도 불사했다. 이런 S급 인재 모두가 탁월한 성과를 낸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의 두뇌를 흡수하는 이 같은 전략은 그룹에 새로운 문화와 혁신의 아이디어를 심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지금의 삼성 조직문화가 이 회장의 바람대로 정말 수평적, 창의적, 자율적인가.

리더의 생각이 조직 전체로 퍼지고 정착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특히 한국처럼 변화가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일어날 때는 여러 모습이 혼재돼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삼성그룹 안에도 창의와 자율을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책임지고 일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권위적이고 갑질을 일삼는 직원도 섞여 있다. 그렇지만 이 회장이 일선에서 조직을 진두지휘한 10여 년간 수직적인 문화가 수평적으로 변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 병석에 눕지 않고 10년 정도만 더 건강하게 조직을 이끌었더라도 그런 문화가 더 빨리 정착되고 창의의 씨앗이 꽃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삼성의 조직문화가 완벽한 일류인지를 묻기 전에 삼성의 글로벌 위상과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 전체 수준이 일류인지를 반문해볼 필요도 있다. 이 회장도 절대 삼성 혼자서만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며 국가 전체의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창의적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과제는.

정치 환경이 자유시장경제를 지금보다 존중하고 자유와 창의가 살아날 수 있는 기업 생태계 조성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삼성, LG는 1950∼60년대 자리 잡은 회사들인데 1970년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나왔고,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걸쳐 아마존, 페이스북, 중국의 알리바바 등이 등장했다. 세계적으로 20년 단위로 기업 생태계가 변하는 흐름이 있고, 알리바바처럼 존재하지 않던 회사가 세계 굴지의 회사가 돼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2000년 무렵 네이버, 카카오 등이 출현했지만 재갈이 물려 있어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했고 기존 대기업 집단의 뒤를 잇는 후속 기업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기업 생태계를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쇠락할 일밖에 없다.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처럼 창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창업 왕국이 돼야 한다. 이제는 1인이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기술을 만들고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디지털 시대다. 한국 젊은이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공무원 시험, 대기업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데 초연결 시대인 만큼 각자의 재능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키우고 마음껏 활약할 수 있어야 한다.

삼성에 없는 것, 그리고 향후 과제를 꼽는다면.

먼저, 아직은 세상에 없는 것(new to the world)을 내놓은 경험이 없다. 한국에 없는 것(new to korea)을 선보인 적은 있지만 한국 최초일 뿐이다. 반도체 메모리든, 디스플레이든 출발은 미국의 기술이었다. 스마트폰도 원조는 아니지 않나. 그런 측면에서 세계 최초를 내놓는 게 필요할 것 같다.

향후 과제로는 ‘나눔(Share)’을 꼽고 싶다. 이 회장 생전에 절친한 사이였던 일본 시네마현 이즈모시의 이화쿠니 데쓴도 전 시장은 삼성 신경영 20주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삼성(三星)이 3성(3Stars)’이었는데 신경영을 통해 ‘Study’ ‘Service’ ‘Sense’ ‘Speed’의 4성(4Stars)이 돼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여기에 또 하나의 성인 ‘Share’만 더한다면 위대한 기업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이처럼 삼성그룹에 남은 한 가지는 바로 나눔, 바로 기업의 공유가치 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이다. 문화를 바꾸고,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사회적 가치의 측면에서 이 회장의 리더십을 돌아본다면.

이 회장은 그룹을 넘어 전체 산업 생태계와 인프라를 생각한 리더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삼성그룹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걸 실패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애초에 이 회장이 자동차 산업에 욕심을 냈던 까닭은 본인이 조예가 깊었던 것도 있지만 미국, 일본, 독일처럼 수출이나 산업 구조 맨 꼭대기에 자동차가 있는 국가들이 일류 국가로 성장하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전자 산업이 맨 위에 있는데 제조업의 꽃인 자동차를 연구하는 인재와 인프라가 튼튼하게 깔려 있지 않으면 창조 경제의 씨앗을 틔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내부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유수의 자동차 회사로부터 인재를 영입하고, 공장을 짓기도 전에 대규모 연구소부터 세웠다. 첫 시제품 모델이 미국 기술 평가 1등을 했을 정도로 R&D에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현대•기아차도 삼성의 인재 양성과 연구 인프라 투자에 자극을 받아 이를 뛰어넘을 남양 연구소를 지었고, 삼성의 시제품 모델을 해체해 뜯어보면서 기술을 고도화했다.

산업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 사회적 기여라는 의미인가.

그렇다. 가전 부문에서 삼성과 LG가 경쟁하면서 한국의 ICT 생태계를 키워갔듯이 만약 삼성이 자동차 산업을 계속 끌고 갔다면 현대•기아차와 치고받으면서 대학, 연구소, 산업계 등에 걸쳐 자동차 연구 인력과 인프라가 지금의 2∼3배는 더 탄탄하게 성장하고 세계 일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처럼 이 회장은 한국 산업 구조 전체를 고민하고 5∼10년을 내다보면서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경영 원로로서 한국의 경영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할 말은.

끝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바보야. 중요한 건 문화야(Stupid. it’s the culture)’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 이게 이 회장이 남긴 메시지이기도 하다. 21세기는 문화가 말하는 시대다. 인간의 수준이 계속 업그레이드돼서 지식은 차이 나봤자 스마트폰만 누를 줄 알면 5분 빠르고 늦는 정도다. 이제 지식으로는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기업이 더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비즈니스로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인재를 틀에 가두지 말고, 존중하고, 직원들이 행복한 일터를 만들어 이들이 신바람 나서 재능을 발휘하게 하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 회장 취임 당시 이익 1조 원을 꿈꾸던 삼성이 지금의 삼성이 됐듯이 말이다.

DBR mini box : 이건희의 ‘기록 철학’
“잘못한 것도 기록하라… 그래야 실수를 반복 안 해”

거장이란 나이가 아닌 경험과 실력, 자신감으로 그 분야나 사회를 이끄는 사람을 말한다. 나라의 거장이 실종된 지는 오래됐고, 각 분야의 거장이 필요한 시기에 또 한 분의 거장이 떠나갔다. 필자는 1996년, 삼성의 반도체사업이 어떻게 시작돼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전•현직 임직원들의 기억과 경험을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들과의 인터뷰를 모두 녹음했다. 하지만 그런 작업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故) 이건희 회장에게도 그런 보고가 올라갔던 것 같다. 이에 이 회장은 관련 임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에게 얘기한다고 생각하고 작가에게 아는 것을 다 말해주라.”

고인은 1997년에 펴낸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끈기 있게 ‘생데이터’를 모아야 한다.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훗날 판명되며, 역사의 차이는 곧 기록의 차이다. ‘생데이터’를 남겨 보라. 내가 지금 말하는 것들을 전부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라. 그것이 삼성의 역사이고, 각 팀의 역사가 되고, 재산이 된다.”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기록을 잘하고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나라일수록 일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기록 문화가 너무 없다. 무엇인지를 규칙적으로 기록한다는 것 자체를 귀찮아 한다.”

“일본과 유럽의 50년 된 회사와 5년 된 회사의 차이는 바로 과거의 데이터 차이다. 그러니 삼성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공개해 탄탄한 기록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필자는 일본과 독일의 기록 문화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일본에 가서 인터뷰를 요청하니 열에 아홉은 작은 가방을 들고 왔다. 가방 안에는 그들이 오랫동안 꼼꼼하게 기록해 놓은 수첩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국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면 대부분 빈손으로 나타나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에서 방문한 현지 기업에는 모두 기록관이 있었다. 기록관이라고 하지만 형식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건물 입구, 복도 혹은 작은 방에 회사의 성장과 변천사를 기록한 사진과 연표, 옛 설비기계, 생산품 등의 기록물을 모아 놓은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기록에 대한 인식과 습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고인이 말했듯이 일본과 독일은 세계적으로 기록 문화가 가장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세계 1, 2위로 많은 장수 기업을 가진 국가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에서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수출 경제로 일어선 것, 탄탄한 기록 문화가 뒷받침돼야 하는 기계공업, 정밀기계공업 강국이라는 점도 두 나라의 공통점이다. 기록 문화를 기초로 제조 강국이 되고, 세계 1, 2위의 장수기업 국가로 성장했다는 해석이 큰 무리는 없다.

다른 한편, 1897년에 설립된 일본의 야마이치증권은 1997년, 창업 100년이 되던 해에 파산했다. 2600억 엔에 이르는 부외채무(簿外債務, 장부에 계상되지 않은 채무)가 파산의 결정타였다. 7500여 명의 임직원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일본 경제에도 엄청난 타격을 줬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2017년 11월를 기획한 일본 언론들이 만난 야마이치증권의 옛 임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우리들이 맡은 업무나 분야에서 정직하고 솔직한 보고서를 안 쓴 게 가장 후회스럽다. 그랬기 때문에 회사에 감당할 수 없는 청구서가 돌아왔다.”

정직하고 솔직한 보고서는 기업이나 조직의 기록 문화의 가장 기초다. 잃어봐야 알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필자가 반도체 역사를 기록한 원고가 나오자 삼성 내부에서 검토에 들어갔다. 의견이 갈렸다. 괜찮다는 의견과 너무 많은 사실을 기록했다는 의견이 있었다. 의견이 계속 갈리자, 이 기록을 처음 지시한 이건희 회장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손보지 않은 원고를 읽은 이 회장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려줬다.

“기록이란 우리에게 유리한 면도 있고 불리한 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작가가 해석한 기록이라면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고인이 남긴 생각과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건 우리 몫이다. 누군가 고인의 생각과 경험을 더하거나 빼려고 할지도 모른다. 으레 그런 게 기록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고인이 떠난 지금, 고인이 남긴 아래 메시지를 기업들이 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사고를 낸 것, 잘한 것, 불편한 것 등을 정리하고 모양이 좋지 않아도 생정보를 그대로 남겨 놓아야 한다.”


유귀훈 기록작가 겸 컨설턴트 yoohun@gmail.com
필자는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아모레퍼시픽 등의 기업사를 집필했으며 현재 프리랜서 기록작가 겸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각 기업 역사에서 배우는 비즈니스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저서로 『사사제작법』 『유귀훈의 기록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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