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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1. 세종 전문가 박현모 교수 인터뷰

경청, 위임, 인재 경영, 케이스 스터디
600년 전 세종은 ‘경영학의 교과서’

고승연 | 254호 (2018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조선 건국 이래 지금까지 가장 유능했던 왕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리더십은 지금 이 시대 기업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선 그는 ‘토론의 군주’로 불릴 만큼 회의에서의 성과에 집착했고 소통을 중시했다.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한 첫마디가 바로 ‘의논하자’였다. 회의를 통해 성과를 내기 위해 세종은 지독할 정도로 ‘경청’했는데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경청이란 리더의 덕목이 아니라 사실상 ‘능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세종은 또한 지독한 실용주의자로서 ‘이론적 프레임’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실제 사례 연구를 통해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정책을 생산해냈다. 그리고 협력이 필요하고 창의적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마다 일종의 TF팀인 ‘도감’을 만들어 빠르게 실행했고 성과가 나면 받아들였다. 그의 회의법, 소통법, 실행법, 인재 경영은 실제로 지금 당장 기업에 적용 가능한 것들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남정희(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잠룡’ ‘대권’ ‘주군’.  여전히 대한민국 언론 정치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현대사회의 ‘대통령’을 전통사회의 왕에 비유해 사고하고 말하다 보니 나오는 표현들이다. 언론뿐 아니라 여러 정치평론가, 심지어 학자들까지 습관적으로 이런 비유와 표현을 쓴다. 하지만 왕정시대의 절대군주와 민주정의 대통령은 엄밀하게 보면 잘 매칭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선출과 승계의 과정이 완전히 다른데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권력의 집중도’가 웬만한 독재국가가 아니면 왕에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시대 왕과 가장 비슷한 상황의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한국 기업들의 오너 CEO일 것이다. 오너 경영자의 경우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고, 자칫하면 아예 견제를 받기가 어려워지며, 인사나 경영 관련 결정에 있어서 사실상 전권을 휘두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꼭 오너 경영자가 아니어도 엄청난 권한이 집중되고 조직(국가 혹은 기업)의 흥망이 리더의 능력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왕과 CEO의 유사점이 있다. 즉, 성군이 망해가던 나라도 부흥시키고 폭군이 부강한 나라도 몰락시켰듯 현대에도 유능한 경영자는 침몰하던 기업을 다시 살려내기도 하고, 무능한 경영자는 잘나가던 기업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조선 건국 이래 지금까지 가장 유능했던 왕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리더십은 지금 이 시대의 정치인보다 오히려 기업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 커 보인다. 세종 즉위 600주년을 맞아 경영전문지 DBR이 여름휴가 스페셜 리포트로 ‘세종 리더십’을 다루게 된 이유다.

세종이라는 인물은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이자 많은 리더가 ‘롤모델’로 삼고 있기에 함부로 다루기도 어렵다. 당장 인터넷 서점에서 세종과 관련한 리더십 서적만 검색해 봐도 수십 권은 금방 찾아낼 수 있을 정도이며, 이미 많은 드라마와 영화, 문학작품 등에서 ‘사실 반, 허구 반의 캐릭터’로 등장한 바 있어 모두가 ‘웬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제대로 ‘실록’을 비롯한 공식적 역사 기록에 기반해 세종의 한마디, 한마디를 탐구하고 당시 권력 관계와 인물 관계, 국제 관계의 맥락 안에서 분석하고 연구하며 논문과 책을 쓴 ‘진짜 세종 전문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DBR은 그런 소수의 ‘진짜 전문가’ 중에서 자타 공인 ‘세종 덕후’ 박현모 여주대 교수를 만났다. 박 교수는 막연한 리더십 강연을 넘어 다양한 방법의 강의와 컨설팅을 통해 실제 세종의 인재 선발과 육성법, 회의방법 등을 기업에 전해주고 있는 국내 세종 연구의 대가다. 그와의 인터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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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의 군주’, 회의와 경청에 대한 집념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처음 한 말, 즉 취임 일성은 “의논하자!”였던 걸로 안다. 1
그렇다. 신하들에게 ‘토론의 군주’로 불리던 임금다운 취임 일성이다. 의논하면서 지혜를 수렴해 결정을 내렸기에 좋은 아이디어를 뽑아 정책으로 삼았고, 그랬기 때문에 언어, 군사, 과학, 의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찬란한 업적이 나왔다. 세종만큼이나 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왕인 정조의 첫 한마디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던 것과 비교해보면 두 임금이 즉위한 시점의 정치 환경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우선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 세종은 아버지(태종 이방원) 세대 혹은 할아버지(태조 이성계) 세대와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을 맞이했다. 태조와 태종의 ‘창업의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덕목과 수성의 시대에 필요한 덕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세종 즉위 이전까지는 사실상 ‘마상(馬上)’에서 일하는 시대였다.

진격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목표를 잡아야 한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챙기고 나눠준 뒤에 다시 도전하는 시기다. 기업으로 치면 초기 창업자들이 한참 하나하나 아주 도전적인 목표를 완수해가면서 기업을 키우는 시기인 셈이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건 원래 전문가의 안목을 평범한 이들이 따라갈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당시 최고 전쟁 전문가는 누가 뭐래도 이성계였고 가장 뛰어난 참모는 이방원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수성의 시기’로 들어서는 세종은 전혀 다른 리더십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절실강직’하게 신료들이 의견을 개진해주길 원했다. 예전 전장에서의 회의와 달리 경험 많은 관료가 각자 주인의식을 갖고 국정을 고민하길 원했다는 얘기다. 왜 그랬을까?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세종 시기는 ‘수성을 넘어 부흥을 하기 시작하는’ 시기지만 세종이 즉위했을 당시에는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실록에도 고위관료부터 백성들까지 ‘이 조선이 얼마나 갈까’ 의문을 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만주라는 여진족 족장이 명과 갈등 중이었고, 우리에게 피해가 오고 있었으며, 칭기즈칸의 후예 몽골족은 종종 베이징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계속 전쟁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명나라 영락제가 전사하기도 했다. 불안정한 북방 환경 속에서 국내적으로도 당시 동아시아 전체가 일명 ‘소빙하기’를 겪으면서 ‘먹거리 부족’에 시달렸다.

‘소빙하기가 실재했느냐’는 사실 현재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기근의 시기였다는 건 확실하다. 불안한 대외환경 속에 동아시아 전체가 겪던 식량난은 이민족의 ‘약탈’을 촉발하는 등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세종에게는 자신이 키운, 자신과 함께해 온 신하보다는 개국 때부터 내려온 공신들만 주변에 있는 잔뜩 상황이었다. 임금 개인의 정치적 운신의 폭이라는 관점에서는 사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막 기업을 이어받은 3세가 할아버지와 함께 창업했던 사장단과 같이 앉아 회의하는 상황과 유사했다. 이 상황에서 세종은 대내외적 난제를 푸는 데 그들의 ‘경륜’을 제대로 활용하고자 마음먹었고, 아니 어쩌면 그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올바른 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뛰어난 신하, 엄청난 경륜을 가진 신하들이 의견을 마음대로 개진할 수 있는 ‘회의’를 국가 경영의 중심에 두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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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세종은 어떤 회의를, 어떻게 했는가?
세종이 ‘자신이 주도하는’ 회의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제대로 하기 시작한 건 군사권을 갖고 있던 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일종의 ‘왕 인턴십’ 기간이 끝난 이후다. 태종 사후, 재위 5년 차부터 세종의 리더십이 진짜 시험대에 올랐다. 그런데 이 해에 세종은 가장 많은 경연을 연다. 2 이때 경연은 지금 시대에 맞게 표현하자면 ‘세미나식 어전회의’다. 우선 고전 텍스트를 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다들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니 한두 번은 봤을 내용이다. 그렇게 고전 속 내용을 얘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그 내부의 사례를 끄집어내 당시 조선이 직면한 과제와 연결한다. 리더십의 시험대에서 노련하고 경험 많은 관료들의 ‘경륜’의 도움을 받아 일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얘기다. 세종 15년과 19년, 파저강 3 토벌을 둘러싼 두 차례의 논쟁, 특히 첫 번째 토벌을 두고 경연에서 벌인 뜨거운 토론 과정은 집단적 지혜를 모으는 과정 그 자체였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당시는 원명 교체의 파동이 여전히 남아 있던 시기였다. 파저강 일대에 이만주라는 족장이 이끄는 여진족이 지속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강진을 넘어와 여연 지역을 약탈하면서 그 정벌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내버려두면 변방의 백성이 살기 어렵고, 공격하러 국경을 넘어가자니 명나라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원정전쟁이 가진 위험성도 큰 상황. 1차 토벌을 앞두고 거의 30차례가 넘는 회의를 진행한다. 모든 가능한 시나리오를 생각해보고 각각의 대응책을 다 만든다. 이 과정에서 현장 지휘관인 최윤덕에 대한 설득도 이뤄진다. 최윤덕은 당시 최고의 명장이었지만 직접 변방에 나가 있었기에 여진을 치러 강을 건너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전투를 해야 할 그곳은 ‘아홉 그루의 나무를 베어야 겨우 별 하나를 볼 만큼 우거져 있는 적진’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 적과 싸워 승리는커녕 자신과 병사들의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심하게 시나리오를 짜고 점검하는 과정에서 최윤덕도 설득이 된다. 명나라의 확고한 지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정보라인을 통해 여진의 현 상황이 어떠하다는 것 등 다양하고 객관적인 정보가 종합적으로 모였다. 세종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관련자들이 종합한 지식을 알려주며 최윤덕에게 ‘전적인 권한 위임’을 약속한다. 그리고 조정(정부)의 모든 지혜를 모아준다. 강을 건널 때, 기습 공격을 감행할 때 직면할 수 있는 위험 요소와 물자 공급과 조달 방법 등이 모두 회의에서 논의되고 결정된다. ‘에러를 최소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실질적’인 회의가 이뤄졌고 파저강 토벌은 대성공을 거둔다.

현재로 돌아와보자. 한국의 많은 기업이 최근 ‘회의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다. 시간만 잡아먹고 실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조직 내 회의에 대한 회의론이 거세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가 정말 ‘회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워본 적이 있나? 사실 없다. 옛날 학급회의 하던 거 말고 회의에는 어떤 종류가 있고, 목적에 따라 어떻게 달리해야 하는지, 실제 어떻게 진행하고, 어떻게 결과를 내야 하는지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그냥 선배들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한 게 전부다. 그러니 ‘회의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는 거다. 지금 우리나라 기업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회의의 대부분은 ‘수사반장식 회의’다. 나도 어디에선가 들은 표현인데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 딱 사건이 터지면 리더가 회의를 소집한다. 간단히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각자 뭘 할지 정해주고 끝난다. 일종의 전시 상황 회의 스타일인데 그런 게 필요할 때도 있지만 전략을 고민하고, 혁신을 하고, 완전히 새로운 경영 환경에서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회의마저 그렇게 진행하면 안 된다. 물론 세종도 항상 ‘세미나식 어전회의’, 즉 경연만 한 건 아니다. 시사회의라고 하는 정무회의, 즉 그때그때 상황 보고받고 빨리빨리 지시하는 회의도 많이 했다. 그래야 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의적 아이디어’ ‘논란이 있을 만한 정책의 결정과 보완책 마련’ 등을 놓고는 최대한 지혜를 모을 수 있는 방식의 회의를 진행한다. ‘경연식 회의’는 그런 면에서 현재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서 다양한 혁신 아이디어가 필요한 기업인들에게 꼭 필요한 회의 방식이다. (그림 1) CEO나 오너가 직접 주재하는 회의가 경영 이론과 케이스 스터디 속에서 진행이 되고 최고 경륜을 가진 임원들과 외부 전문가들의 다양한 제언 속에 진행되는 것, 그 과정에서 CEO가 뭔가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보다 경청을 하다가 최고의 아이디어를 잡아내고 이후 결단을 내리는 것. 이게 바로 세종식 회의, 경연식 회의다. 성과 창출형 학습 회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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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경청’ 얘기가 나온 것 같다. 세종이 회의 진행의 키워드는 ‘자신의 약점 드러내기’와 ‘경청’이었다고 들었다.
맞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역시 그 자체가 세종의 ‘노련함’을 보여준다. 세종은 경륜 있는 신하들, 현장을 잘 아는 실무자들이 ‘침묵’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기업 자문하러 가보면 사장 혼자 떠들고 있고 다들 받아 적고 있거나 고개 끄덕이고 있는 기업은 결코 잘되지 않더라. 경륜 있는 임원들, 현장을 아는 실무자와 전문가들이 마음껏 입을 열고 떠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종은 아마도 ‘회의에서의 침묵’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 같다. 계속되는 회의에서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도 세종이 참 잘했던 것 중 하나인데 앞서 언급한 파저강 토벌에서 결국 승전보가 들려왔는데 기뻐할 새도 없이 “승리했으나 두렵다”고 말한다. 9개 부대로 나눠 시간을 맞춰 기습을 했고 정말 딱 성공했는데 만약 한두 개 변수가 틀어졌다면 실패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났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당장에는 큰 승리를 거뒀지만 여진족이 복수심을 품고 다시 뭉쳐서 위협할 경우도 떠올랐을 거다. 가장 도취돼 있을 때 오히려 리더로서 조직 전체에 위기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기쁨에 들뜨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후의 대처방안에 대해 ‘말해보라’고 한다. 본인의 두려움과 약함을 보여주면서 다시 ‘경각심’을 일깨우고 곧바로 다시 ‘경청’ 모드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내가 『세종실록』을 읽으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는 흔히 경청을 ‘리더의 덕목’이라고 한다. ‘경청하는 리더’라는 말 자체가 사실 굉장히 근사하다. 그런데 실록을 읽으면서 내가 깨달은 건 경청이 리더의 ‘덕목’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경청하는 리더가 되려면 세 가지 하위 능력이 필요하다. 첫째는 ‘인내력’이다. 누군가의 얘기를 계속 진지하게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미 리더가 아는 얘기를 할 때도 있고, 리더 생각에 별로 중요하지 않을 얘기를 구구절절하게 떠들 때도 있다. 이때 개입하거나 말을 차단해버리면 다시는 그들로부터 중요한 얘기를 들을 수 없다. 그렇게 인내력을 갖고 얘기를 듣다가 보면 어느 순간 분명 참신하고 뛰어난 아이디어가 나올 때가 있다. 이걸 집어내는 능력, 이게 바로 ‘경청의 리더십’이 성립하기 위한 두 번째 능력 ‘분별력’이다. 그다음에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바로 ‘위임력’이다. 좋은 의견이 나왔으면 그 의견을 실행할 전문가와 관련자를 정해 철저하게 위임하는 거다. 정리해보면, 참고 듣는 인내력, 좋은 의견을 놓치지 않는 분별력, 믿고 맡기는 위임력 이렇게 3가지 능력이 합쳐져서 만들어내는 게 ‘경청’이라는 ‘리더의 능력’이다.

위임, 현장, 인재, 그리고 ‘지식경영’
세종은 현장에서 직접 실무자 혹은 기업으로 치면 ‘고객’인 백성과 대면해 소통하는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내가 쓴 『세종의 적솔력』이라는 책의 첫 장이 ‘문어농부(농부에게 물었다)’라는 사자성어로 시작한다. 세종 7년, 가뭄이 아주 극심했고 관료들은 문제를 해결하러 뛰어다니기보다 몸을 사리며 ‘지방근무’를 꺼리는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세종은 수시로 밖으로 나가 농지를 둘러봤고 둘러보다 ‘벼가 잘 자라지 못하는 곳’을 발견하면 농부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물었다. 들판의 농부에게 왕이 직접 다가가 무엇이 가장 어려운지, 어떤 것을 도와주면 좋겠는지 묻고 경청했던 셈이다. 그것도 항상 호위군관 한 명만 대동한 채였다. 주눅 들지 않은 채로 솔직하게 문제점을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농사나 세금 정비 등 현장에 답을 물어봐야 하는 문제와 전문가들끼리 논의해야 할 문제, 즉 훈민정음 창제나 북방 영토 개척 등의 문제를 잘 구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가뭄에, 관료들이 별다른 대책 없이 몸을 사리기 시작할 때 왜 그렇게 현장을 돌았는지는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왕이 직접 행차해 뭔가를 묻고 다닌다는 게 어떤 의미겠는가. 그게 그 당시 조선에서 왕이 관심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다. 가뭄에 농사짓는 사람을 자주 만나러 다니는 건, 전체 관료사회에 ‘지금 모두 이 문제에 신경 써라’고 경고하고 알려주는 것이다. 이는 평소 백성에 대해 세종이 얘기하던 것과 일맥상통하는데 세종은 농업을 그 어떤 임금보다 중시했고 늘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즉 밥이 하늘이다”라는 문장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쨌든 아무리 세종이라고 해도 직접 모든 문제의 해법을 내려고 하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직접 현장에 가서 현장이 어떤지를 보되 결국은 각 고을의 수령이 일을 잘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현장에서 문제를 파악한 이후 360여 곳의 각 고을에 수령을 파견할 때마다 직접 그들을 불러 ‘친견’하고 당부했다. 이렇게 고을에 수령을 파견할 때마다 불러서 ‘해결해야 할 문제’와 ‘관심 가져야 할 것들’에 대해 당부하고 말한 임금이 조선시대 통틀어 거의 없다. 이미 자주 현장을 방문해 백성의 고충을 알고 있었기에 큰 틀에서, 그러나 아주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당부와 지시를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령이 바뀌면 전임자는 세종에게 와서 자신이 실제로 임금의 뜻을 잘 실천했는지 보고해야 했다.

결국 ‘현장 경영’ 얘기는 ‘위임’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국가든, 기업이든 결국 경영의 핵심은 ‘위임’이 아닐까 싶다. 실록을 보면 세종 시대에도 ‘위임’을 놓고 엄청난 논쟁이 벌어진다. 내가 『세종실록』을 수차례 정독하면서도 항상 ‘위임 논쟁’은 진짜 보석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세종 즉위 직후 얼마 안 돼 김점과 허조가 아주 세게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김점은 유력한 외척이었고, 허조는 사대부 출신의 전형적인 엘리트 관료였다. 세종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싸우다시피 하는데 그 싸움의 쟁점이 바로 ‘왕이 위임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였다. 일단 김점은 중국의 황제처럼 왕이 모든 것을 총람해 하나하나 챙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국인 중국도 그렇게 한다(실제 어떤지와는 관계없이)’는 게 핵심 메시지였다. 그런데 허조는 이것에 극렬히 반대했다. 허조는 “중국으로부터는 배워야 할 것도 있지만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며 “왕의 역할은 일을 잘하는 인재를 잘 찾아내서 믿고 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성의 故 이병철 회장의 HR 원칙이라고 하는 ‘의심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얘기가 바로 여기에서 허조에 의해 계속 인용된다. 내가 알기로 이병철 회장도 『세종실록』에서 이를 따왔다. 세종은 우리가 알다시피 허조의 입장에 동의했고, 최고의 인재를 찾아내 그에게 믿고 맡기는 방식을 따른다. 앞서 파저강 토벌에서 승전보를 알린 최윤덕에게도 철저하게 위임했고, 이후 북방개척을 이룬 김종서에게도 그랬다. 심지어 누군가 김종서를 모함하자 “의심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확하게 되뇌며 김종서를 보호했다. 음악과 관련해서는 박연한테 전부 다 위임을 하고, 대일본 외교는 당시 최고 전문가인 이예에게 일임한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위임이 사실 쉬운 게 아니다. 기업 자문을 하다 보면 많은 CEO나 임원이 위임을 힘들어한다. 내가 볼 땐 이건 당연한 방어본능이다. ‘내가 위임해준 사람이 실수하면 어떡하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이 틀어지면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하는 건 본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원래 경영은 ‘모험’이다. 인재를 쓰는 것은 가장 큰 모험이다. 계속 위임하지 않고 세부적인 지시만 하면 인재는 육성할 수 없다. 그러면 이제 리더는 뭘 해야 할지 답이 나온다. 인재를 선발하는 능력, 알아보는 안목, 육성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이제 자연스레 세종의 ‘인재 경영’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세종이 어떻게 인재를 발탁해 활용했는지를 얘기하기 전에 세종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던 ‘민감성’과 ‘유연성’에 대한 얘기를 잠시 하는 게 좋겠다. 그 두 가지가 결국 인재를 선발하고 그들에게 적절히 위임해 전체적인 경영을 이끄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종은 스스로 안목이 흐려지지 않는지, 자신의 사고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끝없이 점검했다. 자기를 늘 관찰했다는 얘기다. 스스로를 돌아보다가 ‘내가 요새 많이 혼란스럽다. 나 자신을 아직까지는 절제할 수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이걸 신하들과 측근들에게 말해준다. 보고 있다가 자기가 통제를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 같으면 옆에서 지적해달라고 하는 거다. 도와달라고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책을 읽으면서 계속 성찰한다. ‘이 황제는, 이 왕은 이래서 망했구나. 나도 그럴 수 있다’고 계속 반성하는 과정이 나온다. 그러면서 ‘유연성’과 ‘민감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다. 어떤 분들은 ‘세종이 그때 그 상황이니까, 또 지금 우리가 한참 뒤에 보니까 대단해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 이 시대에, 이 복잡한 환경에 두면 별다른 성과를 못 낼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세종 리더십의 핵심은 ‘무엇을 이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 즉 방법론에 있다. 그 방법론은 너무도 강력하다. 그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 리더가 된다면 역시나 특유의 방법론으로 시대에 맞게 민감성과 유연성을 갖고 경영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파저강 토벌의 최윤덕은 사실 ‘학식’은 부족했지만 뛰어난 용맹과 무예, 현장 지휘 능력이 있었다. 세종은 김종서로부터 그 강점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를 발탁했고, 나중에는 “가히 영의정도 될 만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변방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군에게 최고의 신뢰를 보낸 것이다. 최윤덕이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오랜 시간 영의정을 지내기도 했던 유정현의 등용은 ‘단점’을 ‘장점’으로 발상의 전환을 이뤄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유정현은 사실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베풀 줄 모르고, 동산에 있는 과일도 모두 시장에 팔아서 조그마한 이익까지 계산했다’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심지어 곡식이나 돈을 꿔 주고 이자를 받는 데에도 한 치의 온정이 없어 백성들 사이에서는 ‘영의정(유정현) 장리는 죽을망정 절대 꿔 쓰지 않겠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세종은 바로 그에게 나라 살림을 맡겨버렸다. 유정현의 지독한 긴축재정은 세종 초기 잇따른 흉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관노 출신 장영실의 등용이라든가, 결함이 많았던 황희 등을 결국 계속 활용해 명재상으로 만든 얘기 등은 뭐 이미 너무 유명하지 않은가. 4 인재 경영 얘기를 마치기 전에 집현전 얘기는 간단하게나마 하는 게 좋겠다. 5 지금으로 치면 엄청난 싱크탱크(Think Tank)이자, 기업의 R&D센터이자, 동시에 경제경영연구소 같은 곳이다. 집현전에 뛰어난 인재를 모아놓고 끝없이 육성했던 것은 아마 대부분 알고 계실 거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집현전은 결코 ‘세종의 친위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집현전은 ‘정치적 독립성’이 아주 강한 곳이었다. 세종의 정책이나 의견에 반대하는 일도 많았다. 집현전 학사들은 “이 나라는 전하의 조정이 아닌 사직이 물려준 조정입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세종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토론하고 말 그대로 지혜를 모아가는 곳이었다. 어전회의는 다 집현전에서 준비했다. 세종이 볼 때 어전회의는 그 국가의 수준을 보여주는 곳이었고, 어전회의의 수준과 능력이 곧 국가 능력이었다. 지금 기업으로 치면 R&D 핵심 인력과 경제경영연구소의 석학들이 기업의 전략회의에 참여해 중요한 안건마다 전문적인 식견을 알려주는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CEO나 오너의 정책에 반대까지 하면서 말이다.

세종은 ‘경학’이라고 하는 이론 프레임에서만 국가 경영을 논하지 않고 역사서를 중시하면서 다양한 사례, 요즘으로 치면 ‘케이스 스터디’도 굉장히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주경익사’의 국가 경영을 한다. 풀어 설명하면, 경학 즉 이론적 고전 텍스트를 기본으로 놓고 날개처럼 역사를 공부해 지혜를 얻고 국가를 경영한다는 거다. 그런데 세종은 역사를 통해 배우는 사례를 다른 왕보다 더 강조했다. 주사익경이라고 할까. 당시 석학 중 한 명이었던 윤회와 이를 두고 실제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실제 중국과 고려의 옛 사례를 당시 조선에 맞게 적용하는 것을 중시했던 세종은 재위 7년 집현전의 선비들에게 모든 사기(史記)를 나눠주고 읽도록 했는데, 신하 윤회가 반대하고 나섰다. 윤회는 전통적인 유학과 유교정치론에 입각해 “옳지 않다. 대체로 경학이 우선이고 사학은 그다음이 되는 것이니 오로지 사학만을 닦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이를 받아치는 세종의 말이 압권이다. “내가 물어보니 신하들이 옛 사례를 하나도 모르더라. 지금 선비들이 말로는 경학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경학이나 제대로 공부하는지 의문이다”라고 받아쳤다. 당시 세종은 신하들이 항상 경전만 가지고 논하다가 현실, 즉 사례를 모르고 엉뚱한 얘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닌지 되물었던 셈이다. 세종 입장에서 국가 경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실제로 존재했던 성공과 실패의 사례이고 그 교훈이었다. 경전이 제공하는 이론적 프레임은 그 사례를 현실에 적용할 때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사용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지독하게 실용적인 생각이었고, 어찌 보면 그게 세종 시대의 번영을 만든 바탕이었다. 세종은 이렇게 역사적 사실과 실제 사례를 중시하다 보니 그걸 기록하는 것 또한 매우 중시했다. 정인지는 세종에게는 친구와 같은 신하였고, 가장 신뢰하는 ‘천재형’ 신하였는데, 다른 모든 신하가 ‘조선의 역법’을 만드는 데 실패했고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이걸 정인지에게 맡겼다. 결국 1년 만에 일식과 월식을 다 계신하는 조선의 달력을 정인지가 만들어낸다. 엄청나게 칭찬을 하고 격려한 뒤에 참으로 세종다운 일을 한다. 곧바로 ‘지금까지의 경험, 어떤 시행착오를 겪어서 지금까지 왜 실패했고, 어떤 걸 극복했기에 결국 성공했는지’ 모든 것을 기록해 백서로 남기라는 지시를 내린다. 세종이 가장 잘한 일, 가장 좋아한 일이 바로 이런 ‘백서 만들기’였다. 역법을 정리한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 의학을 집대성한 『향약집성방』과 농사 기술을 모은 『농사직설』도 이렇게 사례를 모아 백서를 펴내는 것에 대한 세종의 집착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이런 백서의 서문은 대부분 세종이 구술하고 세자나 신하 신숙주가 쓰는 형태로 작성됐다. 이런 서문을 쭉 모아 보면 세종이 이론을 바탕으로 사례를 연구해 국가를 경영하는 하나의 프로세스가 보인다.

어떤 프로세스인가?
나는 그걸 ‘I3 U1’의 법칙이라고 부르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세종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먼저 과거의 사례나 중국 등의 선진 사례를 가져와 모방한다. Imitate다. 장영실 등을 시켜 중국의 과학기기들을 잘 보고 가져와 베껴 만들라고 한 게 바로 이런 거다. 그다음에는 그걸 실제로 적용해보면서 improve한다. 만약 중국의 역법이거나 중국의 과학기구라 조선의 실정에 안 맞으면 그걸 맞게 발전시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역량을 바탕으로 invent를 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의 실생활에 쓰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개량하고 보급한다. Utilize의 단계다. 세종 시대 수많은 발전이 있었다. 농업의 발전이나 훈민정음 창제, 제도의 발전이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 훈민정음 창제만큼이나 높게 꼽는 건 ‘역법’과 ‘천문학’의 발전인데 이게 곧 ‘조선의 자체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물시계, 해시계 만들어서 종로 거리에 내놓는다. 실제로 백성들이 그 시간을 보고 생활에 도움을 얻으라고 한 것이다. 이런 실생활 적용이 없으면 뭐 하러 힘들여 개발했냐는 실용주의가 깔려 있다. 조선의 역법을 갖게 되자 달력을 만들어 뿌리고, 농업백서를 만들어 보급한다. 법과 제도를 더 많이 배우게 하려고 고민하다가 결국 글자까지 만든다.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가 하나 잘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뜬금없지만 중국에 대한 ‘사대’와 관련된 것이다. 요새 세종을 폄하하면서 지독한 사대주의자로 비판하는 경우가 간혹 보이는데, 고려 말 이후 당시 명나라와 신뢰가 완전히 깨진 상태여서 세종 시대에는 명의 신뢰를 회복하는 게 매우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세종은 지극정성으로 사대외교를 펼쳤다. 그런데 이게 한편으로는 어마어마한 실리였다. 그렇게 신뢰를 쌓았기에 조선의 역법을 따로 만들고, 천문학을 발달시키고, 심지어 스스로 글자까지 만들었지만 외교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CEO 세종’의 소통과 경영
세종 시대를 공부하다 보면 ‘허조’라는 인물이 가장 흥미롭다.
그렇다. 세종의 영원한 ‘악마의 변호인’이자 ‘충성스러운 반대자’다. 세종 시대엔 그런 신하들이 많았지만 허조는 정말 대단했다. 허조를 계속 중용했다는 게 어찌 보면 세종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수령고소금지법 같은 경우 세종은 백성이 부당한 일을 당하면 수령을 고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허조는 극렬히 반대했다. 세종은 그답게 기어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지시하고 본인이 직접 뒤져가면서 중국에 분명 그런 게 가능했던 사례가 있었음을 찾아와 ‘그런 전례가 없다’는 허조에게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게 어떤 정책이든 실제로 실행이 되든, 안 되든 장단점이 자연스럽게 논의가 됐고 방향이나 취지는 좋으나 부작용이 예상되는 정책들은 수정 보완될 수 있었다. 허조와 같은 충성스러운 반대자들의 역할이 참 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반대자를 두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내가 아는 교수 중 한 대학의 A 교수와 다른 대학의 B 교수가 있다. 둘 다 경영학자다. A 교수는 항상 기업에 좋은 소리만 한다. 늘 편든다. B 교수는 굉장히 비판적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죄다 A 교수만 찾아간다. 이게 현실이다. 외부 교수도 쓴소리하는 사람은 외면하는데 지금 기업 내부에서 쓴소리를 한다? 이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 뭔가 제도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왕의 행동과 말을 기록하는 사관을 못 건드렸듯, ‘간언’을 하는 선비를 건드리지 못했듯 뭔가 제도적으로 ‘쓴소리’와 ‘반대’를 보장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교수나 전문가에게 컨설팅을 주는 대신 비판적인 목소리를 차라리 돈 주고 사라고 말하고 싶다. 안 그러면 기업이 망하는 건 순식간이다. DBR 같은 경영 전문지도 계속 쓴소리해 줄 필요가 있다.

자연스레 ‘세종 시대’를 통해 지금의 한국 기업들에 대한 조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항상 놀라는 부분이다. 기업에서 세종 연구자인 나를 왜 자꾸 찾을까 생각해보면 그 리더십으로부터 배울 게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요새 모두가 ‘소통’을 강조하고 있는데 진짜 리더의 소통이란 결국 세종의 소통이 아닌가. 반대자일수록 더 언로를 열어서 무조건 말하게 하고, 일방적인 지시가 내려가는 회의를 극도로 혐오하고. 세종의 질문법 내지 대화법에 그 소통력과 유연성의 본질이 있다. 세종의 대화법이랄까 거의 어투에 가까운 것을 한번 소개해보겠다. 대한민국 정치가는 물론 CEO들이 이것만 좀 배워도, 리더들이 이것만 의도적으로 따라 해도 진짜 큰 발전이 있을 거다. 첫째는 ‘질문으로 말문 열기’다. 세종의 회의에서 첫마디는 항상 ‘어찌하면 좋겠는가’였다. 자신이 나름 답을 아는 것도 더 좋은 답을 듣기 위해,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해 항상 물었다. 그다음에 어떤 의견을 신하가 말하면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경의 말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러니 신하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고 떠오르는 좋은 생각을 지체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화를 계속 촉진하기 위해 세종이 쓰는 세 번째 어법은 “나는 잘 모른다”였다. 그렇게 신하들이 계속 말을 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네 번째, 그렇게 쏟아져 나온 말과 말들을 연결했다. 즉, 본인도 머릿속에서 연결하고, 신하들한테도 생각과 생각이 연결되도록 자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적솔(앞장서 행함)’이라고 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게 다섯 번째다. 즉, 좋은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실천하도록 독려하고 개인적 실천이나 실행이 필요한 경우엔 직접 했다. 정리해보자. 세종의 소통법은 첫째, 질문으로 말문을 열고, 수긍형 대답으로 추가 아이디어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겸손한 경청을 통해 계속 사람들이 말하도록 하고, 네 번째로 ‘연결하여 듣기’, 마지막으로 ‘실천하기‘ 순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어느 조직에서든 이걸 그대로 한번 따라 해보라. 내가 이끄는 세종 즉위 600년 기념 사업하는 조직에서도 실행 중인데 생각보다 어렵다. 내가 계속 이런 소통법을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도 기업 관련 자문을 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해면서 겪은 게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국내 유수 대기업에서 디자인 경영 프로젝트를 도울 때였다. 3년 가까이 했는데, 나름 글로벌 기업인데도 전문가인 디자이너들이 어떤 안을 올리면 사장이나 임원들이 ’이거 버튼 위치 옮겨‘ ’안 예쁘잖아. 다시 해‘라고 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진짜 디자인 전문가들의 얘기를 듣지도 않고 ’내가 높은 사람이니 내가 더 잘 안다‘고 착각하고 실제로 그걸 지시하고 있었다. 내가 더더욱 세종의 회의법, 세종의 소통법을 퍼뜨려야겠다고 작정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세종식 소통 목표, 세종식 회의를 할 때 회의 전 체크리스트와 회의 후 체크리스트가 무엇인지 최근에 심혈을 기울여 정리하기도 했다. 기업에서 많이들 참고했으면 좋겠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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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CEO 세종‘의 측면에서 기업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요새 세종 리더십이 각광받으면서 ’CEO 세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그냥 그럴싸하게 갖다 붙인 말은 아니다. 진짜 현대의 벤처사업가, 위대한 경영자, 스타트업 CEO 같은 면이 있다. 혁신적 리더로서의 면모가 실록에 꽤 많이 드러난다는 얘기다. 세종이 TF팀을 엄청나게 많이 운영했고 실제로 TF에서의 다양한 의견 교환과 실험을 통해 성과가 나면 이를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곤 했다. 부처 간 경계를 뛰어넘어 협력을 이끌어내는 ‘도감(都監) 경영’이 바로 그것이다. 이 도감은 설치 배경 자체가 상설 관서가 처리할 수 없는 사안이 있을 때 만들어지는 태스크포스(Task Force) 조직이었다. ‘일이 있으면 설치하고, 일이 끝나면 폐지하는[因事而置 事已則罷]’ 일 중심의 조직‘인데 세종은 그때까지의 어느 임금보다 도감을 자주, 그리고 효과적으로 운영한 것으로 나온다. 실록에서 ‘도감’이라는 말을 검색해보면 『태조실록』에 42건, 『태종실록』 153건이 나오는 데 비해 『세종실록』에는 무려 235건이나 등장한다. 세종은 첫째, 매우 중요해 긴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사안, 둘째, 사안이 복잡해 여러 관서가 합좌해 처리해야 하는 사안, 셋째, 문제를 해결할 관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사안이 발생했을 때 TF, 즉 ‘도감’을 설치했다. 재위 8년(1426년) 도성 대화재사건 때 만들어진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예로 들어보자. 이건 일종의 소방방재 TF였다. 이는 나중에 정식 소방방재청 같은 기관으로 변했다. 순찰을 할 때 목탁을 쳐서 릴레이식으로 현재 상황을 알리는 방식이 개발됐고 곧 적용됐다. 금속활자를 제작할 때, 새로운 중국의 과학기술을 들여와 개발하고 발전시킬 때에도 이런 도감, 즉 TF는 계속 만들어졌다. 이론팀과 기술팀의 협업으로 혼천의 같은 천문 기구가 제작되기도 했는데 이 역시 ‘협업을 위한 도감’을 통해 이뤄졌다. 궁중음악 혁신을 위한 관습도감, 궁궐공사를 맡은 궁궐도감, 왕실장례를 맡은 국장도감 등 세종은 뭔가 협력이 필요하고 창의적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마다 도감을 만들어 빠르게 실행했고 성과가 나면 받아들였다. 정리해 보자. 늘 강조하는 세종의 회의 경영과 소통 경영을 수치로 한번 보자. 세종의 의사결정은 회의를 통한 것이 63%, 명령이 29%였다. 반면 그의 아들인 세조는 명령이 75.3%, 회의가 20.9%였다. 세종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군주였지만 모든 결정을 신하들과 의논해 내렸다. 세종은 평균 생산량을 고려하되 일정한 세수를 얻을 수 있는 ‘공법’ 개혁을 하기 전에, 즉 토지조세 제도를 변화시키기 전에 17년 동안 토론했고 17만 명의 일반 백성으로부터 여론을 모았다. 17년 걸려 만든 제도는 250년 가까이 지속됐다. 6 100년 기업도 만들기 어려운 세상에서 기업인들이 눈여겨볼 사례들이자 성과가 아닐까.

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인터뷰이 소개
박현모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정조의 성왕론과 경장정책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정치 연구는 정조로 출발했지만 이후 세종에 푹 빠져 세종 연구의 대가가 됐다.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약 15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및 책임연구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여주대 교수 겸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2005년부터 ‘실록학교’라는 시민강좌를 열어오기도 했다. 저서로 『세종처럼』 『세종의 적솔력』 등이 있으며 그 외 많은 논문과 저서가 있다. 2018년 세종 즉위 600년을 맞아 각종 학술 행사를 기획, 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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