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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성 우리금융그룹 회장의 예술경영 도전기

인재•고객 하모니로 일군 서울시향의 혁신

DBR | 15호 (2008년 8월 Issue 2)
1998
년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쓰던 드럼 가죽 하나가 찢어졌다. 당시 서울시향은 세종문화회관 산하 9개 예술단체 가운데 하나였고, 사실상 서울시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서울시향이 드럼 가죽을 바꾸기 위해 경비를 요구하자 서울시는 조례에 따라 조달청 단가로 입찰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아무도 드럼 가죽 하나 때문에 입찰에 응할 리 없었고, 서울시향은 가죽이 찢어진 드럼으로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 공무원의 관료체계 아래서 운영되던 오케스트라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서울시는 1999년 7월 세종문화회관을 독립법인으로 전환하고 서울시향의 경영권을 세종문화회관 사장에게 넘겼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 운영자들과 서울시향 단원들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서울시향은 발전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99년 KBS교향악단이 84회의 연주회를 한 데 비해 서울시향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36회의 연주회만 열었다. 그나마 초대권을 뿌려서 객석의 절반을 채울 수 있었다. 서울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지만 시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었다.
 
그러던 서울시향이 2005년 6월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뒤 지난해 눈에 띄는 성적을 냈다. 법인화 이전인 2004년과 비교해 자체 수입이 1억 4000만 원에서 33억 2000만 원으로 껑충 뛰었다. 연주회 수는 61회에서 121회로 두 배가 됐고, 관객 수는 2만 4000명에서 16만 6000명으로 증가했다. 유료관객 비율은 34%에서 64%로 늘었다.
 
이 같은 변화를 이끈 주인공은 음악에 완전 문외한인 것은 물론 40년 가까이 금융업계에서 ‘좌뇌’만 쓰고 살아온 전문경영인이었다. 바로 이팔성 우리금융그룹 회장이다. 그는 1967년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에 입행해 우리증권 대표이사를 거쳐 2005년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서울시향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 회장은 서울시향 대표 시절 경영혁신을 이뤄낸 사례를 소개하기 위해 지난달 22일 연세대 글로벌 MBA 여름학기에서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번트 슈미트 교수가 맡은 수업인 ‘마켓 이노베이션’의 강연자로 나섰다. 서울시향의 경영혁신 사례는 슈미트 교수와 연세대 박헌준 교수(경영학)에 의해 강의 교재로 만들어졌으며, 다음달부터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수업에서 사용된다. 이 교재와 이 회장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시향의 변화 과정을 정리했다.
 
금융-음악 달라도 경영은 매한가지
“2005년 서울시로부터 서울시향의 대표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서울시향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처럼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키우겠다는 계획이었다.
 
나는 38년 동안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하다는 금융기관에서만 일해 온 터라 과연 감성적이고 우뇌를 쓰는 음악이라는 분야에서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음악, 특히 클래식음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금융은 돈을 매개로 하고 오케스트라는 음악을 매개로 한다는 것만 다를 뿐 경영이란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렸다.
 
2005년 6월 서울시향의 법인화와 동시에 내가 대표를 맡기 시작했다. 민간기업 출신의 전문경영인이 문화기관의 수장이 된 것은 한국에서 처음이었다. 이에 앞서 세계적인 찬사를 받는 정명훈 지휘자가 서울시향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임명돼 서울시향의 음악성을 높일 기회가 생겼다. 나는 경영을 책임지면서 먼저 세 가지를 목표로 정했다. 음악의 질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이는 것과 공공성 및 수익성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관객’이 아닌 ‘고객’으로 불러라
서울시향 대표가 되자마자 ‘관객’이라는 용어부터 없앴다. 관객이라고 하면 일회성에 그치는 느낌이 들고, 정성이 부족해 보인다. 대신 반복적이고 관계지향적인 뉘앙스를 주는 ‘고객’으로 바꿨다. 이 단어 하나가 굉장한 변화를 가져왔다. 직원과 단원들의 마인드 자체가 달라졌다.

회의는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사원들을 포함해 전 직원 20여 명과 함께 했다. 사회생활을 처음하는 신입사원들이 대표와 함께 회의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반 기업이었다면 직원과 단원들에게 성과급을 굉장히 많이 줬을 텐데 그런 것이 없었던 게 CEO로서 가장 아쉽다.”
   
 
숨은 인재를 찾고 찾고 또 찾아라
음악의 질을 높이기 위해 오디션을 철저히 했다. 기존 단원 100여 명 가운데 절반이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빈자리는 국내뿐 아니라 뉴욕과 런던, 암스테르담에서까지 오디션을 열어 단원을 뽑았다. 총 3000여 명이 오디션에 응모했는데 2030명만 채용했다. 사법고시보다 붙기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격하게 뽑았다.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음악성이 없으면 정식으로 채용하지 않았으며, 부족한 인원은 객원 연주가들로 채웠다. 지난해 공연을 121회 했는데 리허설까지 포함하면 연중 365일 내내 연주했다고 할 수 있다. 단원들이 정말 잘 참아 주고 열심히 해줬다.

이 밖에 세계적 수준에 걸맞은 공연기획을 하기 위해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의 부사장을 지낸 마이클 파인을 영입했다. ‘아르스노바’라는 현대음악으로 유명한 진은숙 상임작곡가를 영입한 것도 성과였다.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인사 평가에서는 최하위 5% 인원이 재계약에서 탈락하고 그 다음 20%는 계약을 재고하는 대상이 된다. 급여 체계는 경력보다 능력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개정했다.”
 
수익성 높일 생존법을 모색하라
“2004년만 해도 서울시향 공연에 관객 10명 중 7명이 무료초대권을 들고 왔고, 3명만 유료티켓을 가져왔다. 당연히 수익을 내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64%가 유료관객이다. 음악성을 높이고 클래식 애호가를 많이 만들기로 한 목표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이다. 재정자립도는 기존 5%에서 25%로 상승했다. 앞으로는 베를린필처럼 시의 지원과 자체수입이 절반씩 으로 재정자립도를 50%로 높이는 게 목표다.

서울시향은 ‘SPO Friends’라는 유료회원 제도를 운영해 고정 고객을 확보했고, 홍보활동도 강화했다. 티켓 가격은 기존의 1만
3만 원에서 1만10만 원으로 다양화해 시민들의 선택 폭을 넓히고 수익성도 챙겼다. 생존을 위해서는 외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에 따라 대기업의 협찬과 후원을 적극 유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기업들을 찾아가 ‘서울시향이 이렇게 달라졌으니 함께 연주회를 열면 어떻겠느냐’고 부탁했지만 지금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기업들이 먼저 같이 공연하자고 연락한다. 수익이 좋아지니 서울시향은 더 나은 연주력을 선보일 수 있었고, 유료관객수도 점점 많아져 선순환이 이뤄졌다.”
 
음악을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서울시향 재정의 대부분은 서울시가 지원한다. 결국 서울시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공공성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때문에 클래식음악의 저변을 넓혀 시민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을 높이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만든 게 ‘찾아가는 음악회’였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공연이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관객에게 오라고 하는 공급자 중심의 시각이었다면 이제는 서울시향이 음악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학교와 병원, 심지어 땅끝마을인 전남 해남까지 찾아갔다. 서울시향의 이미지가 좋아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멀게만 느끼던 클래식음악과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는 광복절마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음악회를 열고 있다. 서울광장에서 수용 가능한 인원이 약 1만 5000명인데 첫 회에 훨씬 많은 시민들이 오는 바람에 절반은 발걸음을 돌려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두 달쯤 후에 연주회를 또 한 번 열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컸다.
 
서울시향이 변화를 시작한지 3년 됐으니 음악으로 치면 4악장 가운데 이제 1악장을 막 마친 셈이다. 4악장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되는 것이라면 2, 3악장은 아시아의 톱 오케스트라가 되는 것이다. 서울시향은 3년 안에 일본 NHK 교향악단을 따라잡아야 한다. 한편 오케스트라는 국가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올해 2월 뉴욕필이 평양에서 공연했는데 서울시향도 함께하고 싶었지만 못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언제 될지 모르겠지만 서울시향이 평양에서 공연하는 것도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팔성 우리금융그룹 회장은 1967년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에 입사해 우리증권 대표이사를 거쳐 2005년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서울시향 대표이사를 지냈다. 5월부터는 우리금융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 법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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