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2년 1월 23일, 칠중성(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임진강 나루에서 신라군 부대가 도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폭이 넓지 않고 겨울이어서 수량도 적었지만, 신라군의 눈에 비친 강은 영락없는 죽음의 강이었다. 기나긴 삼국 항쟁의 역사 동안 신라군이 이 강을 넘어 고구려 영토로 진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신라가 최대 영토를 확보했던 진흥왕 때에도 고구려의 모서리인 동해안을 따라 점령했을 뿐이다. 고구려의 중심인 황해도·평안도 지역에는 발도 디뎌 보지 못했다.
불침의 땅 고구려에 진입한 신라
이 불침의 땅으로 지금 신라군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2만6000석의 식량 수레를 끌고서 말이다. 당시 수레에는 10∼15석 정도를 실을 수 있었으니 2만6000석이면 약 2000대의 수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긴 행렬을 전투부대가 호위하면서 고구려의 영토 200km를 종단해 평양성까지 가야 한다.(이때의 구불구불한 도로 사정과 우회 기동을 해야 하는 사정을 감안하면 실제 이동 거리는 400km가 넘을 것이다) 당시 평양성을 포위 중인 당나라군이 식량이 부족해지자 신라에 군량을 조달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고구려를 공격하는 당나라군을 원조하는 작전이었기에 이 전역(戰役)은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삼국 항쟁은 오늘날의 국가적·민족적 시각이 아니라 당시를 산 사람들 입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이런 저런 감정을 떠나 순수한 군사적 입장에서 보면 이 전역은 이 땅에서 행해진 모든 군사작전 가운데 가장 어렵고도 곤란한 작전이었다.
고구려 군대가 당나라와의 전쟁에 투입된 상황이라고는 해도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지키는 군대가 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 도로는 매우 열악해서 경상도에서 거둔 조세를 서울까지 수송하는 것도 대단히 힘겨운 일이었다. 북부 지방의 지형은 더욱 험악했으며, 때로는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의 추위도 이겨내야 했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산악도로로 수레를 밀면서 지금까지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고구려 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나가야 하는 힘겨운 여정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참담한 심정으로 강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65세의 노장군(당시 평균수명은 잘 해야 40대 정도였다)이 선두에서 배에 올랐다. 사령관 김유신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그는 고구려군을 피해 수레부대를 끌고 험한 산길로 우회했다. 그러나 황해도도 벗어나기 전에 고구려군의 차단선에 걸렸다. 신라군은 포기하지 않고 전투를 벌여 정면 돌파에 성공했다. 혹한과 눈보라로 병사와 가축이 동사했지만 끝끝내 황해도를 돌파해서 평양성 60km 지점까지 진출한다.
벼슬 내걸고 결사대 모집
하지만 이곳에서 신라군은 한계에 부닥쳤다. 당나라군 협력 없이는 돌파가 불가능했지만 당나라군은 신라군이 여기까지 온 것을 알지 못했다. 김유신은 급찬(級飡) 벼슬을 내걸고 결사대를 모집했다. 그러자 열기와 구근이라는 용사가 자원했다. 이들은 15명의 팀을 짜서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뚫고 당나라군과 연락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식량을 전달하자 더 큰 위기가 닥쳤다. 식량을 얻은 당나라군이 바로 철군했기 때문이다. 김유신 부대는 고구려의 영토 한복판에 갇혔다. 필사의 탈출이 시작됐다. 소의 허리에 북을 매달고 꼬리에 북채를 매달아 북을 치게 해서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척 위장하고, 병력을 빼내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는 전설은 이 탈출 과정에서 발생했다. 고구려군은 신라군이 국경인 임진강을 건너려는 즈음에 간신히 따라잡았다. 그러나 신라군은 희생을 내기는 했지만 선발부대와 후발부대 간 유기적인 협력 작전으로 큰 승리를 거두고 도하에 성공한다.
성공의 원동력은 김유신 리더십
이 작전이 성공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김유신의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 김유신은 신라에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이다. 신라에 투항해서 진골 신분을 얻었지만, 정통 신라 귀족들로부터 상당한 차별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정치적 능력과 부단한 자기계발로 이런 차별을 극복했다. 그의 처남인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할 당시 김유신은 이미 신라의 정통 가문들을 압도하는 최고 군벌이 돼 있었다. 서기 661년 무열왕이 사망하고 문무왕이 즉위했다. 문무왕은 김유신의 조카다. 이로써 그는 혈통적으로도 망명 왕족이 아닌 정통 신라 왕족이 됐다. 그동안 받아온 모든 차별과 콤플렉스를 완벽하게 극복한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억울한 경험과 한이 많은 사람들은 그 한을 극복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김유신은 이 함정을 극복했다. 그 증거가 662년의 고구려 원정이다. 김유신의 삶의 목표가 개인적 한의 극복이었다면 이 원정에 참여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문무왕의 즉위와 함께 그는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고구려 원정은 성공 가능성이 없는 위험한 원정이었다. 성공해도 그에게 도움이 될 게 없고, 실패하면 전사하거나 정치적 실각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맛봐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김유신은 이 원정에 참여했다. 이유는 국가적 입장과 국가적 미래라는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을 가짐으로써 그는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탁월한 통찰력을 지닐 수 있었다.
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받고 발을 뺀다면 이미 백제도 멸망한 상태에서 고구려와 신라 간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그러므로 신라는 힘들어도 승부를 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