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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서얼 출신 천재의 성깔도 참아준 정조, 박제가의 단점까지 포용하다

노혜경 | 192호 (2016년 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정조는서얼차별이라는 부조리를 혁파하기 위해 당시 서얼 출신의 수재들로 소문난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박제가 4인방을 규장각에 등용했다. 특히 박제가에 대한 정조의 총애는 지극했다. 박제가가 중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자 아예 4번이나 중국에 파견해 명실상부한중국 전문가로 만들어줬다. 심지어 박제가가 자신을 고을 수령으로 임명해 주지 않는다며 정조를 비방하는 시를 지었지만 너그럽게 용서해 줬다. 정조가 박제가를 특별하게 대우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개성과 천재성을 인정했고, 동시에 그의 불우한 성장환경과 처지를 동정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리더는 부하직원의 단점을 교정할 필요도 있지만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조선에는서얼차별법이라는 세상에 없는 악법이 있었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이 법은 첩에게서 난 자손이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이 법은 태종 때 논의돼 서얼차별이 시작되다가 세종이 정식으로 법전에 넣은 조항이다.

 

그런데 세종이 법전에 이 조항을 넣게 된 이유를 따져보면 사실 나쁜 뜻으로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니었다. 소수 가문이 서로 이중삼중으로 얽혀서 혼인관계를 맺고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법이었다. 또 하나는 11처제를 강행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든 법이지만 의도가 아무리 건전했다 해도 방법이 잔혹했던 건 사실이었다. 수백 년간 비정한 법이라는 목소리가 높았고 여러 관료들의 상소문과 개혁방안 속에 바로잡자는 의견이 계속됐다. 하지만 막상 폐지되지는 않았다. 이런 현상은 조선 후기가 될수록 더욱 심했다. 가뜩이나 과거급제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관직자리 하나 얻기가 어려운데 여기에 서얼차별을 폐지하면 당장 경쟁률이 2배 이상이 될 것은 뻔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서얼차별을 없앤 정조

 

영조도 서얼차별을 없애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노력은 했지만 서얼차별을 약간 완화하는 데 그쳤을 뿐 폐지하지는 못했다. 결국 공은 정조에게로 넘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1777(정조1), 정조는 서얼차별법을 폐지했다. 하지만 법을 바꾼다고 곧바로 서얼들이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다. 양반은 넘쳐나고 관직은 적어 명문대가 출신도 관료가 되기 어려운 판국에 서얼을 끌어주고 승진시켜 주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이때, 정조의 귀에 천재로 이름난 서얼들이 있다는 소문이 들어왔다. 조선의 관료에게 매우 야박했던 청나라 최고 학자들도 인정한 수재들인데 조선에서는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시기하고 배척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정조는 특명으로 이 수재들을 등용했다. 그냥 등용한 것이 아니라 규장각의검서관이라고 해서 아예 이들을 위한 자리를 새로 만들어서 임명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박제가 네 사람이 역사에 등장하게 됐다.

 

정조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있었던 이 수재들을 등용했을 뿐 아니라 진정으로 아꼈다. 검서관이란 직책은 사실 그렇게 좋은 관직은 아니었다. 정식 문관직도 아니고 천한 잡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정조가 이들을 정식 문관직에 임명했다면 아마 다른 관원들에게 벌떼같이 공격을 받아 진즉에 파면되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검서관이란 관직은 정조가 이들을 특별히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검서관의 직급은 낮았지만 정조는 이들을 하루에만도 세 번씩 꼬박꼬박 만나며 특별 예우를 했다. 조선시대에 왕과 직접 대면하는 건 대단한 영광이었다. 실제로 이렇게 매일 왕을 만나는 사람은 재상과 승지밖에 없었는데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 매일 만날 수 있었다는 건 특혜였고 그만큼 총애를 받는다는 뜻이었다. 이들이 받는 봉급은 적었지만 정조는 이들의 경조사를 빠짐없이 챙겼고 생필품도 수시로 하사했다. 이덕무에게 하사한 물품만 해도 139종이나 됐다고 할 정도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조는 이들에게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길도 제공했고, 중국에 다녀온 박제가가 중국의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의>를 저술하자 그를 4번이나 중국에 파견해 명실상부한중국 전문가로 만들어줬다. 차별받는 수재를 등용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들의 재능을 살려 적재적소에 배치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정조의 최고 장점이 있다. 바로, 이들의 한계와 단점까지도 포용해냈다는 점이다. 정조는 주변의 여러 관료들의 온갖 질투와 비방에도 불구하고 이 네 명의 서얼출신들을 끝까지 지켜줬다.

 

박제가를 향한 정조의 총애

 

그중에서도 박제가는 정말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인물이었다. 네 명 중에서도 특히나 유별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박제가 등 소위서얼 4인방은 모두절친이었는데 다른 3명은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성품도 원만했지만 유독 박제가만 키도 작고 못생긴데다 성격도 모났다. 겉모습과 성격뿐만 아니라 생각도 시대를 한 100년은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어느 시대든 천재는 성격이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던 사례를 여럿 접할 수 있는데 박제가는 심지어 재상에게까지 대들며 심하게 싸운 적도 있었다. 1797(정조 21), 정조가 능에 행차했을 때 박제가가 신하들 사이에서 접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심환지가 박제가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아 있지 말라고 핀잔을 줬는데 박제가는 대뜸 집에서 가져온 의자라며 벌컥 화를 내면서 사납게 대들었다. 몹시 화가 난 심환지는 정조에게 박제가를 파직시키라고 했다. 그러자 정조는 이렇게 말렸다. “박제가가 말버릇이 안 좋은 것은 원래 성격이 고약해서 그래요. 그대가 그냥 참으세요.”

 

그런데 박제가는 이미 1786(정조 10)경에 사고를 친 경험이 있었다. 이때는 재상에게 대드는 수준이 아니었다. 10년 넘게 검서관으로 일했는데 승진을 안 시켜준다는 불만을 드러내놓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정조가 승진을 시켜준 상황이었다. 박제가의 진짜 불만은수령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령을 해야 왕처럼 한번 살아볼 수 있고, 유람도 다니고, 재산도 제대로 불릴 수 있었다. 이덕무는 1781(정조 5), 유득공은 1784(정조 8)에 각각 수령으로 임명돼 나갔는데, 정조가 박제가는 임명해 줄 생각을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따져보면 정조는 나름대로 박제가를 배려한 것이었다. 검서관은 승진은 안 되지만 대신 임기도 없는 장기 보직이었다. 그리고 박제가 성격에 수령이 되면 사고를 치든가 상관에게 미움을 받아 당장 파면될 게 뻔했다. 그래서 정조는 박제가의 수령 임명을 미루고 있었다. 정조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박제가는 이런 시를 지었다.

 

나는 전생에 늙고 둔한 말이었을 거야

날마다 채찍을 맞고 300근을 나르고 있으니

나는 너무 열심히 일해

오장을 다 태우고, 시력까지 잃었는데

월급이 있다 해도 화려한 무덤 꾸밀 수나 있을까

구구하게 임금 향한 마음이 있었기에

벼슬지위 높낮음을 가리지 않았네

내 벼슬은 악공과 같아 창피한데 어떻게 문단

(검서관직)을 따르겠나

남들은 출세했다 말들 하지만

정작 내 아내는 치마 하나 없구나

그래도 성군 곁에서는 길이 있을 것이니

강연회도 참여하고 설날 조회에도 참석하리라

 

시에서 표현한이 자기라면 매일 채찍으로 때리며 학대하는 주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자기는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온 몸을 불살랐고 시력까지 잃었는데 보상은 전혀 없다고 했다. 정조의 귀에 들어가길 바라며 노골적으로 박제가 자신도 어서수령으로 임명해 달라고 떼쓰고 있는 내용이다.

 

조선시대에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왕을 악덕 고용주로 묘사하는 관료는 없었다. 그런데 박제가는 한술 더 떠서 이 시를 동료들에게∼’ 돌렸다. 요즘 세상에도 자기 상관이 악덕 고용주라는 글을 지어 SNS로 돌리면 어떻게 될까?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을 것이고 모함이다, 법적대응이다 등등 꽤나 시끄러워졌을 것이다.

 

사실 정조는 하극상을 떠나 우선 서운했을 것 같다. 정조의 마음으로는내가 너를 이렇게 배려하고 있는데, 내 마음도 모르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박제가를 처벌하지 않았다. 처벌하지 않은 것은 물론 1792(정조 16)에는 박제가를 부여현감으로 임명했다.

 

 

그토록 바라던수령생활을 하게 된 박제가는 과연 훌륭한 현감이 됐을까? 정조의 처음 걱정대로, 박제가는 얼마 못 가서 암행어사에게 걸려 파면대상이 됐다. 충청지역에 가뭄이 들어 굶는 사람이 많아지자 각 지역 수령에게 진휼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런데 경험이 부족했던 박제가는 굶는 자를 공정하게 가려 뽑지 못했고 세금 독촉 방식도 서툴러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암행어사의 감찰보고를 받은 정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힘 있는 수령은 봐 주면서 힘없고 배경 없는 박제가 같은 사람만 잡았다고 했다. 실제로 박제가의 죄목은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사안이었다.

 

법은 법인만큼 정조는 박제가를 일단 파면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영평 현령으로 다시 임명했다. 이번에는 경험을 쌓아서 그런지 박제가도 감찰에 걸리지 않고, 고을 주민에게 인기 있는 수령이 됐다. 그리고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며 이곳 영평에서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아주 큰 업적을 세웠다. 바로 종두법을 개발해 주민들에게 시술한 것이다. 종두법은 흔히 다산 정약용과 박제가가 중국에서 들여온 책을 보고 함께 연구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박제가가 종두 배양에 성공한 뒤 영평에서 첫 번째 시술이 이뤄졌다.

 

진정한 리더는 부하직원의 단점을 교정할 필요도 있지만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조직원들의 개성을 인정하고 단점까지 포용해야

 

정조가 규장각 4인방을 등용했던 것은서얼차별이라는 부조리를 혁파하기 위해 일종의 시범을 보이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런 전시용 의미를 떠나서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섬세하게 보호했다. 박제가의 중국행처럼 각자의 장점을 파악해 재능을 살릴 기회를 제공했고 국왕을 비방하는 전대미문의 행위까지도 용서해줬다. 그렇다고 정조가 약하거나 권위의식이 없는 군주는 절대 아니었다. 드라마 속 정조의 모습을 기억하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정조는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무서운 군주였다. 하지만 박제가에게 만큼은 예외였다.

 

정조가 박제가를 특별하게 대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박제가의 개성과 천재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박제가를 비롯한 서얼 4인방의 용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서얼 중에서도 천재성을 보인 인물들을 규장각 검서관이라는 최측근으로 두고 자신의아이디어 뱅크로 활용한 것이다. 많은 리더들은 공손한 직원을 좋아한다. 그리고 동일한 미덕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계속되다 보면 조직은 획일화되고, 경직되며, 개성 있는 직원은 조직을 떠나게 된다. 사람들은 큰 배가 안전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개성 있는 인재가 사라지면 배는 잠들고, 거대한 유람선은 타이타닉이 될 수도 있다.

 

또 하나, 정조가 박제가를 용납한 것은 그의 불우한 성장환경과 처지를 동정하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리더는 부하직원의 단점을 교정할 필요도 있지만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박제가와 서얼 동료들의 현실적인 가치를 생각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그들을 끝까지 지켜주려 한 정조의 태도가 돋보인다. 그들의 단점조차 인정하고 포용하며 끝까지 지켜주려는 자세, 이것이야말로 부하직원을 분발시키고 부하직원으로부터 진정한 신뢰를 얻는 방법이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가 있다.

  • 노혜경 | - (현)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덕성여대 연구교수
    - <영조어제해제6> 저자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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