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만큼 우리 귀에 익숙한 프랑스 어구도 없을 것 같다. 고귀한 신분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이 말과 함께 우리는 왕자를 전장에 보내는 왕실을 가진 영국을 부러워한다. 또 록펠러 집안을 가진 미국을 부러워한다. 재산, 권력, 명예를 가진 이들이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감동과 함께 우리사회에 선의가, 서로에 대한 신뢰가 확산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런데 이런 기대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이 기대 속에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건강한 시민 정신을 엿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가진’ 이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게 할 현실적인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희생을 하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희생을 하는 가진 이에게 그가 원하는 무언가를 보상으로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속된 말로 ‘팔을 비틀어’ 강요할 수도 있다. 문제는 보상의 약속 또는 위협 속에서 이뤄진 희생에는 감동이 없고 게다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선의의 확산, 신뢰의 확산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오히려 월드컵을 치르면서 시민들이 보여준 질서의식, 태안반도 원유 유출 사태에서 보여준 자원봉사 물결에서 우리 사회의 품격을 높일 시민사회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능성을 볼 수는 없을까. 동료 시민들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 가운데 내재하는 품위를 감동으로 발견했던 경험이 있다.
미국 미네소타 주정부의 세무당국에서 시행한 연구 결과가 흥미롭다. 납세자들에게 세무감사의 가능성을 높이겠다고 위협했을 때보다 성실납세자 비율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 자진납세 신고액이 늘더라는 것이다. 모두 팔짱 끼고 있는데 혼자라도 나서서 땀을 흘리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세상에 법을 어기고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는 사람 천지라는 믿음이 팽배하다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사람을 기다리기는 무망할 것이다. 재산이 많은 사람의 마음도 똑같다고 본다.
시민사회와 정부가 협력해 잔치판을 만들어 준다면 빠른 속도로 우리 사회에 자원봉사문화, 기부문화가 자리 잡지 않을까.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 희망을 전하는 기관과 단체의 포털 사이트를 열 수는 없을까. 이런 단체나 기관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연말 세금정산 때 번호를 기입하는 것만으로 세액의 일부가 기부될 수 있도록, 기부하기를 쉽게 만들어 줄 수는 없을까. 공산주의 권위주의 체제로부터의 전환을 경험한 중부 유럽의 모든 나라가 퍼센트법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한 해에 한 번이라도 시민사회가 함께 기부에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꽃을 피울 자리를 마련해 줄 수는 없을까.
가진 이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하기보다 준법을 요구해야 한다. 시민사회가 먼저 기부문화, 자원봉사문화를 꽃 피울 때 가진 이들도 감동으로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요크대학과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GRIPS)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 경제 사회와 사회적 자본>, <학교의 질, 학업성취도, 과외수요에 대한 실증연구> 등 다수의 논문과 보고서가 있다.
김태종
- (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학처장
- 캐나다 요크대학,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GRIPS)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