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12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피렌체의 국민장
1516년 3월 19일, 피렌체에서 엄숙한 장례식이 개최됐다.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러진 이 장례식의 주인공은 짧은 기간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 1479-1516)였다. 토스카나 지방의 싱그러운 봄을 보지 못하고 메디치 가문의 수장은 37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폐결핵이 그의 목숨을 빼앗아가 버렸다. 줄리아노는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 레오 10세의 동생이었다. 살아생전 그는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 1세로부터 느무르(Nemours)의 공작으로 임명돼 통상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로 불린다.
피렌체 도심에 있는 메디치 궁전에서 출발한 장례 행렬은 메디치 가족 성당인 산 로렌초(San Lorenzo)를 향해 천천히 행진했다. 너무 많은 시민들이 장례행렬이 지나는 좁은 골목길로 몰려들어 압사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경찰의 보고가 접수될 정도였다. 3년 전에 교황으로 즉위(1513년)한 레오 10세는 동생의 장례식을 주관하기 위해 취임 후 처음으로 고향을 찾았다.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피렌체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교황의 친동생이자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줄리아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조용히 지켜봤다.
당시 피렌체의 임시 시장이었던 마르첼로 아드리아니(Marchello Adriani)가 고인을 위한 추도사를 맡았다. 피렌체의 문학가이자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젊은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를 애도하며, 피렌체를 이끌고 갈 ‘제1 시민(principes)’인 메디치 가문의 사명에 대해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현직 교황을 포함한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아드리아니는 진정한 리더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웅변을 토했다.
리더의 사명은 비르투스(Virtus)
마르첼로 아드리아니는 리더의 사명을 ‘비르투스(Virtus)의 실천’이라고 역설했다. 비르투스는 영어로 덕행, 선, 가치, 순결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진 ‘Virtue’의 라틴어 어원이다. 고대 로마세계에서 덕(德)과 가치를 의미했던 이 단어는 남성다운 기질, 용기 등의 의미로 확대됐지만 ‘탁월함(Excellence)’이란 단어로 번역할 수 있다. 아드리아니는 비르투스를 ‘포르투나(Fortuna)’와 대비시켰다. 포르투나는 영어의 포춘(Fortune)에 해당한다. 행운으로도 번역할 수 있고 부(富)로도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아드리아니는 리더라면 포르투나가 따르게 마련이지만, 진정한 리더는 포르투나를 넘어서는 비르투스, 즉 탁월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들에게 포르투나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비르투스는 용기를 통해 성취해야만 하는 탁월함의 품격이었다.1 탁월함의 추구는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요구한다. 마르첼로 아드리아니는 줄리아노의 장례식에서 피렌체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메디치 가문을 향해서 용기를 통해 성취해야만 하는 탁월함의 품격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부와 명예의 축적은 포르투나의 영역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정신을 이끌어 갈 탁월한 리더에게는 비르투스가 요구된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비르투스의 상징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영묘는 산 로렌초 성당의 신 성구실에 모셔져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영묘를 조각한 사람은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다.2 미켈란젤로는 특유의 천재성을 발휘해 망자(亡者)인 줄리아노의 모습을 비르투스를 추구하는 리더의 화신으로 표현했다.
고대 로마의 늠름한 장군 복장을 하고 있는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지휘봉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숙고하는 모습으로 앉아있다. 미켈란젤로는 그를 탁월함의 품격을 가진 진정한 리더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메디치 가문이 추구했던 탁월함의 덕목이었던 ‘신중한 사람’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미켈란젤로는 줄리아노의 전신상 아래에 <낮>과 <밤>이라 이름붙인 두 개의 상징적인 인물을 배치했다. 부엉이와 노인의 얼굴 조각이 포함된 여인상 <밤>은 어둠 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 몸을 틀면서 태양을 응시하고 있는 남성의 누드 <낮>이 그 반대쪽에 배치돼 있다. 이것은 마르첼로 아드리아니가 메디치 가문의 사명을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비유한 것과 연관있다.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고단했던 역사가 전쟁과 분열의 암흑 속으로 빠져들 때, 메디치 가문의 탁월한 지도자들이 ‘어둠을 밝히는 빛’이 돼야 한다고 촉구했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에 요구됐던 비르투스는 ‘탁월함을 통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를 아십니까
줄리아노가 사망(1516년)하자 이제 피렌체를 이끌고 갈 메디치 가문의 리더는 ‘우르비노의 공작’으로 불리던 로렌초(1492-1519)밖에 남지 않았다.3
불과 21세라는 나이였던 로렌초는 삼촌 줄리아노의 뒤를 이어 비르투스의 리더십을 발휘해야만 하는 부담스러운 자리에 올랐다. 이런 불안하고 부담스러웠던 리더의 배후에 탁월했던 조언자가 있었다. 바로 <군주론>이란 책으로 현대 정치학의 시조로 불리는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다. 그는 자신의 <군주론>을 새로운 피렌체의 군주로 임명돼 비르투스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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