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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6>톱니바퀴 같은 시스템, 제국을 이끌다

김영수 | 52호 (2010년 3월 Issue 1)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진시황의 리더십이야말로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인재 기용책에서부터 알 수 있다. 진왕 정(즉위 후부터 황제 즉위 전까지의 진시황의 호칭)은 춘추시대 진 목공 때부터 이어져온 국적, 신분, 민족을 따지지 않는 완전 개방된 인재 기용책을 실행했고, 이것은 거의 불문율의 전통이 됐다. 이는 진왕 정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인 몽오, 환기, 양단화, 왕전, 왕분, 여불위, 이사, 몽염 등의 면면을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들 중 절반이 외국 출신이었다. 여불위는 위(衛)나라, 이사는 초(楚)나라 출신이었다. 군사 방면에서 큰 공을 세운 몽오와 그 손자 몽염은 제(齊)나라 출신이다.
 
통일 과정에서 진왕 정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인재라면 자존심마저 버리고 데려오기도 했다. 이는 불세출의 전략가이자 진왕 정의 생부인 여불위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진왕 정의 인재 기용과 관련한 두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먼저, 위나라 출신의 전략가 위료의 기용이다. 위료는 진왕 정에게 재물로 제후국들의 신료들을 매수하라고 건의해 이를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위료는 진왕 정의 성품이 각박하고 잔인해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사람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경멸했다. 하지만 진왕 정은 자신을 경멸하는 위료를 책망하기는커녕 간곡하게 그를 설득해 붙잡아두고는 전폭적인 신임을 보냈다.
 
다음으로 대장군 왕전에 대한 태도다. 조, 위, 연을 차례로 정복한 진왕 정은 다음 목표로 남방의 강대국인 초를 지목하고는 왕전에게 필요한 군사력을 물었다. 왕전은 최소 60만 명이라고 대답했다. 진왕 정은 터무니없는 숫자라고 생각했다. 젊은 장수 이신(李信)에게도 물었다. 이신은 20만 명이면 충분하다고 큰소리쳤다. 진왕 정은 이신에게 20만 명을 줘 초를 공격하게 했으나 대패했다. 진왕 정은 일찌감치 사직서를 내던지고 낙향해 있던 왕전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군대를 통솔해달라고 사정했다. 왕전은 “늙은이가 무슨 쓸모가 있냐”며 딴전을 부렸다. 진왕 정은 다시 간청했다. 왕전은 60만 명이 아니면 안 된다고 조건을 내세웠고, 진왕 정은 왕전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었다.
 
통일 제국에 맞는 시스템 정비
기원전 221년 진왕 정은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중국사 최초의 통일 제국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대신들과 상의한 끝에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되, 첫 황제라는 의미로 ‘시황제(始皇帝)’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진왕 정은 진의 시황제, 즉 진시황으로 불렸다.
 
진시황은 화폐, 도량형, 문자의 통일을 비롯해 각종 문물 제도를 규격화하는 전무후무한 통일 정책을 실시한 장본인이다. 물론 이런 통일 규격화 정책은 진시황 이전 효공 때 상앙이 터전을 마련해놓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나라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진시황의 통일 정책은 통일 제국 전체를 대상으로 시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질량이 달랐다.
 
진시황은 이와 함께 전국의 행정 체제를 중앙 집권화하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정치와 행정 기구를 일사분란하게 다듬은 후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기축이 되는 분야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진시황은 심지어 수레바퀴 크기는 물론 축과 살의 숫자까지도 획일화하는 치밀한 통일 규격화 정책을 밀고 나갔다.
 
진시황의 시스템 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도로망의 건설이다. 도로는 정치와 경제는 물론 군사와도 밀접하게 연계되는 중요한 네트워크여서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닦았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군대용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직도(直道)와 황제 전용 고속도로인 치도(馳道)를 닦았다. 도로 양 옆으로는 울창한 가로수를 심어 도로 유실을 막았다.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각종 수리 시설을 확충하고 정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국방 쪽으로는 만리장성을 쌓아 당시 막강했던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상의 모든 정책들은 통일 제국에 실제로 필요한 시스템의 정비였다. 진시황은 적어도 통일 제국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런 점에서 통일 과정과 통일 직후에 보여준 그의 리더십은 긍정적인 평가를 충분히 받을 만하다.

제국을 톱니바퀴처럼 운영
진시황은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길 즐겼다. 통일 제국에 대한 신속하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한 그의 시스템화 과정은 바로 이런 시뮬레이션의 결정판이었다. 그는 거대한 제국을 작동시킬 하드웨어 장착에 몰두했고, 그 결과 군현제를 필두로 한 각종 통일 규격화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3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한 자신의 제국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졌다. 정치, 행정, 경제, 군사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완벽한 시스템화를 이루었다고 판단한 진시황은 이 거대한 제국의 시스템을 직접 점검하는 순시에 나섰다. 그는 통일 제국을 위해 하루 업무량을 정해놓고 일했다. 그 업무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잠도 자지 않았다. 순시도 업무의 연장이었다. 기원전 221년 통일 후 그가 세상을 떠난 기원전 210년까지 불과 10년 사이 그는 천하를 다섯 번이나 순시했다. 한 번 순시에 준비 기간만 보통 1년 가까이 걸린다는 연구를 참고하면 그는 통일 후 거의 모든 시간을 자신의 제국을 순시하는 데 바쳤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업무도 순시 때 봐야만 했다. 과로는 필연이었다.
 
물리력으로 전국을 통일한 이후 진시황의 통일 규격화 정책에서 가장 문제가 많았고, 또 후대에 집중적으로 비난을 받았던 것이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대변되는 사상과 언론의 탄압이었다. 야심만만한 이사의 부추김도 있었지만, 분서갱유는 진시황이 통일 제국을 일사불란하게 작동시키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하지만 그는 이에 따른 반발과 그 여파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검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보다는 시스템을 믿은 황제
진시황의 리더십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그가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작동시키기 위한 완벽한 시스템 구축에 몰두했다는 점이다. 진시황이 구상한 시스템은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의 로봇을 연상케 한다. 이 점은 오늘날 리더들도 충분히 인정하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조직을 원활하게 작동시키기 위한 합리적이고 간결한 매뉴얼의 확보는 기본이다.
 
진시황은 누가 뭐래도 시스템화의 전문가였다. 하지만 동시에 시스템 맹신자이기도 했다. 진시황은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해놓으면 그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절로 작동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를 위해서는 다소 강압적인 정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시황의 이 같은 시스템 맹신은 인간에 대한 진시황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진시황은 불우하고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결손 가정에서 성장했고, 엄청난 위세의 여불위의 그늘 밑에서 늘 숨죽이며 살았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는 바람난 어머니를 지켜봐야만 했고, 어머니와 그 정부의 반란을 비롯해 형제의 반란을 겪었다. 그의 주위에는 모두가 이런 자들이었다. 천하의 대세도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살벌한 무한 경쟁이었다. 그 결과 진시황은 인간을 믿기보다는 시스템을 믿게 되었다. 통일 제국의 모든 시스템을 스스로 창안하거나 다듬었으며 또 직접 자기 손으로 작동시켜야 직성이 풀렸다. 이는 다시 말해 시스템 오작동에 따른 모든 책임도 그 자신이 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는 그 책임을 기꺼이 짊어졌다. 또 그 책임의 무게만큼 자신을 신격화하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 인간을 믿지 못하는 그의 두 어깨 위로 300만 제곱킬로미터의 거대한 통일 제국이 실리면서 그는 자신이 세상을 지고도 남는 위대한 ‘인신(人神)’이라는 착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가 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패기 넘치고 창조적이었던 그의 리더십이 통일을 기점으로 중대한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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