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속에서 놀이의 즐거움을 찾아라

52호 (2010년 3월 Issue 1)

네덜란드의 위대한 문화사가로 호이징하(J. Hui -zinga, 1872∼1945)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이 낯선 사람조차 그의 책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가진 책이다. 호이징하는 인간의 본질을 ‘놀이’에서 찾았던 사람이다. 인간의 본질을 ‘사유’나 ‘윤리’와 같은 무엇인가 묵직한 것으로 규정했던 전통과는 무척 이질적인 생각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노동’과 ‘놀이’를 구분하는 그의 논의를 경청한다면, 우리는 무엇인가로부터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으면서 그가 규정한 인간의 본질이 얼마나 깊은 가르침을 주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것이고,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건물 공사장에서 모래를 나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모래를 나르는 목적은 물론 임금을 받기 위해서다. 당연히 그들에게 모래 나르기는 일종의 부채이자 의무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모래 나르기는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즐거움은 언제 찾아올 수 있을까? 그것은 주어진 장소에 있던 모래를 정해진 장소로 모조리 옮기고 임금을 받는 그 순간이다. 고단한 5시간 정도의 모래 나르기는 이처럼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희생되었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다. 모래 나르기가 수단이었다면, 임금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호이징하가 주목했던 것은 이런 노동 속에서는 ‘즐거움’이란 드물 뿐만 아니라 희소하기까지 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놀이’는 어떤가? 아파트 놀이터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보자. 그들은 뙤약볕에서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모래를 갖고 이것저것 만들고 또 부수면서 환하고 경쾌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만지는 모래의 촉감 속에서, 그리고 조그만 성곽을 만드는 기쁨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만지고 있는 모래 만지기는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었던 셈이다. 모래로 만든 성곽이 완성되어야 어머니가 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들의 즐거운 모래 만지기는 ‘놀이’에서 일순간에 ‘노동’으로 변질됐을 것이다.
 
호이징하는 너무나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일 때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한 현재를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고단함만 가득한 현재를 견뎌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가 두 가지 의미로, 혹은 두 가지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놀이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그 자체로 향유되고 긍정되는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처럼 미래를 위해 소비되어야 하고 견뎌야 하는 현재이다. 우리에게는 첫 번째 현재, 즉 긍정적인 현재가 필요하다. 오직 이런 현재로 충만한 삶만 행복한 삶일 수 있다. 이제 놀이에 대한 호이징하의 소중한 조언을 들어보자.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하여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먼저 호이징하는 놀이가 노동이 아니라 놀이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 즉 자발적 행위가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다. 그렇다. 놀이는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순간 결코 놀이일 수가 없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놀이의 억지 흉내’이자, 그 자체로 노동일 수밖에 없다. 어느 회사 사장이 최근에 등산에서 즐거움을 얻은 경험을 했다. 그것은 정상에 이르는 한걸음 한걸음이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라는 것을 느꼈던 소중한 경험이다. 일상의 노동에 지친 삶에서 그는 마침내 놀이의 즐거움을 되찾은 데 성공했다. 좋은 것, 행복한 것을 나누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는 등산에서 자신이 느꼈던 즐거움을 부하 직원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한 달에 한 번 산행을 가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과연 이 회사 사장의 의도대로 부하 직원들도 등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될까? 아마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 정상을 향한 한걸음 한걸음은 ‘억지로 흉내를 내는’ 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사장에게 주기 위해 그들은 등산이 좋다고 떠벌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등산은 사장과 가까이 하여 승진에 도움을 주는 좋은 수단일 뿐이다. 좋은 의도였음에도 사장의 시도가 좌절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장은 놀이를 통한 즐거움이 오직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행위, 즉 자유가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망각했다. 그래서 호이징하는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호이징하의 놀이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창조성의 비밀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노동의 상황보다는 놀이를 통해 인간은 놀라운 집중력과 새로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즐겁게 하는 일에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붓는 법이다. 보통 사람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했던 일이 즐거웠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결코 겸손한 말이 아니다. 정말로 그들은 자신의 일을 놀이로 영위했다. 흔히 적성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나의 적성은 무엇인가?” “내 아이의 적성은 무엇이지?” 이는 어떤 일을 했을 때 다른 일을 했을 때보다 탁월한 업적을 낼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그렇지만 적성은 어떤 개인에게 숨겨진 잠재성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놀이의 상태에 근접하게 되느냐 여부와 관련돼 있다.
 
자신의 적성이나 혹은 아이의 적성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일체의 의무나 명령을 부가하지 않은 채, 내 자신이나 아이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워하는지, 혹은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지 관찰하면 된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외부로부터의 명령이나 의무가 이미 각인되었다면, 사람들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결코 놀이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 호이징하의 지적이다. 불행한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을 버리고, 주위의 평판이나 경제적 이득 때문에 노동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그들은 스스로 비범해질 수 있는 길을 버리고 평범한 길로 나아가고 있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한 가지 차선책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신의 일에서 놀이가 가진 즐거움과 창조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명심하자. 아이 때 경험했던 놀이의 즐거움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가 영위해야만 하는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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