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메이저급 생명보험회사에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한 프레젠테이션 자리. 굴지의 컨설팅회사 임원 5명이 나란히 프레젠테이션(PT)을 했다. 4명은 남성이었고, 1명은 여성이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피 튀기게 경쟁했다. PT가 끝난 뒤 고객사 임원이 여성에게 물었다.
“이런 프로젝트 해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순간, 분위기가 쏴해졌다. 앞서 발표한 컨설팅사 남성 4명은 한결같이 ‘다 할 수 있다’, ‘다 해봤다’는 말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여성은 “해본 적은 없어도, 비슷한 유형의 프로젝트는 해본 적은 있다. 회사 내 역량을 모두 동원해서 해보고 싶다”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결국 프로젝트는 여성이 따냈다. 이는 휴잇어소시엇츠 박경미 대표의 얘기다. 컨설팅 현장에서도 여성 임원을 두루두루 만나본 박 대표는 “나를 비롯한 최근 여성 리더들의 유형은 외유내강(外柔內剛)으로 분류된다”며 “여성 리더십의 원천은 ‘솔직함’이었다”고 강조했다.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도 자신을 과대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이려고 합니다. 단 실력은 갖춰져야 한다는 전제하에서요. 사람 마음은 다들 똑같아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태도를 고수하면 싫증을 내지요.”
정글과 다름없는 컨설팅업계에서 여성 최고경영자(CEO)는 드물다. 하지만 박 대표는 2000년 HR 컨설팅을 시작한 지 단 4년 만에 한국 지사의 대표가 됐다. 또 2008년부터는 각국 2만 3000여 명의 휴잇 직원 중 100여 명에 불과한 ‘글로벌 프린서플(Global Principal)’의 자리에 올랐다. 박 대표는 휴잇의 상위 0.5%대에 들어가는 인재가 된 셈이다. 박 대표는 동아비즈니스리뷰(DBR)와 만나 성공 비결 및 여성 리더십 고양 방안 등을 말했다.
HR컨설팅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대표로 승진한 걸 보면 직원일 때 상사들에게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꽤나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비결이 뭡니까.
“항상 기대보다 조금 더 나아갔습니다. 이른바 ‘엑스트라 마일즈(Extra Miles)’를 항상 염두에 뒀습니다. 맡은 것만 하지 않고 맡지 않은 것도 했던 것 같습니다. 걸출한 인재들이 많은 컨설팅 업계에서는 조금 더 일을 하지 않고는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대표가 되고 보니 Extra Miles를 염두에 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하게 구분이 되더군요. Extra Miles를 가려는 사람은 ‘열정(passion)이 있다’고 읽혀지게 되지요. 맡은 것을 잘하는 것은 단순한 실력에 그치지만, Extra Miles는 실력에 플러스 알파를 해주는 요인이지요.
직원들이 스스로 요청해서 얻는 기회도 있겠지만 직원들이 알지 못하는 기회도 널려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제가 상사가 된 뒤에도 같은 에너지를 쏟을 바에는 이왕이면 열정 있는 직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CEO로서 저의 임무는 Extra Miles를 지닌 인재를 어떻게 발탁하고 이들에게 어떻게 기회를 줄 것인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기회를 얻으려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차이를 만들어내고, 차이는 기회를 만듭니다.”
열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적합한 직장(right place)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휴잇이 세 번째 직장입니다. 휴잇에 와서 보니까 일하는 방식과 여건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일단 동료들이 굉장히 욕심이 많았습니다. 다들 실력 있는 공부벌레들이었지요. ‘후진국에 있는 부자는 자신의 정원이 동네 공원보다 좋다. 선진국에 있는 부자는 자신의 정원보다 동네 공원이 훨씬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네 공원이 바로 근무 환경입니다. 저 혼자 굉장히 똑똑했는데, 동료들에게 배울 게 없다고 한다면 힘들었겠지요. 반대로 제 동료들은 굉장히 훌륭했고, 배울 게 많아서 좋았습니다.”
전공이나 직전 직장에서의 업무가 HR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좌절한 적은 없었습니까.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해 나 혼자 뒤처지는 것 같고, 그래서 자신감이 떨어질 때가 더러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대학 은사님께 배운 원을 이용한 ‘파이알제곱(πr2) 이론’을 되새겨봤습니다. 원의 면적은 πr2(r은 원의 반지름)입니다. 이게 자신이 아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원의 둘레인(2πr)이라고 보면 됩니다. 면적만큼 내가 아는 것이고, 둘레만큼 내가 모르는 것입니다. 원의 면적이 넓어질수록 둘레도 길어집니다. 모르는 게 많을수록 많이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회사 내 경험이 많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이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했습니다. 또 고객사에 계시는 분들도 컨설턴트 못지않게 유능했습니다. ‘까다로운 클라이언트(고객사)가 좋은 컨설턴트를 키워낸다’는 말들이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