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부상으로 실업팀 입단 1년 만에 농구를 접은 선수가 있었다. 이후 구단 주무로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다. 선수 관리, 숙소 및 식당 예약, 감독과 코치 수발, 홍보까지 안 해본 업무가 없다. 10년 프런트 생활 끝에 지도자로 변신했지만 주위의 평가는 차가웠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스타 선수보다 화려한 농구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원주 동부 전창진 감독의 이야기다.
지도자로서 전창진 감독의 성공 시대를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무 출신이 감독을 해?”라는 식의 비아냥만 난무했다. 그가 처음 감독 지휘봉을 잡은 2002∼2003 시즌에 보란 듯 우승컵을 거머쥐었을 때도 “김주성 같은 특 A급 선수를 두고 누구는 우승 못하냐”는 식의 폄훼가 이어졌다. 당시 우승은 정규 리그 3위 팀이 시즌 챔피언에 등극한 유일무이한 사례였지만, 세간의 평가는 인색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6년 동안 2번의 우승컵과 1번의 준우승컵을 더 차지하며 실력을 입증했다. 이제는 아무도 그에게 ‘선수 덕분에 잘나가는 감독’이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전 감독은 오랜 프런트 생활을 통해 선수는 물론 미디어, 코치, 트레이너, 구단 직원, 찬모와 운전기사에 이르기까지 농구단 안팎으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식사와 술 외에도 전화, 문자, 채팅, 목욕탕 대화 등 선수들과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이든 사용한다. 찬모에게 화장품 세트를 선물하고, 구단 운전기사를 깍듯이 ‘형님’으로 모시며, 한 줄짜리 기사를 위해 밤늦게 언론사에 간식을들고 찾아가는 그의 행동 자체가 한 권의 인맥 관리 교본이다. ‘좋은 지도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라는 그의 지도자론 또한 여기에서 탄생했다.
삼성 프런트 시절 ‘세계적 주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세심한 선수 관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프런트 시절 얘기부터 해주시죠
지금은 구단 직원들의 업무가 모두 나눠졌지만 제가 프런트를 하던 시절에는 업무 분담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선수 관리부터 홍보까지 무조건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밤에는 어린 선수들의 잠자리를 챙겨주고, 고참 선수 방에는 술 마시러 나가지 말라고 술과 안주 접시를 넣어줬어요. 술도 선수들의 특성에 따라 소주와 맥주를 구분해서 줬습니다.
저는 체질적으로 술을 못하지만, 선수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자주 가지며 고민 상담을 해줬습니다. 심지어 여자 문제로 고민하는 선수 때문에 문서 위조 비슷한 일까지 해봤습니다. 운동 선수들이 단순해 한 번 여자에 빠지면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오빠, 운동만 열심히 해야 돼”라는 여자친구도 있고 “오빠, 놀러 가자. 왜 오빠는 전화도 안 해?”라고 하는 여자친구도 있죠. 후자는 꼭 사고를 쳐 남자친구의 선수 생명을 위태롭게 합니다. 이런 일을 방지하려면 시시각각 선수들의 고민을 파악하고 어떤 일이 있는지 체크해야 합니다.
벌써 감독 부임 후 8번째 시즌입니다. 지금의 전창진 감독을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감독 부임 후 처음 2년 동안 배운 것이 가장 많았습니다. 제가 감독 첫해 정규 리그 3위를 하고,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우승까지 했습니다. 당시 김주성, 신기성, 양경민이라는 세 스타 선수가 있었고, 현 KCC 허재 감독이 식스맨으로 있었습니다. 이 4명에게 시선이 집중되었고, 저도 이 선수들을 가장 믿었습니다.
시즌 중에 제가 주전들을 너무 혹사시킨다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제가 보기엔 주전 선수와 나머지 선수들의 기량 차이가 너무 커서 나머지 선수들을 기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감독으로서의 제 경험 부족이었죠. 실력 차이가 많이 난다고만 생각하고 후보 선수들의 잠재력을 끄집어낼 생각조차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정규 시즌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도 않던 윤제한, 지형근, 신종석 등 후보 선수들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너무 잘해주는 겁니다. 결국 식스맨들의 활약 덕에 첫해 우승을 차지했어요. 그러고 보니 저의 선수 활용 전략이 얼마나 단조로웠는지, 선수들의 잠재력이 무엇인지 좀 알겠더군요. 감사하게도 감독 첫 해에 그런 일이 일어나줘 감독으로 빨리 자리매김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