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세계에서 먹이사슬의 맨 위에 있는 동물은 사자와 호랑이다. 그러나 중세의 왕과 영주, 기사들은 자신들의 문장이나 방패에 새겨 넣는 동물로 호랑이보다 사자를 더 선호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호랑이는 지나치게 사납고 표독스러웠다. 자고로 지도자는 힘과 함께 여유와 관용을 보여야 하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는 사자가 제격이었다. 수사자는 사냥이나 힘든 일을 아랫것들에게 맡기고 초원의 왕으로 군림한다. 쓸데없는 싸움도 하지 않는다. 유일한 전투, 즉 무리의 주도권을 놓고 수사자 간의 결투를 행할 때도 생사를 건 혈투를 벌이지 않고 한두 번의 펀치 교환으로 승자를 결정한다.
드러난 현상만 보면 사유와 분석 마비
그러나 야간 관측 장비 발달로 학자들이 사자의 밤 생활을 취재할 수 있게 되자 수사자의 이미지가 허상임이 드러났다. 수사자가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배고플 때가 아니면 웬만한 동물을 못 본 척하는 관용적 성품을 지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맹수가 밤에 사냥한다는 것은 사실 사냥꾼이라면 다 아는 평범한 진리다. 첨단 카메라 기술을 동원해 자세히 분석해 보니 기사도적 결투를 하는 게 아니라 필살기를 교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왜 그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낮에 관찰한 사자의 모습이 진면목이라고 믿었을까. 사자를 관찰하던 사람들이 사자의 생태에 대해 근본 원인을 찾기보다 ‘겉으로 드러난 본성’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은 아닐까. 기린, 물소, 영양 등은 야생에서 누워 자지 않는다. 이는 본능적으로 편안한 잠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주변 육식동물의 위협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마찬가지로 초원에 엎드린 사자가 꾸벅꾸벅 조는 것은 사자가 특별히 여유를 즐기는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다. 감히 잠자는 사자를 건드릴 동물이 주변에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주목하면 근본 원인을 찾지 못한다. 한마디로 사유와 분석이 마비되는 것이다. 같은 실수가 인류 역사에서도 반복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치명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사에서 제해권과 제공권의 중요성을 각인시켜 준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최종 승부는 지상전에서 결정됐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과 일본군 최초로 마주친 지상전은 과달카날 전투다.(실제로는 필리핀 전투에서 미군과 일본군이 마주치긴 했지만 이때 일본군은 미군 주력부대와 조우하지는 않았다)
미군과 일본군 간의 과달카날 전투
과달카날은 호주 동북쪽에 위치한 솔로몬 제도의 주도다. 일본군이 이 섬을 장악하면서 호주가 일본군의 공습권에 들어갔다. 1942년 8월 1만1000명의 미 해병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해 비행장을 건설 중이던 소수의 일본군을 몰아냈다. 미군으로서는 꽤나 모험적인 작전이었다. 섬의 면적은 6500㎢. 태평양에서는 작은 섬이지만 제주도의 3.5배나 된다. 1개 사단으로서는 섬의 완전한 장악이 불가능했다. 일본군과의 결전을 각오해야 했는데, 바다와 하늘에서 일본군이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군 함대도 일본군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했다. 간신히 병력은 상륙시켰지만 겁에 질린 미군 함대는 보급품을 내려놓다 말고 내뺐다. 탄약의 절반도 양륙하지 못했다. 졸지에 미 해병대는 섬에 버림받은 꼴이 됐다. 과달카날 전투는 20세기를 통틀어 미군이 탄약 결핍을 걱정하면서 통조림을 나눠먹으며 싸운 거의 유일한 전투였을 것이다.
일본군은 최초의 지상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확실한 카드를 쥐고 있었다. 제해권 상실로 보급로가 불안한 미군은 소모전을 감당할 수 없었다. 실제로 미군 지휘부는 소모전을 예상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 밖에도 여러 조건이 일본군에게 유리했다. 미 해병대는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반면에 일본 육군은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 남태평양까지 지구의 한쪽 단면을 종단하며 싸워왔다. 미군은 섬의 지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정글로 도주한 일본군은 미군 진지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사령부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 자신감이 전투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갔다. 미군 규모에 대해서도 분명 정확히 파악했겠지만 일본군 사령부는 과달카날 탈환부대로 겨우 1개 연대(3400명)만을 차출했다. 이 연대의 지휘관인 이치키 기요나오 대령은 중국에서부터 싸워온 역전의 맹장으로 관동군 최고의 대령이라는 칭송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병력면에서 너무 열세였다. 더욱이 이치키 대령은 본대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선발대 900명만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미군 따위는 일본군의 함성만 들어도 무너질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일본군의 자만과 무모한 공격
이치키 연대는 남태평양의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2시 박격포와 경기관총 사격으로 자신들이 공격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리고 난 뒤 미군 진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공격로는 정글에서 튀어나와 시야가 탁 트인 강 하구의 모래톱을 가로지르고 강물을 건너 미군의 철조망을 통과해 정글 속의 미군 방어선으로 돌입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그 유명한 함성에 “해병대 놈들아 거꾸러져라”라고 소리치며 앞으로 달렸다. 그러나 그 말을 알아들을 미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신 미군은 전방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이 어떤 훈련과정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완벽하게 손쉬운 표적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돌격이 처참한 학살극으로 끝났지만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래톱이 시체로 뒤덮여도 일본군은 후퇴하지 않았으며, 쓰러진 병사는 죽을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해변에만 800구의 시신이 널브러졌으며, 생존자들도 대부분 부상으로 정글 속에서 죽었다. 미군 전사자는 43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