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1일, 이른 새벽 울린 경계경보로 서울 시민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대피를 준비하라는데 무슨 연유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디로 대피해야 할지도 오리무중이었다. 폭우로 인한 침수, 압사 사고 등 많은 이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대규모 재난을 경험한 지 1년도 채 안 됐는데, 정부와 국민 모두 갑작스러운 재난에 여전히 취약하다는 현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더 큰 문제는 재난의 빈도와 강도가 유례없는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폭염과 혹한, 산불과 가뭄 등 기후변화에 따른 위협뿐만이 아니라 전쟁, 해킹 등의 인재도 언제나 우리 곁을 도사리고 있다.
미국 국가 안보 제일선에서 활약한 재난 대응 및 위기관리 분야의 전문가인 줄리엣 카이엠은 “위기 자체는 막을 수 없지만 그 피해와 손실을 최소화하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 노심부가 녹았고 방사능이 유출됐다. 그러나 진앙지에 더 가까웠던 오나가와 원자력발전소는 안전하게 가동 중단됐다. 이 원자력발전소에는 안전을 강조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었고 충분한 설비 투자가 이뤄진 덕분이다.
2000년 ‘Y2K 사건’에서도 배울 교훈이 있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순간 컴퓨터 시스템 전반이 중단되고 사회 전체가 멈출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세기말이 떠들썩했다. 당시 컴퓨터는 메모리를 아끼기 위해 1999년을 99년으로 줄이는 식으로 연도를 축약했는데 컴퓨터가 2000년을 어떻게 인식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은 3000억~6000억 달러를 지출해 컴퓨터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했고 정부도 이를 장려하기 위해 ‘2000년 정보 및 준비 공개법’을 통과시켰다.
만반의 준비 끝에 새천년이 도래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포와 대처가 과장됐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었다는 것은 대응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성공적인 예방 조치는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는 ‘준비의 역설’은 대형 스캔들에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언제나 위기 대응에 전념해야 준비의 역설을 방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