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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논어』란 무엇인가 下

巧言令色의 해석상 논란

김영민 | 287호 (2019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안면을 치장하는 (사람치고), 드물구나, 인한 사람이(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교언영색(巧言令色)은 역사적 의미에서 여러 가지 해석상의 논란이 있다. 먼저 누구를 대상으로 이야기한 것인지 견해가 엇갈린다. 또 이를 행위로 봐야 하는지, 상태로 봐야 하는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번 하편에서는 교언영색에 대한 해석에 집중한다. 또 공자가 중시한 인(仁)의 개념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인’과 ‘교언영색’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둘을 통해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까. 다양한 해석을 통해 『논어』의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보자.


해석상의 논란 1: 이 문장의 청중은 누구인가?

대개의 문장이 그렇듯이 청중이 누구냐에 따라 문장의 함의는 바뀔 수 있다. 교언영색에 대해 많은 주석을 단 이들 중 하나인 성리학자들은 대개 이 문장의 청중을 일반 사람들 혹은 사(士) 계층이라고 봤다. 이에 비해 오규 소라이는 이 문장의 청중을 통치계층이라고 명시적으로 한정한다. 오규 소라이에 따르면 통치계층은 모름지기 정치라는 큰 뜻을 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교언영색처럼 작은 일에 연연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이들을 비판한 것이 이 문장의 취지라는 것이 바로 오규 소라이의 주장이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 천자가 되고 제후가 되는 것은 말하자면 천하와 국가를 맡기는 것이다. 대부가 되고 관리가 되는 것은 역시 하늘의 직책을 함께하는 것이다. 배워서 덕을 이룬 것을 ‘군자’라고 하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와 가문을 이끄는 덕을 이룬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극히 엄하고,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삼는 마음이 지극히 중하며,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지극히 크다. 인에 뜻을 둔 사람이 어찌 말과 안색의 ‘작은 일(末)’에 급급해 하겠는가? 그것은 그 뜻하는 바가 몹시 크기 때문이다.”(蓋天命我爲天子爲諸侯, 是任天下國家者也. 爲大夫爲士, 亦共天職者也. 學而成德曰君子, 謂成安民長國家之德, 故君子畏天, 至嚴也. 仁以爲己任, 至重也. 其心在安國家, 至大也. 志於仁者, 豈遑及言色之末哉.) 1

『논어』의 문장들이 종종 그러하듯 이 문장 역시 청중이 누구인지, 혹은 어떤 상황에서 발화하고 있는지 확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은 같은 혹은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 『논어』의 다른 문장의 맥락을 고려해보는 일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얼굴빛을 꾸미고 과도하게 공손히 하는 것은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다. 나 역시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원망을 숨기고 (원망 상대인) 그런 사람과 친구 하는 것을 좌구명은 부끄럽게 여기고,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子曰, 巧言, 令色, 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2

이 인용문의 청중 역시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교언영색의 청중과 관련해 약간의 실마리를 준다. 여기서 교언영색을 싫어하는 혹은 부끄러워하는 주체는 공자 자신, 그리고 좌구명일뿐 천자나 제후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반면, 오규 소라이의 주석이 해석하는 바, 교언영색을 싫어하는 혹은 부끄러워하는 주체에는 천자나 제후가 포함된다. 그들 역시 통치의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상의 논란 2: 행위인가, 상태인가

교언영색이 고정된 상태를 의미하느냐, 아니면 일정한 지향 혹은 행동을 의미하느냐의 논란이 있다. 앞서 논했듯이 전자는 교언과 영색을 형용사+명사 구조를 지닌 것으로 보고, 후자는 동사+목적어 구조를 지닌 것으로 본다. 전자의 해석에 따르면 공자는 말을 잘하거나 교묘하게 하는 사람이나 용모가 남에게 호감을 주는 듯이 생긴 사람을 싫어한 셈이 되지만 후자의 해석에 따르면 공자는 결과로서 주어진 그러한 상태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그러고자 의도하는 사람을 싫어한 셈이 된다. 실로, 키 큰 사람을 싫어하는 것과 키가 커 보이고자 애쓰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마찬가지로 이 문장의 함의도 교언영색이 고정된 상태를 의미하느냐, 아니면 일정한 지향 혹은 행동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해석상의 논란 3: 앞 구절과의 관계

현행 『논어』 판본에 실린 문장들에 일정한 질서가 있다고 간주하는 이들은 이 문장과 선행하는 문장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즉, 다음의 A와 B 간에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A: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안면을 치장하는 (사람치고), 드물구나, 인한 사람이.”(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3

B: “그의 사람됨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는데, 윗사람에게 덤비기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 터이다. 윗사람에게 덤비기 좋아하지 않는데, 난리를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본 적이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근본이 확립되면, 도(道)가 생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은 인(仁)을 실천하는 일의 근본일 것이다.”(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4

아래 두 인용문이 A와 B 간의 관계에 대한 논란을 보여준다.

성문(성인의 문하)의 배움은 인을 구함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 해야 할 것으로써 말하자면 반드시 효제를 우선으로 여겨야 하며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써 논한다면 교언영색을 심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말씀을 기록한 자가 이 둘(효제와 교언영색)을 끌어내 첫 장 뒤에 두어 이처럼 순서를 잡은 것은 배우는 자로 하여금 인이 급한 일임을 알게 하고 마땅히 힘써야 할 일과 경계할 만한 일을 알게 하려 함이다.(聖門之學以求仁爲要. 語其所以爲之者, 必以孝弟爲先. 論其所以賊之者, 必以巧言令色爲甚. 記語者所以引二者於首章之次而其序如此, 欲學者知仁之急而識其所以當務與其所可戒也.)5

운봉 호씨가 말했다. 윗장의 ‘윗사람을 범하고 난을 일으키는 것’은 억센 악이고 이것은 부드러운 악이니, 성현께서 깊이 싫어하셨다.(雲峯胡氏曰, 上章好犯上作亂, 是剛惡此是柔惡, 聖賢深惡焉.)6

첫 번째 인용문의 경우는 A와 B의 관계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관계로 본다. 서로 대조되는 이 두 가지를 묶어주는 것은 두 가지 모두 인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항들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인용문의 경우는 선행 문장의 키워드가 효제가 아니라 범상작란(犯上作亂, 윗사람을 범하고 난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볼 경우 선행 문장은 ‘범상작란’ 같은 ‘억센 악’을 논하고 이번 문장은 ‘교언영색’ 같은 ‘부드러운 악’을 논하는 것이 된다. 서로 다른 이 두 문장은 하지 말아야 할 악을 논한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이상의 논의는 그 자체로 보아 흥미롭지만 모두 현행 『논어』 판본에 실린 문장들에 일정한 질서가 있다는 전제에 서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는 널리 받아들여진다고 할 수는 없기에 이상의 논의는 결정적인 해석의 단서를 제공한다기보다는 잠정적인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 그친다고 할 수 있다.


해석상의 논란 4: 교언영색에 대한 동기론적 해석과 결과론적 해석

먼저 『논어집주』에 나온 주희의 해석을 보자. “호기언, 선기색, 치식어외, 무이열인, 칙인욕사이본심지덕망의.(好其言, 善其色, 致飾於外, 務以悅人, 則人欲肆而本心之德亡矣.)” 즉 주희는 “말 잘하고 안색을 잘 꾸민다는 것은 외부적인 수식에 힘써 다른 사람 마음에 들게 하는 데 애쓰면 욕심이 뻗쳐 본심의 덕(德)을 잃게 된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교언영색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현실적인 손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초래할 ‘본심의 상실’에 있다. 성리학자들은 인간이 본성상 도덕적 존재라고 봤기 때문에 본심을 잃는다는 것은 곧 도덕적 존재가 되기를 포기한 것이며, 이는 곧 진정한 자아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 그들에게 도덕이란 결과로서 얻는 이익이나 손해에 의해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심에서 나오는 도덕적인 의도가 해당 행동을 도덕적으로 만들 뿐이다. 그런데 조명화는 이러한 주희의 ‘동기론적’ 해석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7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신뢰도가 무척 낮았기 때문에 신뢰도가 낮은 사회에서 손실과 위험을 막으려면 교언영색에 대한 경계가 절실하다는 경험적 지혜를 드러냈다고 본다. … 『사기·중니 제자열전』의 기록을 믿는다면 공자는 제자들조차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상대가 배신할 수 없도록 전략적인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일을 중시했을 것이다. 후대에 삼강오륜으로 정리되는 유가의 윤리규범은 결국 공자의 생각을 정리한 것인데 신뢰도가 낮은 사회에서 전략적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장치라고 본다. 교언영색을 경계하라는 말은 전략적 관계망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잠재적 위험인물로 간주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8

이와 같은 해석 속에서 교언영색에 대한 공자의 부정적 견해는 일종의 전략적 사고로 간주된다. 조명화는 동기론적이라기보다는 결과론적 고려에 의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신뢰도가 무척 낮았기 때문에’라는 언명은 이 해석이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기초한 해석임을 시사하지만 당대의 사회적 신뢰 정도를 측정한 연구도 없고, 특정할 방법이 묘연하다는 점에서, 과연 결과론적 해석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해석인지 확신할 수 없다. 방향은 다르지만 동기보다는 결과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김원중도 마찬가지다.9 “약삭빠를 정도로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그로 인해 복을 얻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기 십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명화는 교언영색을 대하는 사람이 맞게 되는 결과에 주목한다면, 김원중은 교언영색을 하는 이가 맞게 되는 결과에 주목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반면, 주희를 비롯한 성리학 계열 학자들은 압도적으로 교언영색이 초래하는 결과보다는 교언영색에 깃든 도덕적 마음을 문제 삼는다.

물었다. 언사를 닦고 살피는 것은 성(誠: 참됨)이 서게 되는 까닭이고 언사를 꾸미는 것은 위(僞: 거짓)가 늘어나는 까닭이니, 그 발원하는 곳이 매우 다릅니다. 공자께서 교언영색은 인이 드물다고 하셨으니, 교령(교묘하고 좋게 꾸밈)의 문제점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 근원을 찾아 살펴보면 이는 바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컨대,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말하여 말로써 다른 사람을 낚고 어깨를 으쓱이고 웃음을 머금어 희색으로 다른 사람을 따르는 것, 이런 것은 모두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問脩省言辭誠所以立也. 修飾言辭僞所以增也. 發源處甚不同. 夫子 所謂巧令鮮仁, 推原而察, 巧令之病所從來正是有所爲而然. 如未同而言以言話人脅肩諂笑以喜隨人之類. 皆有所爲也.) 10


해석상의 논란 5: 인과 교언영색의 관계

교언영색과 인이 공존하기 어렵다는 점은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안면을 치장하는 (사람치고), 드물구나, 인한 사람이.(子曰, 巧言令色, 鮮矣仁.)”라는 문장을 읽는 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논점은 남아 있다. 교언영색이 곧 인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언영색을 하다 보면 결국에는 인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의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있을 때만 인이지, 만약 교언영색으로 끊임없이 겉을 좇으면 마음이 없는 것이니 어찌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교언영색으로 남을 기쁘게 하려 하면 그 본심의 덕을 잃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남을 해치는 단계까지 간 연후라야 불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용모나 어조 등은 바로 배우는 이가 지켜 기르고 힘써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교언영색으로 남의 이목을 기쁘게 하는 데 뜻을 두면 마음이 밖으로 내달려 인이 드물어진다.(只是心在時便是仁. 若巧言令色一向逐外, 則心便不在. 安得謂之仁. 巧言令色求以說人, 則失其本心之德矣. 不待利己害人, 然後爲不仁也. 容貌辭氣之間正學者持養用力之地. 然有意於巧令以說人之觀聽, 則心馳於外而鮮仁矣.) 11

처음 두 인용문에 따르면 특정 마음 (혹은 마음의 덕)이 인이며, 그 마음은 교언영색을 (추구)하는 마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교언영색을 (추구)할 때 이미 인은 거기에 있을 수 없다. 반면, 마지막 두 인용문에 따르면 교언영색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은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는’ 것으로서, 그것이 곧 불인이라기보다는 다만 인이 드물어지는 경향이다. 전자가 교언영색과 인을 원칙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데 비해 후자는 교언영색이 인을 배양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말하는 데 그치고 있다. 전자는 ‘드물다’를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로 보는 셈이고, 후자는 ‘드물다’를 축자적으로(literally) 보는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산 정약용은 후자의 견해를 지지한다.

사실, 교언영색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를 상상해볼 수 있다. 말과 용모를 꾸미는 데 치중하지 말고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내용에 치중하라는 차원에서 교언영색을 비판할 수도 있고, 표리부동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교언영색을 비판할 수도 있고, 무엇인가 꾸미는 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에 교언영색을 비판할 수도 있고, 용모와 말같이 외부적으로 드러난 면만 꾸미지 말고 내면도 꾸미라는 차원에서 교언영색을 비판할 수도 있고, 사람을 분별하는 데 있어 외양에 현혹되지 말라는 차원에서 교언영색을 비판할 수도 있고, 교언영색보다 더 거대한 사안에 집중하라는 차원에서 교언영색을 비판할 수도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상대적으로 더 설득력 있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교언영색과 대비를 이루는 인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논어』에 나오는 인의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자세히 토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인과 교언영색이 『논어』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어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겠다.


역사적 해석을 향해 1: 인(仁) 개념은 공자의 창조물이 아니다

공자가 인(仁) 개념을 중시한 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불이(不二)에 ‘공자귀인(孔子貴仁, 공자는 인을 귀하게 여겼다)’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러한 사실은 중국 고대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공자가 인 개념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논어』 이전 문헌에도 인이라는 개념은 종종 등장한다. 12

일단 ‘인’은 지배층의 사람됨을 칭송하던 말『논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13 『논어』보다 앞선 시대의 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는 『시경』과 『서경』에 나오는 관련 사례는 다음과 같다.

『시(詩)·정풍(鄭風)』 ‘숙우전(叔於田)’:
“진정 훌륭하고 인하다(洵美且仁)
『시(詩)·제풍(齊風)』 ‘노령(盧令)’:
“그 사람은 훌륭하고 인하다(其人美且仁)”
『서(書)·상서(商書)』 ‘중훼지고(仲虺之誥)’:
“매우 관대하고 매우 인하다(克寬克仁)”
『서(書)·상서(商書)』 ‘태갑하(太甲下)’:
“백성은 정해놓은 군주에게 일정하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자한 군주를 따른다(民罔常懷 懷於有仁)”
『서(書)·주서(周書)』 ‘태서중(泰誓中)’:
“비록 주나라 친척이 있다고 해도 인한 신하만은 못하다(雖有周親 不如仁人)”
『서(書)·주서(周書)』 ‘무성(武成)’:
“제가 인한 신하를 몇 사람 얻었으니(予小子旣獲仁人)”
『서(書)·주서(周書)』 ‘금등(金縢)’: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인하고 능력 있다(予仁若考能)”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어(國語)』 속에서 ‘인(仁)’은 다른 덕목들과 병칭되기에 이른다. 즉 인간 성정이 구현하는 일련의 특질들이 독립적인 덕목으로 인지되는 과정에 인도 포함됐던 것이다.

주어상(周語上) : “충, 신, 인, 의(忠, 信, 仁, 義)”
주어중(周語中) : “의, 상, 인(義, 祥, 仁)”, “용, 예, 인(勇, 禮, 仁)”
주어하(周語下) : “경, 충, 신, 인, 의, 지, 용, 교, 효, 혜, 양(敬, 忠, 信, 仁, 義, 智, 勇, 教, 孝, 惠, 讓)”
진어칠(晉語七), 오어(吳語) : “지, 인, 용(智, 仁, 勇)”
초어하(楚語下) : “신, 인, 지, 용, 충, 숙(信, 仁, 智, 勇, 衷, 淑)”



진(晉)나라 대부(大夫)인 지과(智果)가 진(晉)나라 벼슬(卿)이자, 지선자(知宣子)의 아들인 요(瑤)라는 인물을 평가할 때 하는 말을 보면 『국어』의 세계에서 인은 다른 덕목들과 구별되는 동시에 잠재적 경쟁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요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은 다섯 가지이고 그가 다른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귀밑머리가 길고 대단한 것은 뛰어난 점이고,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기운차게 하는 것은 뛰어난 점이고, 기예가 모두 넉넉한 것이 뛰어난 점이고, 문장을 교묘히 하고 꾀바른 것이 뛰어난 점이고, 강단 있고 과감한 것이 뛰어난 점입니다. 이와 같아도 매우 불인하면 그 다섯 가지 뛰어난 점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능멸하고 불인(不仁)을 행할 것이니 그 누가 그를 대접해줄 수 있겠습니까?”(瑤之賢於人者五, 其不逮者一也. 美鬢長大則賢, 射禦足力則賢, 伎藝畢給則賢, 巧文辯惠則賢, 強毅果敢則賢. 如是而甚不仁. 以其五賢陵人, 而以不仁行之, 其誰能待之?) 14

이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과의 생각 속에서 인이란 외모, 무예, 기술, 문장, 꾀, 강단 등의 특성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요소인 것이다. 그 밖에 좌전에서 인용하는 이야기들에 나오는 ‘인’은 복수의 국가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주로 쓰이곤 한다. 15 공전 이전, 그리고 동시대 문헌에서 나타난 이러한 용례들을 감안하면 공자가 인 개념을 새로이 창출한 것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다고 해서 공자가 기존에 존재하는 인 개념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음 인용문은 고대 중국에서 인 개념의 해석이 안정된 상태에 있지 않았고 논자마다 크게 다른 인 해석을 제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희(驪姬)가 말했다. 저 역시 두렵습니다. 제가 외부 사람의 말을 듣자 하니, 위인(爲仁, 인을 실천하는 일)과 위국(爲國,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다르다고 합니다. 위인(爲仁)하는 이는 어버이를 아끼는 일(愛親)을 인(仁)이라고 하고, 위국(爲國)하는 이는 나라를 이롭게 하는 일(利國)을 인(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백성의 수장이 된 이는 친(親)이 없고, 뭇 사람들을 친(親)으로 여깁니다. 만약 뭇 사람들에게 이롭고 백성들이 다투지 않는다면, 어찌 군주(시해)를 꺼리리까. 뭇 사람들 때문에 감히 자신의 어버이를 아끼지 않는다면, 뭇 사람들이 한층 더 그를 대단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는 장차 나쁘게 시작하였으되 좋게 마무리하고, 뒷일로서 (앞의 일의 나쁨을) 덮을 사람입니다.”(驪姬曰 妾亦懼矣. 吾聞之外人之言, 曰爲仁與爲國不同. 爲仁者, 愛親之謂仁. 爲國者, 利國之謂仁. 故長民者無親, 衆以爲親. 苟衆利而百姓和, 豈能憚君. 以衆故不敢愛親, 衆況厚之, 彼將惡始而美終, 以晩蓋者也.) 16

이와 같은 언명은 1) 인(仁)을 국가 운영의 문제와 구별되는 별도의 일로 생각하는 견해, 2) 인이 국가 운영에 직결된다고 보는 견해, 3) 부모를 아끼는 마음이 아니라 국가 운영이야말로 인이라고 보는 견해 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논어』에 나타난 인의 이해는 1)이나 3)과는 거리가 멀고, 2)에 가깝다. 즉 『논어』에 나타난 공자 및 그의 제자들의 인에 대한 생각은 당시 중국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기보다는 경쟁 관계에 있는 여러 인에 대한 이해 중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해석을 향해 2: 교언영색은 공자가 처음 한 말이 아니다

최석기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말이 『논어』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17 그러나 ‘교언영색’이란 말은 『서경』 ‘고요모(皋陶謨)’에 이미 나온다. “어찌해서 교언영색하는 공임을 두려워하리오.(何畏乎巧言令色孔壬.)” 『서경』이 당시 식자층에게 널리 알려진 텍스트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공자는 교언영색이라는 말을 만들어서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즉, 공자는 기존 표현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교언영색이 ‘교언’과 ‘영색’이라는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음에 착안해 교언으로 조사 대상을 국한해보면 『시경』에 다음과 같은 용례가 또 있음을 알 수 있다. 18

‘소아·우무정(雨無正)’: “애닳구나 말도 못하니,말로 꺼낼 수도 없어서 몸만 초췌해진다. 말 잘하는 사람은 좋겠네. 유수 같은 발림말로 제 몸 편하게 만드니까(哀哉不能言 匪舌是出 維躬是瘁哿矣 能言巧言如流 俾躬處休)”
‘소아·교언(巧言)’: “훌륭하고 좋은 말은 입에서 나오지만, 관악기 떨림판 같은 발림말은 두꺼운 낯에서 나오는 법(蛇蛇碩言 出自口矣 巧言如簧 顔之厚矣)”

그리고 청나라 주석가 간조량(簡朝亮)은 『시경·소아·정월(詩經·小雅·正月)』의 “호언자구, 유언자구. 우심유유, 시이유모.(好言自口,莠言自口. 憂心愈愈,是以有侮.)”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이른바 교언(巧言)이란 여기서 나오는 호언(好言)과 같다고 봤다. 그리고 교언이 특정한 안색과 함께한다는 생각은 『시경·소아·교언(詩經·小雅·巧言)』에서 “사사석언, 출자구의, 교언여황, 안지후의.(蛇蛇碩言, 出自口矣. 巧言如簧, 顏之厚矣.)”에 이미 드러나 있다고 봤다. 19

이러한 전거들은 공자가 교언영색에 유관한 논의를 창시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 혹은 『논어』가 교언영색이라는 어휘의 역사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다만 기존의 표현을 인용하거나 반복하는 데 그쳤다는 말은 아니다. 한(漢)나라 때 편집된 것으로 판단되는 『대대례(大戴禮)』 ‘문왕관인편(文王官人篇)’에 나오는 “화여무, 교언영색, 주공, 일야, 개이무위유자야.(花如誣,巧言令色,足恭,一也,皆以無爲有者也.)”와 같은 표현은 정확하게 『논어』에 나온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얼굴빛을 꾸미고, 과도하게 공손히 하는 것(巧言, 令色, 足恭)”이라는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공자의 언명을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한대에 성립한 『모전(毛傳)』에서도 『시경』의 ‘대아·소민(大雅·召旻)’에 나오는 “유석지부, 불여시(維昔之富, 不如時)” 구절을 주석하면서 “왕자부인현, 금야부참영(往者富仁賢, 今也富讒佞)”이라고 해 말을 교묘하게 하는 일과 인을 대비시킨 것을 보면 교언영색과 인을 일찍이 대비시킨 공자의 발언이 이후 사람들의 생각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20


비교적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결론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안면을 치장하는 (사람치고), 드물구나, 인한 사람이.(巧言令色, 鮮矣仁.)”라는 문장에 대해서 가장 확실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

첫째, 『논어』의 본문 및 당대의 자료는 이 문장의 의미를 확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언’과 ‘영색’이 모두 동사+목적어 구조를 가진 것으로 해석돼야 한다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언영색’이라는 말을 통해서 공자는 결과로서 나타난 특정 외양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자 하는 지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둘째, 이 문장의 핵심을 이루는 두 부분인 교언영색(巧言令色)과 인(仁)은 공자가 처음 발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즉, 공자에게 창의적인 부분이 있다면 새로운 어휘를 창안해냈다기보다는 따로 존재하던 기존 어휘 두 개를 연결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결 행위로 생겨난 ‘교언영색’과 ‘인’ 간의 관계는 ‘교언영색’과 ‘인’이라는 표현이 가진 의미의 자장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며 후대로 전승됐다. 그 영향의 구체적 함의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kimyoungmin@snu.ac.kr
필자는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 교수를 지냈다. 영문 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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