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 분초가 아까울 정도로 바쁠 때가 있는가 하면 흘러가는 시간을 하염없이 내버려 두고 싶을 때도 있다. 내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정복하고 싶은 다른 한편으로 시간이란 굴레에서 영원히 해방되고 싶은 게 인간의 모순된 심리다. 시간은 우리의 경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엇이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시간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매달린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학자들의 사유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간의 깊이를 느껴보길 바란다.
시간을 쪼갤 수 있을까?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작품 ‘해돋이, 인상’(Impression, soleil levant, 1972)에서 유래한 ‘인상주의’라는 말은 당시 그 작품을 본 기자가 다소 부정적인 의도로 붙인 표현이다. 정식 학교(아카데미)에서 제대로 배운 화가라면 응당 그래야 할 현실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 능력 없는 화가가 주관적인 느낌에서 얻은 인상을 멋대로 그려놨다는 폄하가 담겨 있다. 물론 이는 모네 그림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모네가 해돋이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거기서 얻은 자신의 주관적인 인상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해가 떠오르는 한‘순간’이다. 그는 이토록 강렬한 한순간을 화폭에 담고 싶었던 것이지 거기서 얻어진 모호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모네는 현실을 제대로 그리고 싶다면 바로 지금 눈에 보이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의 반사에 불과하며 빛은 시시각각 변하므로 모든 것의 모습도 변한다. 그래서 모네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진짜 현실의 모습, 즉 정지된 한순간이었다. 루앙 성당의 맞은편 카페에 앉아서 시시각각 변하는 건물의 순간들을 일련의 시리즈로 그려낸 것이나 말년에 자신이 직접 만든 정원의 연못을 한없이 들여다보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연꽃의 모습을 일련의 시리즈로 그린 것도 순간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네는 시간의 흐름에서 한순간을 도려내 정지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네의 이러한 시도는 역설(paradox)에 빠지고 만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데생을 생략하고 물감의 배합마저 포기하며 미리 짜놓은 물감을 순식간에 캔버스에 찍어 발랐지만 그가 캔버스에 붓을 대는 순간 이미 수많은 시간이 경과하고 만다. 현재의 순간은 그것을 도려내는 순간 바로 과거가 돼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는 대신 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셔터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빛의 노출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에 기록된 이미지는 정지된 순간이 아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경과된 시간이다. 순간을 정지된 시간으로 이해할 경우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를 최초로 간파한 사상가는 고대 엘레아학파의 제논(Zeno pf Elea)이다. 그의 주장은 이른바 ‘제논의 역설’로 알려져 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결코 과녁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역설의 내용이다.
활을 떠난 화살이 과녁(T=Target)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활과 과녁의 중간 지점(M=Middle)을 통과해야 한다. 그 중간 지점(M1, 1/2)을 통과했다면 이제 그 중간 지점과 과녁(T)의 중간 지점인 M2(1/4)를 통해야 한다. 또 M2와 과녁(T)의 중간 지점인 M3(1/8)의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 활을 떠난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한한 중간지점, 즉 M1, M2, M3, M4…의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은 무한하므로 무한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활이 과녁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제논의 역설이다. 물론 제논의 설명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활을 떠난 화살은 충분한 힘만 주어진다면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과녁에 도달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제논의 역설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제논의 역설이 운동과 시간 자체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봤다. 시간의 흐름은 애초에 하나의 공간좌표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각각의 분절된 단위로 나누고 그 단위의 이행을 시간의 흐름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시간이란 원래부터 하나의 좌표로 나타낼 수 없는 흐름, 즉 ‘순수 지속’(durée pure)이다. 시간의 흐름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지속성, 즉 흐름 자체다. 제논의 역설은 우리가 시간을 마치 공간처럼 분할하고 좌표로 나타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어쩌면 시간을 초, 분, 시, 하루, 일주일, 일 년으로 나누는 데 익숙한 우리는 제논의 역설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박영욱imago1031@hanmail.net
- (현)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저서
-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