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4. 시간철학

매순간의 현재는 무한한 가능성의 연속
노동을 시간단위로 추상화할 순 없어

253호 (2018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분초가 아까울 정도로 바쁠 때가 있는가 하면 흘러가는 시간을 하염없이 내버려 두고 싶을 때도 있다. 내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정복하고 싶은 다른 한편으로 시간이란 굴레에서 영원히 해방되고 싶은 게 인간의 모순된 심리다. 시간은 우리의 경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엇이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시간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매달린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학자들의 사유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간의 깊이를 느껴보길 바란다.


시간을 쪼갤 수 있을까?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작품 ‘해돋이, 인상’(Impression, soleil levant, 1972)에서 유래한 ‘인상주의’라는 말은 당시 그 작품을 본 기자가 다소 부정적인 의도로 붙인 표현이다. 정식 학교(아카데미)에서 제대로 배운 화가라면 응당 그래야 할 현실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 능력 없는 화가가 주관적인 느낌에서 얻은 인상을 멋대로 그려놨다는 폄하가 담겨 있다. 물론 이는 모네 그림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모네가 해돋이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거기서 얻은 자신의 주관적인 인상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해가 떠오르는 한‘순간’이다. 그는 이토록 강렬한 한순간을 화폭에 담고 싶었던 것이지 거기서 얻어진 모호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모네는 현실을 제대로 그리고 싶다면 바로 지금 눈에 보이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의 반사에 불과하며 빛은 시시각각 변하므로 모든 것의 모습도 변한다. 그래서 모네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진짜 현실의 모습, 즉 정지된 한순간이었다. 루앙 성당의 맞은편 카페에 앉아서 시시각각 변하는 건물의 순간들을 일련의 시리즈로 그려낸 것이나 말년에 자신이 직접 만든 정원의 연못을 한없이 들여다보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연꽃의 모습을 일련의 시리즈로 그린 것도 순간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네는 시간의 흐름에서 한순간을 도려내 정지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네의 이러한 시도는 역설(paradox)에 빠지고 만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데생을 생략하고 물감의 배합마저 포기하며 미리 짜놓은 물감을 순식간에 캔버스에 찍어 발랐지만 그가 캔버스에 붓을 대는 순간 이미 수많은 시간이 경과하고 만다. 현재의 순간은 그것을 도려내는 순간 바로 과거가 돼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는 대신 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셔터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빛의 노출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에 기록된 이미지는 정지된 순간이 아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경과된 시간이다. 순간을 정지된 시간으로 이해할 경우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를 최초로 간파한 사상가는 고대 엘레아학파의 제논(Zeno pf Elea)이다. 그의 주장은 이른바 ‘제논의 역설’로 알려져 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결코 과녁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역설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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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떠난 화살이 과녁(T=Target)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활과 과녁의 중간 지점(M=Middle)을 통과해야 한다. 그 중간 지점(M1, 1/2)을 통과했다면 이제 그 중간 지점과 과녁(T)의 중간 지점인 M2(1/4)를 통해야 한다. 또 M2와 과녁(T)의 중간 지점인 M3(1/8)의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 활을 떠난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한한 중간지점, 즉 M1, M2, M3, M4…의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은 무한하므로 무한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활이 과녁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제논의 역설이다. 물론 제논의 설명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활을 떠난 화살은 충분한 힘만 주어진다면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과녁에 도달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제논의 역설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제논의 역설이 운동과 시간 자체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봤다. 시간의 흐름은 애초에 하나의 공간좌표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각각의 분절된 단위로 나누고 그 단위의 이행을 시간의 흐름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시간이란 원래부터 하나의 좌표로 나타낼 수 없는 흐름, 즉 ‘순수 지속’(durée pure)이다. 시간의 흐름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지속성, 즉 흐름 자체다. 제논의 역설은 우리가 시간을 마치 공간처럼 분할하고 좌표로 나타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어쩌면 시간을 초, 분, 시, 하루, 일주일, 일 년으로 나누는 데 익숙한 우리는 제논의 역설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이란 없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보고 몇 시에 아침을 먹을지, 몇 시간 후에 회사에 도착해야 할지 계산한다. 우리의 삶을 채우는 것은 시간의 흐름인데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시계나 달력에 나타난 좌표의 연속으로 이해된다. 저녁을 먹기까지 지금부터 정확하게 몇 시간, 몇 분이 남았는지 시계를 보면서 계산한다. 이렇게 시간을 하나의 좌표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는 우리는 모두 제논의 후예들이다. 원고 마감까지 몇 시간이 남았는지 시계를 보면서 계산하고, 몇 시까지 끝내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 필자를 포함해 우리들 모두 시간을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계산할 수 있는 물리적 양을 우리는 시간의 실체라고 믿는다.

이러한 일은 시간만이 아닌 공간에 대해서도 발생한다. 사회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에 따르면 근대사회의 삶을 특징 짓는 것은 공간을 시간적 차원으로 환원하는 태도다. 그는 이를 ‘시공간의 압축’(time-space compression)으로 정의한다. 시공간의 압축이란 한마디로 공간의 거리를 시간이라는 척도로 환원시키는 태도다. 전통적으로 공간은 인치, 미터, 척 등 고유한 공간적 단위로 측정된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공간은 시간의 단위로 환산된다. 가령 서울과 강릉의 거리는 20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과 부산의 거리와 거의 같은 이동시간이 걸렸으므로 비슷한 거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서울과 강릉의 이동시간이 급격하게 압축됨에 따라 그 거리는 서울과 부산 거리의 절반으로 여겨진다. 근대 건축의 대가이자 도시설계가인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도시건설은 자동차의 가장 효율적인 이동을 전제로 계획됐다. 이 역시 공간의 이동을 시간적으로 단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비에 따르면 이러한 시공간의 압축은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적인 결과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모든 경제적 생산물이 상품이라는 양적인 단위로 환원되듯이 공간이나 시간의 본질이 양적인 단위로 절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절대공간이나 절대시간의 개념은 이에 대한 가장 추상적인 표현일 것이다. 절대공간이란 말 그대로 공간의 상대성을 벗어나 있는 불변의 고정된 공간을 뜻한다. 오늘 청명한 날씨 탓에 유난히 가까워 보이는 앞산의 거리를 자로 재본다면 어제와 다름없다. 자로 재어서 같다면 오르막 경사 탓에 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거리와 한걸음에 내닫을 수 있는 평지의 거리는 절대적으로 동일하다. 산맥과 바다에서의 1㎞ 거리는 동일하게 1㎞일 뿐이다. 절대공간이란 공간을 채우고 있는 현실의 내용을 완전히 제거한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공간이다. 절대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따분한 10분의 시간과 배틀그라운드에 열중하고 있는 PC방에서의 10초처럼 느껴지는 10분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시간이다. 공간이나 시간이 어떠한 내용으로 채워지는가에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 그것이 바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이다. 뉴턴은 공간과 시간을 순수하게 수학적인,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하학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이후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시도는 오히려 뉴턴의 시공간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공간과 시간을 뉴턴처럼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거는 뉴턴과 완전히 달랐다. 칸트에게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인 이유는 시공간이 없으면 우리의 경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빨간색, 노란색 등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눈앞에 무엇인가를 보는 경험은 성립한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색깔인지만을 규정할 수 없을 따름이다. 하지만 시공간의 형식 없이는 본다는 경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가령 눈앞에 있는 것이 사과인지, 아닌지는 모르더라도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경험이 발생하지만 내 눈과 사과의 거리를 전제하지 않으면 본다는 경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방금 전에 그것이 여기 있었는지, 지금 있는지, 혹은 실제로 지금 없고 잠시 후에 있을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허상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내가 있는 지점과 사과의 거리, 방금 전의 경험과 지금의 경험이 지닌 순서(즉, 시간적 편차)의 일정함 없이 우리의 경험은 일관되지 않을뿐더러 아예 가능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우리의 경험이 가능하려면 이러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 필연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이 곧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증거인 셈이다.

칸트의 논증은 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증명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결정적인 점에서 뉴턴의 이론과 다르다. 뉴턴은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근거를 인간의 경험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칸트에게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근거는 인간의 경험, 즉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칸트는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한갓 주관적인 관념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리 사악한 사람일지라도 인간에게는 그 밑바닥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선함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사실 자체가 인간을 선하게 만든 신이 있음을 필연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라고 믿었다. 신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로 전제돼야 한다. 칸트는 이렇게 신처럼 인간이 허구적으로 만든 관념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요청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존재를 ‘이념’(Idee)이라고 불렀다. 칸트가 보기에 시간과 공간 역시 신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념이다.

그러나 칸트의 의도와 달리 그가 공간과 시간을 절대적인 존재, 즉 이념으로 보았음은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의 주관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 됐다. 이성과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근대 계몽주의의 정점에 도달한 칸트의 사상이 역설적이게도 근대적인 세계관의 한계를 노출하게 된 것은 그의 공간과 시간관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마치 화음의 법칙을 철저하게 고수하고 고전주의의 원칙을 극단으로 몰고 갔던 베토벤이 완벽한 화음을 위해서는 기존 화음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역설에 빠지게 된 것과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 시공간론을 극단으로 몰고 간 칸트의 이론은 현대 사상가들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통찰의 초석을 깔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은 공간과 시간이 경험과 무관하게 주어질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귀결은 곧 현대 공간론과 시간론의 출발점이다.

다시 시간의 문제로 좁혀보자. 상식적으로 볼 때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극히 주관적이지만, 일 초, 일 분, 한 시간으로 전개되는 시간이야말로 절대적이며 시간의 실체인 것처럼 여겨진다. 장례식에서의 5분과 팽팽한 운동경기에서의 긴박한 마지막 5분은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만 그러한 차이는 단지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차이일 뿐이고, 물리적으로 규정된 5분이라는 시간이 객관적인 시간이자 시간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어떠한 내용으로 채워지지 않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공허한 절대시간 자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공간이라는 것도 나무든, 인간이든, 산이든, 공기든 심지어 진공이라고 부르는 공기가 없는 상태든 간에 어떠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내용이 없는 공간은 상상할 수도 없으며 존재할 수 없다. 내용물을 빼놓은 추상적인 공간이란 말 그대로 현실을 추상한 공허한 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이야말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공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간 또한 항상 경험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시계에 나타난 공허한 시간의 흐름 역시 경험으로 채워질 경우에만 현실적인 시간이 된다. 경험되지 않은 시간, 즉 내용이 없는 공허한 시간이야말로 비현실적일 뿐더러 논리적인 추상이자 관념의 산물일 것이다.

현재란 과거와 미래의 중첩
물론 시간을 다루는 현대의 사상가들이 근대적인 시간관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다고 해서 절대시간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베르그송이나 하이데거 혹은 들뢰즈처럼 시간에 대해서 매우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현대의 사상가들도 절대시간의 차원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절대시간을 부정하고 시간의 순서를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되살리기 위해서 시간을 되돌리는 슈퍼맨의 능력은 현실이 아닌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과학적인 담론으로 포장했지만 여전히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모호한 ‘인터스텔라’에서의 다차원적이고 순환적인 시간의 흐름 역시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은, 그러한 과학적 신비주의는 이 사상가들의 대상이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을 마음대로 조작하거나 과거와 미래의 시간적 순서를 뒤섞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 철학자들의 시간에 관한 이론이 검증되지 않은 과학적 신비주의에 기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오산이다. 철학자들은 엔트로피 법칙에 내재한 비가역성의 원리는 시간의 세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다만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는 시간의 본질이 공허하고, 추상적인 연대기적 시간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그러한 추상적 시간이 시간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령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시자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연대기적인 순서로 흘러가는 공허한 시간은 추상적인 시간일 뿐 인간의 삶을 채우는 현실적인 시간이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순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순서는 비가역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추상일 뿐 우리의 삶을 채우는 진정한 시간이 아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좌표가 아닌 무한한 깊이를 가진 두터운 시간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란 단절된 현재가 아닌 무수한 과거와 무수한 미래가 공존하는 시간으로서의 현재다. 가령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한순간의 음만을 듣는다면 멜로디에 대한 경험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곡의 한 음을 들을 때 우리는 그 음을 고립된 하나의 음이 아닌 멜로디를 형성하는 음으로 듣는다. 달리 말하면 한 음을 듣는 현재의 순간에도 이미 과거의 음을 회상하고 앞으로 나올 미래의 음을 예상한다. 후설은 현재의 순간이란 항상 과거에 대한 회상(파지, retention)과 미래에 대한 예상(예지, protention)과 맞물려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과를 볼 때 현재 이 순간 눈에 비친 단면만 보지 않고 과거에 보았던 비슷한 것, 그리고 회전시켰을 때 보이게 될 뒷모습까지도 상상하면서 본다. 현재의 순간이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해 중첩하는 순간이며, 그 순간 역시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돼 또 다른 현재의 파지가 돼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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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제자였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인간이 여타의 존재와 다른 특징을 ‘시간(Zeit)’에서 발견했다. 이때 시간은 인간만이 지니는 것으로서 인간의 삶을 다른 존재와 구별해주는 양상이다. 인간이 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다는 일련의 연대기적 과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연대기적 과정은 동물도 거치며 심지어 돌덩어리나 산, 지구나 태양에도 적용된다. 인간의 시간이란 매우 독특한데 현재의 순간에도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 있다. 인간은 현재의 순간에도 항상 끝을 선취하고 있다. 로마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결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발생하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에픽테토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며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현재를 살면서도 현재를 넘어서 있다. 인간만이 미래를 이미 선취한, 즉 이미 삶의 끝을 예지하고 사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 끊임없이 현재를 통과하는 시간의 흐름이라면 그러한 현재의 시간은 과거 혹은 미래와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질적으로 다르다.

시간은 무한한 깊이를 지닌 현재의 연속
시간의 본질이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 흘러가는 순차적인 과정이라고 보는 것은 이른바 ‘선형적인 시간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주의 역사가 어느 순간 탄생해 마침내는 종말로 향하듯이 인류의 역사도 유아기로부터 청년기와 성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들어서 언젠가는 끝으로 치닫게 된다는 전형적인 서구의 역사관도 이러한 시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류가 성장할수록 미개의 상태로부터 점차 벗어나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진보적 역사관은 이러한 선형적 시간관의 대표적인 형태다. 그런데 선형적인 시간관은 시간이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실현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이 없다면 일정한 방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형적 시간관은 시간이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서사(이야기, narrative)’를 필요로 한다. 많은 학자가 최초의 선형적 시간관을 기독교적 시간관에서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세 기독교의 교리를 창설한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선형적 시간관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대비하는데 ‘신의 나라’는 생로병사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시간의 나라인 반면 ‘지상의 나라’는 시간이 존재하는 세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의 세계는 원래 ‘지상의 나라’로서 시간의 경과를 거치면서 다시 ‘신의 나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역사, 즉 시간의 흐름이란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싸워서 ‘지상의 나라’가 멸하고 구원받은 인간이 ‘신의 나라’로 들어가는 선형적인 시간의 과정이다. 역사란 자유의식의 진보 과정이라든가 민주주의의 실현과정, 혹은 계급사회에서 계급이 폐지된 무계급사회로의 발전과정이라는 식의 역사관은 모두 기독교적 역사관의 변형인 셈이다.

음악학자 캐롤 버거(Karol Berger)는 『Bach’s Cycle, Mozart’s Arrow(바흐의 순환과 모차르트의 화살)』에서 바흐의 음악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그들의 음악에 나타난 시간관으로 비교했다. ‘화살’에 비유한 모차르트의 음악은 전형적인 선형적 시간관을 나타낸다. 소나타 형식으로 대변되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주제는 기독교의 신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자 ‘선’이다. 주제는 그와 대립되는 주제, 즉 악과 갈등을 겪으면서 대립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대립된 주제도 선의 품에 안김으로써 선함이 승리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일정한 서사를 지닌 시작과 끝이 분명한 음악이다. 이에 반해 푸가 형식으로 이뤄진 바흐의 음악에서는 하나의 주제가 주어지지만 그 주제는 절대적인 선이나 신과 같이 증명돼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주제는 배열이나 위치의 변형, 음의 첨가나 생략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러한 반복과 변형의 과정은 특별한 서사나 의미 없이 반복하는 어린아이의 놀이와도 같다. 바흐의 푸가에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 연대기적 시간 대신에 분명한 시작과 끝이 없는 현재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바흐의 음악에서 현재는 서사를 이루는 한순간이 아닌 마치 영원과도 같은 무한한 순간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이렇게 무한한 순간의 시간을 연대기적 시간과 대비시킨다. 그는 연대기적인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부르는 반면 이와 대립되는 시간을 ‘아이온(aion)’이라고 명명한다. 아이온의 시간은 앞서 말한 바흐의 음악에서처럼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무한한 현재와도 같은 시간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현재의 순간이 무한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르그송의 주장처럼 시간은 ‘순수 지속’, 즉 흐름이므로 순간의 정지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없다. 바흐의 음악에서 현재가 영원한 현재를 이룬다는 것은 현재의 순간을 물리적으로 무한히 늘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무한한 순간이란 일정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좌표로서 현재가 아닌 무한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순간이라는 의미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현재의 순간은 미리 정해진 화음의 법칙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 ‘아이온’의 시간은 정해진 방향이 없으므로 무한한 방향의 가능성을 지닌다. 현재란 원래 무한한 깊이를 지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크로노스적인 시간은 서사에 의해서 현재의 의미를 고정시켜버린 것이다. 미국의 추상화가였던 뉴먼(Bannet Newman, 1905~1970)이 작품명을 ‘현재는 숭고이다’라고 붙인 것이나 프랑스의 철학자 리오타르(Jean François Lyotard, 1924~1998)가 현재를 무한한 숭고의 순간으로 예찬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지금’이라는 순간은 크로노스적인 시간 속에서 하나의 좌표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깊이를 지니고 있다.

들뢰즈는 영화에서 아이온의 세계를 발견했다. ‘클로즈업(closeup)’이 하나의 사례다. 대개 클로즈업은 영화의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서사를 보다 충실하게 드러내는 묘사의 기법으로 여겨진다. 가령 주인공이 분노하는 장면에서 얼굴의 클로즈업은 주인공의 분노를 더욱 명확하게 나타냄으로써 이야기의 전개를 분명하게 만든다. 그러나 들뢰즈는 클로즈업이 낳은 뜻밖의 효과에 주목한다. 충실한 묘사, 즉 크로노스적인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서 클로즈업된 얼굴은 예상치 못하게 관객으로 하여금 심리적인 동요를 유발한다. 클로즈업된 얼굴은 배경과 거의 분리되지 않음으로써 서사의 맥락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관객은 주인공의 얼굴에서 서사와는 상관없는 요소들을 발견한다. 깊이 팬 주름이라든지 제대로 흡수되지 않은 화장기, 또는 지나치게 단정한 머리카락이나 삐죽 튀어 나온 한 올의 흰 머리카락에서 예상치 않은 감정이 솟구친다. 이러한 경험은 서사와 무관할뿐더러 서사를 방해하고 서사의 시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정지된 순간의 경험인 것이다.

유독 영화에서는 이렇게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이탈하는 순간들이 많이 발생한다. 가령 1900년대 중반 구로사와 아키라와 쌍벽을 이뤘던 일본의 영화감독 미조구치 겐지(1898~1956)는 ‘롱테이크’의 독특한 사용으로 유명하다. 롱테이크란 필름의 편집 없이 하나의 카메라가 오랜 시간 하나의 혹은 다수의 장면을 담는 편집기법이다. 롱테이크는 주로 객관적인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데 사용된다. 대개의 영화는 주인공이 밥을 먹는 장면을 편집할 때 첫 숟가락을 뜨는 장면과 빈 밥그릇을 편집해 보여줌으로써 과감하게 시간적 흐름을 생략한다. 이에 반해서 밥을 먹는 장면을 편집 없이 하나의 연결된 쇼트로 담을 경우 시간적 생략 대신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시간과 실제 영화가 진행되는 시간이 일치한다. 롱테이크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영화에 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겐지의 롱테이크는 지나치게 지루할 정도로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채 주인공의 모습을 담는다. 여기서 관객은 마치 초상화를 보듯이 정지된 순간을 경험하며 주인공의 내면에 주목한다. 들뢰즈가 말한 클로즈업 못지않은 아이온의 시간이 발생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아이온의 시간에 주목하는 것은 결코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시간을 실제로 정지시키거나 거꾸로 조작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철학자들의 관심사도 아니다. 이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든지 ‘어바웃 타임’과 같은 영화적 상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들뢰즈가 영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만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매 순간의 현재들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과 깊이를 지닌다. 이것이 바로 아이온의 시간이다. 시간을 시, 분, 초의 단위로 계산할 수 있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닐뿐더러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노동을 시간의 단위에 의해서 추상화하고 크로노스를 절대화하는 것은 시간마저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필자소개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4호 Rebuilding a Sales Strategy 2022년 05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