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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5. 퇴계에게 배우는 ‘꼰대 방지책’

유교 사상이 ‘꼰대’라고? 오히려 정반대, 겸손한 퇴계는 제자에게도 예를 갖춰

이치억 | 249호 (2018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꼰대질’의 유래를 ‘유교’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오해다. 유교 사상을 잘 들여다보면 오히려 아주 강력한 ‘꼰대 방지책’이 들어 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은 퇴계 이황 선생이다. 그는 신진 학자 율곡 이이와 고봉 기대승에게 ‘많이 배웠다. 가르침을 줘서 감사하다’고 당연하게 인사할 만큼 상대의 얘기를 듣고 자신이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고치기를 서슴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야만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맹자는 “사람들의 병통은 남의 스승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데 있다”고 일갈했는데 어쩌면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꼰대’는 굳이 남에게 참견하고 가르치려 들고 겸손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을 ‘내 기준’에 맞춰 바꾸려 노력할 시간에 스스로 돌아보며 자신을 바꿔가려는 노력, 그것이 유교사상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퇴계 선생이 우리에게 몸소 보여줬던 최고의 ‘꼰대 방지책’이자 ‘꼰대 극복법’이다.

‘꼰대’와 ‘갑질’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권력이나 지위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꼰대는 인성 자체가 나쁜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 ‘갑질’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압력을 행사하고 때로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동반하는 나쁜 행위이지만 꼰대는 단지 권위적이고 완고할 뿐 상대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도덕과 예의를 중시하며, 따지고 보면 옳은 말을 한다는 점에서 꼰대는 어떤 면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꼰대는 결코 환영받을 사람도 아니다. 여전히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면할 수 없어 보인다.

갑질과 꼰대는 수직적 인간관계의 산물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수직적 인간관계가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존댓말과 반말이 뚜렷이 갈라지고, 상하 관계에 따라 호칭도 달라진다. 상명하복이 당연시돼 윗사람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관습적으로 금기시돼 있다. 이쯤에서 이러한 수직문화의 배후로 지목될 만한 ‘물건’이 떠오를 것이다. 바로 ‘유교’다.

한 번 미운털이 박힌 사람에게는 온갖 죄가 다 뒤집어 씌워진다. 이는 사상이나 문화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유교는 가부장제를 만들어 여성과 어린이를 억압하고, 신분제를 공고화해 사회를 정체되게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외세의 침략에도 대응하지 못한 문약(文弱)한 나라로 만든 망국 정치의 장본인이다. 뜬구름 잡는 학문만을 최고로 숭상하면서 탁상공론을 일삼고, 농(農)·공(工)·상(商)의 실업(實業)은 천시해 경제의 발전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유교의 특징 아닌가? 이쯤 되면 사실 ‘꼰대’나 ‘갑질’도 슬쩍 유교에 뒤집어씌우면 될 것 같다. 유교의 수직문화가 결국 오늘날 꼰대정신(?)의 밑바탕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은 그 반대이거나 오해다. 가부장제와 신분제, 남녀차별은 결코 유교의 산물이 아니다. 이는 근대 이전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15세기의 영국에 신분제와 가부장제, 여성 차별이 있다고 해서 그곳을 유교사회라고는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것은 전근대사회의 특성이지 유교사회의 특성이 아니다. 오히려 조선이라는 나라는 비록 문(文)을 숭상했고 상대적으로 무(武)가 약했지만,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500년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유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정신으로 한글이 만들어졌고, 유교 덕에 평화로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조선이 망했던 것은 왕조의 수명이 다한 시점에 식민제국주의가 침략했던 탓이지 결코 문을 숭상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라를 잃은 시기에 강력하게 저항해 국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문(文)의 힘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엄격한 상하관계 또한 유교의 산물은 아니다. 일례로, 유교국가에서는 왕권(王權)이 결코 신권(臣權)보다 강하지 않았다. 공자는 임금을 매우 존중하기는 했지만 임금이 잘못을 범하면 여러 번 직언을 하다가 그래도 듣지 않으면 지체 없이 떠났다. 맹자는 한술 더 떠서 임금도 감히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불소지신(不召之臣)임을 자처했다. 실제로 맹자는 임금을 알현하려 집을 나서다가도 임금이 사신을 보내서 왕궁에 좀 와 달라고 하자,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학덕이 높은 신하를 만나고자 한다면 소환을 할 것이 아니라 임금이 직접 찾아와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해명을 늘여놓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일반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된 꼰대와 유교의 유착성을 지우기는 부족할 것이다. 이른바 오늘날의 유림이라고 자칭하는 어르신 중 상당수가 예의와 도덕을 중시하면서 젊은이를 훈계하는 데 열을 올리고, 남의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필자가 잘 알기 때문이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며 훌륭한 분들도 많지만 말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유교사상 속에서 꼰대 방지 내지는 꼰대 극복법을.

한 가지 결여하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사실 꼰대는 반듯한 사람이다. 이 결여된 요소 하나만 제대로 보충할 수 있다면 꼰대는 분명 존경받는 ‘어르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겸손’이다. 앎은 쉬우나 실천이 어려운 덕목 중 하나가 바로 이 겸손이다. 이에 우리는 먼저 지극한 겸손의 실례(實例)를 접해보고, 어떻게 겸손을 실천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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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제자에게 예를 갖추다

명종 무오년(1558년)은 바야흐로 노년에 접어든 퇴계 이황(1501∼1570)과 두 소장학자에게 평생을 잊지 못할 한 해였을 것이다. 당사자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이 해에 있었던 두 번의 묵직한 만남은 훗날 조선 학계 전체의 방향을 형성한 위대한 만남이었다.

1. 초봄, 경상도 예안

2월6일, 율곡 이이(1536∼1584)가 당시 성주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자신의 장인 사인당 노경린(1516∼1568)을 만난 다음, 자신의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가는 길에 예안(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일대)을 지나면서 퇴계를 찾아왔다. 이때 퇴계는 조선 최고의 석학으로 존경받고 있었고, 율곡은 비록 문과에 급제하기 전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미래를 담당할 최고의 수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소장 학자였다. 율곡은 퇴계를 만나 그의 학덕을 찬미하는 시를 올렸다.

공자와 맹자의 학문에서 흘러나와
무이산 주자의 빼어난 봉우리를 이루었습니다.
(중략)
가슴 속은 우후(雨後)의 달처럼 환하며
담소는 요동치는 물결을 그치게 합니다.
소자는 도를 듣고자 하는 것
반나절 한가로움 훔치려는 것 아니옵니다.

율곡은 퇴계의 학문이 공자와 맹자, 주자의 적통을 이었다는 찬사를 보내면서 가르침을 청하고 있다. 과거의 선비들이 만나면 직설적인 대화보다는 압축적 언어인 시를 가지고 서로 흉금을 나눈다. 시를 받으면 그 시의 운자를 따서 화답시를 주는 것이 예의이지만 퇴계는 이 룰을 깨고, 이 시에 대해서만큼은 차운하지 않았다. 과도하게 칭찬하는 말에 대해 손사래를 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당초 퇴계를 알현하고 나서 하루만 머물고 떠나려고 했던 율곡이지만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었기 때문에 3일을 머물게 됐다. 그 사이에 이 두 선비는 인생과 학문에 대해 대화도 나누고 시도 몇 수 수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가 눈으로 바뀌고 율곡이 떠나던 날, 퇴계는 다음과 같은 송별시를 전하며 위의 시는 없애줄 것을 요청했다.

그대 와서 내 정신 시원케 해 주었소
명성 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이제야 알겠으니
몇 해 전 먼저 찾아보지 못했음이 못내 부끄러워라
(중략)
지나친 찬사는 모름지기 거두어 내고
노력하는 공부 서로 날마다 가까이 하세

아무리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수재라고는 하지만 이미 대학 총장을 지내고 은퇴한 대학자가 대학 신입생에게 ‘먼저 찾아보지 못해 부끄럽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과거시대라고 흔한 일은 아니다. 이는 나이와 지위를 초월한, 진리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2. 11월 초순, 한양

명종의 소환으로 한양에서 관직을 수행하고 있던 퇴계에게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찾아왔다. 앞선 계축년(1553년)에 퇴계는 추만 정지운이 작성한 ‘천명도(天命圖)’를 정정하면서 사단칠정을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규정한 적이 있었다. ‘천명도’란 성리학의 우주론과 심성론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론을 압축해서 도식화한 한 장의 그림이었다.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면 한 권의 책을 몇 페이지의 PPT로 압축한 것이라고나 할까? 사실 ‘천명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포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정추만이 스스로 성리학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학습노트였는데 우연히 이것이 퇴계의 손을 거치며 학자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킨 중요한 저작이 됐다. 당시 젊은 유생이었던 고봉도 이 ‘천명도’를 접했고, 몇 년을 기다린 끝에 논란의 장본인인 퇴계를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겼던 것이 바로 1558년 가을이었다. 고봉은 갓 대과를 급제한 신인 관료로, 퇴계는 국립대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관 대사성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고봉은 드디어, 오랜 시간 가슴에 품었던 질문을 당차게 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인물의 대화 내용은 기록돼 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 다만 첫 만남이 있고 난 다음 해 1월,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략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지난번에 서로 만나고 싶은 소망은 이뤄졌지만 꿈속에서 잠깐 만난 것 같아 의심나는 것을 깊이 질문할 겨를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서로의 의견이 혼연히 부합되는 곳이 있었습니다. 또 사우(士友)들을 통해 공이 논한 사단칠정에 대한 설을 전해 들었는데, 나의 의견도 이 점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이 온당하지 못함을 문제로 여기고 있던 터에 공의 지적을 받고는 엉성하고 잘못됐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였습니다. (퇴계집 권16)

첫 만남이 있은 후, 퇴계가 고봉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다. ‘깊이 질문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고, 또 논란의 주제인 사단칠정에 대한 질문을 ‘사우(士友)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11월의 만남에서는 고봉이 직접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거나 비중 있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11월의 만남이 있었기에 서신의 왕래가 시작됐으니, 이 만남이 조선의 학술사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이른바 ‘사단칠정논변’의 발단이 된 셈이다. 현재 퇴계집에 남아 있는 고봉에의 편지는 총 115통이고, 고봉집에는 사단칠정론을 집중적으로 논한 32편의 왕복 서간 외에 일반 편지도 133편이 수록돼 있다.

첫 만남에서 이 두 인물은 즉시 사제의 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직접 대면하여 학문을 논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고봉이 도산으로 퇴계를 예방하려 기획했던 일도 무위로 돌아갔지만 왕복한 서신의 내용으로 볼 때 두 사람은 가장 존경하는 스승과 가장 아끼는 수제자의 관계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훗날 퇴계가 마지막으로 사직을 하고 낙향할 때 선조 임금에게 학문이 뛰어난 인물로 율곡이 아닌 고봉을 천거한 것을 보면 고봉이 퇴계에게 어떤 제자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배경지식 없이, 즉 퇴계와 고봉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 채 그들의 왕복 서신을 접한다면 아마도 이 둘을 사제 관계라고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편지에서 고봉이 퇴계를 ‘선생’ - 상대에 대한 극존칭이다 - 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학문적 논의에서 만큼은 한발도 양보하지 않고 대범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견해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퇴계 역시 26살 아래의 제자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사용함과 동시에 고봉의 견해를 존중하고 때로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퇴계의 편지 곳곳에서 이러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지면의 제약이 있으니 한 대목만 소개하기로 하자.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인 1570년 10월15일에 고봉에게 보낸 편지다.

‘물격(物格)’과 ‘물리의 지극한 것이 이르지 않는다’는 설에 대해서는 삼가 가르침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전에 내가 잘못된 설을 굳게 지키고 있었던 까닭은 주자의 ‘리는 정의(情意)와 계탁(計度)과 조작이 없다’는 설을 굳게 지켰기에 … 저번에 도성에서 ‘리가 저절로 이른다’는 가르침을 받고, 일찍이 반복해서 사색해 봤는데도 역시 의혹이 풀리지 않았었는데, 근래에 주자의 말에 대한 공의 몇 가지 아이디어를 김이정으로부터 전해 들은 후에 비로소 나의 견해에 착오가 있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 이제 공의 고명한 가르침에 힘입어 기존의 망령된 견해를 버리고, 새로운 뜻을 얻고 새 품격을 펼치게 됐으니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퇴계집 권17)

죽음을 앞둔 70세의 노학자는 제자의 ‘가르침’을 받아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음을 고백한다. 비슷한 연배의 학자끼리도 자신의 견해를 비판받으면 서로 감정 싸움까지 이어져서 원수지간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한 현대의 학계와는 완전히 다른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하물며 현대의 어떤 학자가 26세 연하의 제자에게 ‘삼가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다[謹聞命矣]’라고 할 수 있을까?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겸손은 매우 중요한 미덕이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선비들은 모두 겸손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맹자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는 사람들이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면 기뻐했고, 우임금은 선한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절을 했다고 한다. 순임금은 사람들과 더불어 선을 행하면서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들의 선한 면모를 본받기 좋아했다고 한다. 또 공자의 어떤 제자는 “자신이 유능한데도 불구하고 유능하지 못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보고, 학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사람에게 물어봤다”고 전해진다.

과거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겸손은 중요한 미덕이다. 누구도 겸손한 사람을 욕하지는 않는다. 겸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환영받는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진정한 겸손은 입과 몸으로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속으로는 교만하면서 말로만 자신을 낮추고 행동만 굽실대는 것은 진정한 겸손이 될 수 없다. 공자가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그토록 싫어했던 이유다. 속은 다르면서 겉으로 모양만 꾸미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지인 중에 국내 최고의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로서 타고난 기억력이 매우 좋은데다 꾸준한 독서를 통해 엄청난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 있다. 그의 입버릇은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라고 운을 떼는 것이었는데 그 이외의 모든 말은 결국 자신의 지식 자랑과 타인의 험담으로 점철되곤 했다. 나름대로 겸손을 실천해 보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의 말이 주는 불편함 때문에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말로 겸손하고자 했다면, 그는 “공부가 부족해서…”라는 가식적인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과 남의 험담을 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

겸손은 이와 같은 가식이 아니다. 겸손은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당대에나 후대에나 퇴계가 존경받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진실된 겸손함에 있었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떻게 이러한 겸손이 가능했을까?

첫째, 세상의 지식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다는 자각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는 공자의 말은 후대의 유학자들이 자신의 지식에 대한 겸손을 실천할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유학자들은 이것을 ‘알았다’라고 하기 전에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체크했다. 아는 것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모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열린 자세다. 공자는 “배우면 고루해지지 않는다”고 하며 배움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배움의 효용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 기존 지식을 점검함으로써 정확한 지식을 얻는 데 있다. 지식이 부정확하다면 언제라도 수정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용기와 열린 자세는 선비들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었다.

셋째,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든 배울 것이 있다는 유연한 자세다. 공자는 “세 명이 길을 가고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는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한 분야에 뛰어난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의 장점과 특기를 배울 수 있다. 형편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의 반면교사가 된다. 시정(市井)의 필부에게도, 천진한 어린아이에게도 분명히 배울 만한 무언가가 있고, 개나 고양이에게서도 배울 것은 있다. 퇴계는 특히 이 세상의 모든 곳에 도(道)가 있으므로 어느 시점, 어느 곳이든 모두 배움의 자리가 된다고 했다.

학문에 대한 퇴계의 이러한 겸손한 태도는 학문에 임해서는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 성장시켜주는 원동력이 됐고, 생활 속에서는 타인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는 기반이 됐다.

겸손은 왜 어려운가?

우리는 누구나 겸손이 좋다는 사실을 안다. 겸손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더 존경받게 된다. 겸손이 무엇인지, 겸손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실천이다. 사람들은 왜 겸손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할까?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단계에 제시돼 있듯 사람은 타인에게서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은 욕구를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타인의 인정과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 된다. 그러니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있다가는 인정과 존중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 두려움에서 사람은 자신을 더 드러내려고 한다. 또 하나는 우월감의 추구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가 특별한 존재이기를 원하며 거기에서 우월감을 추구한다. 맹자가 “사람들의 병통은 남의 스승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데 있다”고 꼬집었듯 우월감 획득의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이나 지시를 내리는 일이다. 조금 더 수월하게 우월감을 획득하려면 나이가 어리거나 지식이 적은 만만한 상대를 골라 가르치고 지도해야 한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순간 겸손은 멀어지고 꼰대에의 길은 가까워진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문제의 해결법에 근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정과 존중을 받고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욕구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물 등을 뽐내거나 타인을 훈계하면서 존중과 우월감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사실 정말로 우월한 사람은 절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공자가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남이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라”고 충고했듯 우월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을 쏟을 곳은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있지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지 않다.

남을 훈계함으로써 잠깐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마약으로 얻는 잠깐의 쾌락과 같은 일종의 착각이다. 남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순간 자신이 그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들고 우쭐해진다. 꼰대는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자꾸만 젊은이를 훈계하는 데 빠져든다. 게다가 그 훈계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가치 있는 일이며 세상을 조금 더 산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착각이다. 그 사람을 위해서 훈계를 한다면, 그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정말로 그를 자식처럼 사랑하는가? 여기에 ‘그렇다’라고 흔쾌히 대답하지 못한다면 훈계를 하는 그 마음은 단지 우쭐해지고 싶은 욕구가 마각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얼마 전 지인 A씨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날 출근길에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이 다가오더니 아주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 죄송한데요. 혹시 라이터를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흡연하는 학생을 무턱대고 훈계했다가는 봉변을 당하는 세상인지라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학생들을 보더라도 그냥 지나가는 것이 상책이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체구도 왜소한 학생이 겁 없이 혼자 왔기에 혼을 내서 쫓아버릴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그는 그냥 허허 웃으며 라이터를 빌려주고는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학생, 벌써부터 담배 너무 많이 피우면 키 안 커!” 그랬더니 학생은 또 꾸뻑 예의를 차리며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고는 담배에 불을 붙여 총총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어이없어 하며 혼쭐을 내주지 그랬냐고 타박했지만 그의 이유는 나름 타당성이 있었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아서.”

A씨의 행위는 과연 타당했던 것일까?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겠는가? 혼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논리는 대개 이렇다. “고등학생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나쁘다. 나쁜 짓을 하는 학생에 대해서 어른으로서 훈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이런 상황을 방관하는 것은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옳지 않은 상황을 접했을 때 이른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발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심리작용이다. A씨 또한 순간 어이가 없고 잠깐 화도 났지만 굳이 그것을 표출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만일 그 학생이 자신의 친척이거나 친구의 아들이라면 혼을 내고 바른길로 인도하려고 했겠지만 생면부지의 학생에게 굳이 훈계를 할 ‘열정’은 없었다는 것이다. 또 훈계를 한들 달라지는 것이 없고 서로 기분만 나쁠 것이기에 웃으며 넘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맹자는 일의 경중을 잘 구분해서 실행에 옮기라고 한다.

“만일 자기 식구가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다면 머리를 풀어 흩트린 채 집에 있다가도 급한 대로 갓끈만 매고 가서 말리는 것이 옳다. 동네 사람끼리 싸우고 있다면 머리를 풀어 흩뜨리고 갓끈만 매고 급히 달려가서 말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니 비록 문을 닫고 모른 척해도 괜찮다.”

이 말은 세상에 무관심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단속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 꼰대질을 해도 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잘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가족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적절한 방식으로 바른 길로 인도해야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그는 오지랖 넓은 꼰대가 된다. 특히 가장 잘 살펴보고 단속해야 할 ‘자기 자신’은 버려둔 채 타인을 훈계하고 인도하려 한다면 더 답답한 꼰대가 된다.

겸손은 자기 자신의 무지와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다. 이 자각이야말로 향상과 진보의 첫걸음이며 꼰대에서 어르신으로, 또는 선생님으로 거듭나게 하는 촉매제가 된다. 젊은이에게 기피 대상이 되는 꼰대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향기로운 어르신이 될 것인가? 그 열쇠는 ‘겸손’에 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

중언부언하지 않더라도 ‘겸손’이 좋다는 사실은 안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다. 맹자는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자는 상대방이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힘이 부족해서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진실로 복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겸손하기 위해서는 덕이 있어야 하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렵기는 하지만 겸손이 몸에 밸 수 있도록 자기 절제를 충실히 실천한다면, 겸손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이상적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당장 일처리도 똑바로 못하는 부하직원들을 간섭하지 않으면 팀이 똑바로 굴러가지 않을 거라 걱정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직접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겸손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참견해야 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대학 시절, 매우 엄하고 깐깐한 교수님이 계셨다. 일처리에 빈틈이 없고 책임감이 넘치는, 그래서 학교를 홀로 어깨에 짊어진 듯한 사명감으로 강의와 연구, 행정업무까지 담당하던 소장 학자였다. 하루는 학과 회의에 정시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학교로 달려가던 중 그만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고 말았다. 며칠 동안 깨어나지도 못할 정도의 중상이었지만 다행히 의식을 되찾았고, 비록 이마에 흉터가 남기는 했지만 긴 치료 끝에 학교에 복귀하셨다. 그런데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했다. 사람이 180도 변해버린 것이다. 이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내야 할 상황인데 허허 웃으며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모두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머리가 이상하게 돼 버린 것 아닌가 의심했지만 나중에 설명을 듣고 알았다. 교수님 왈, “이전엔 내가 아니면 학과가 형편없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해서 죽도록 뛰어다녔는데 죽음의 문턱에 갔다 와 보니 내가 없이도 학과는 잘 돌아가고 있더라.” 그러면서 자기 한 사람 없다고 조직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보너스로 얻은 인생 아등바등할 것 없이 즐겁게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분은 아직도 항상 미소를 가득 안고 즐겁게 생활하고 계신다.)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한 소리지만 조직은 한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존폐가 달라지는 곳이 아니다. 물론 조직의 구성원은 각자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야 한다. 조직의 존폐와 성쇠는 구성원의 임무 수행 충실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즉 나는 ‘나의 일’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지 타인의 일에 오지랖을 떨 이유가 없다.

제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마음이 없었다고 전한다. ‘내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없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없고, ‘고집하는 마음’도 없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도 없었다. 공자가 전해주는 ‘겸손’의 메시지다.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고집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커녕 다른 사람 한 사람도 바꿀 수 없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은 누군가의 의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임무에 충실함으로써 저절로 바뀌는 것이다. 컨트롤 가능한 범위를 넘어 의미 없이 끙끙댈 시간에 자신의 일에 충실할 뿐이다.


이치억 성균관대 초빙교수 muhayu@daum.net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성균관대·아산서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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